크고 많은 것을 싫어하는 사람을 별로 본 적이 없다. 다다익선(多多益善)이란 말도 이런 우리의 정서에서 연유된 것 같다. 한강에 다리 하나가 놓이면 어김없이 대교(大橋)란 말을 붙인다. 누가 작다고 시비 거는 사람 하나 없는데도 조형물 하나를 설치해 놓고도 그 앞에 ‘세계최대’, ‘동양최고’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일에 능숙하다. 이것마저 여의치 않으면 하다못해 ‘극동의 최고’라는 말이라도 갔다 붙여야 직성이 풀린다.

우리의 신앙도 이런 정서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교회 안팎에서 물량주의, 성장지상주의에 대한 지탄의 소리가 그치지 않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어릴 적 친구들 가운데 목회를 하는 친구가 나에게는 세 명이나 있다. 그래서 만나면 목회현장에서 겪은 일들을 이야기하고 평신도로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느낀 이야기를 서로 허심탄회하게 나눌 수 있어 좋다.

구리시에서 목회하는 친구의 이야기다. 교회를 건축하려는데 성도 한 사람이 거액의 헌금을 하려는 낌새를 알아채고 막았단다. 그 이유는 한 사람이 교회건축을 전담하다시피 하면 혹여 그 사람 마음 가운데 그 교회 주인 노릇을 하고 싶은 마음이 싹틀까 염려가 되어서라고 한다.
  
얼마 전에 우리 모두가 보고 들은 이야기도 있다. 청량리 다일공동체가 병원건립을 위한 모금을 하고 있을 때 전직 대통령 아들을 비롯해서 몇몇 인사들이 거액의 헌금을 제의하였다가 거절당했다. 그 거부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다일공동체는 병원건립 자체보다 모든 사람의 이름다운 뜻을 모으는 일을 더 귀하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요즘 교회 헌금에도 상한선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 본다. 많은 경우 교회가 예배당 건축을 끝내고 숨을 돌리고 나면 하는 일이 있다. 주차장을 넓히고 교육관을 건축하는 일이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것이 기도원을 세우는 것이라고 한다. 혹자는 이를 변화산 교회라고 부른다. “여기에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겠다"(눅 9:33)는 베드로의 제의에 빗대서 하는 말이다.
  
현실적으로 필요한 시설을 확충하는 일 자체를 놓고 결코 비난을 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종종 성도들의 작은 뜻이 무시되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많은 헌금만을 귀하게 여긴다. 가진 것이 없어서 마음뿐인 사람은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을 교회 안에서 소외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헌금의 상한선 문제도 심각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교육관과 주차장 공사비가 총10억 원인데 장로님들이 벌써 4억 원을 헌금하였다”고 한다. “평당 건축비가 5백만 원인데 누구는 벌써 몇 평 공사비를 헌금하였다"고 한다. 왜 이런 사실을 공예배 설교를 통해 교인들에게 알리는지 모르겠다. 이미 이만한 헌금이 확보되었으니 교인들은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말인지, 아니면 그러니 더 많은 헌금을 독려하는 것인지 그 뜻을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성경은 분명히 헌금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느니라"(고후 9:7)

이미 수 억 원을 헌금한 것으로 알려진 장로를 만나면 내 마음은 벌써 주눅이 든다. 그가 내민 손을 잡을 때면 나는 이 교회 주인님의 손을 잡는 것 같은 야릇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나는 어느새 빚쟁이가 된 기분이다. 여기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주인의식’을 갖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일은 아름답다. 그러나 ‘주인 행세’를 하도록 교회가 이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 가지지 못한 자들이 교회 밖으로 내몰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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