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은 교회에서는 잠자코 있어야 합니다. 여자에게는 말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습니다. 율법(창 3:16)에서도 말한 대로 여자들은 복종해야 합니다. 배우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으십시오.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자기에게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것은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띄운 첫 번째 편지의 일부(고전 14:34~35)입니다. 남자인 저로서도 읽기에 정말 곤혹스럽습니다. 신문 기사라면 편집 가위로 싹둑 잘라내고 싶은 부분이지요. 여성들이이야 오죽할까요. 무엇보다 바울 사도의 여성관에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생각에 전체 바울 서신에 대한 불신감마저 듭니다. 더군다나 몹쓸 권위주의에 찌든 일부 한국 대형 교회 담임목사들이 '여성 신자 제압용'으로 이 부분을 인용할 때면 깊은 한숨이 나오지요.

"사본상의 증거와 14장의 문맥과 고린도전서 전체에서 드러나는 바울의 사상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보면, 14장 34~35절은 바울이 쓴 단락이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이 단락은 필사자(筆寫者)가 본문을 변경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추측컨대 아마도 난외에 적어 놓은 주석이 본문 안으로 흘러 들어갔을 것이다. 본문을 이처럼 변경시킨 필사자는 의심할 여지도 없이, 여자들이 교회에서 어떠한 공식적인 역할도 수행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여성에 대한 이러한 견해가 본문 안으로 흘러 들어간 것이다."

신약성서 본문비평 및 본문 전승, 초대교회, 예수의 생애 등에 관한 세계적인 권위자로 알려진 바트 어만(Bart D. Ehrman) 교수의 저서 <성경 왜곡의 역사(Misquoting Jesus)>의 일부입니다. 그간 고민과 의심으로 기우뚱했던 저의 성경 읽기를 꽉 붙들어 준 정말 고마운 책이지요. 전문 서적 코너에 꽂혀 있어 딱딱한 글이겠거니 했는데, 어만 교수의 탁월한 '대중적 풀어쓰기'에 말랑말랑해졌나 봅니다. 비전문가인 제가 하룻밤에 쭉쭉 읽어 내렸으니 말이지요. 성서의 전승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보여 주는 한 편의 다큐였습니다.

필사자들이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손으로 한 자 한 자 베껴 쓴 수천 개에 이르는 사본들을 연구하여 우수한 성서 본문으로 재구성하는 '신약성서 본문비평(textual criticism)'. 이 학문은 기독교와 성서에 관심 있는 사람들, 심지어는 성서학에 관심이 있는 이들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분야라지요. 저자는 "본문비평이 300년 이상 지속되어 온 학문임에도 일반 독자를 위해 쓰인 서적이 거의 전무한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기껏해야 우리 신자들이 사용하는 관주성경의 난외주를 통해 그 결과물이 살짝 고개를 내밀 수 있었지요.

어만 교수는 본문 변경의 여러 가지 원인 가운데, 교리적 요인(△양자론적 기독론 △가현설적 기독론 △분리주의 기독론)과 사회적 요인(△초기 교회에서의 여성의 역할 △기독교인들의 반유대적 정서 △적대적 이교도들과의 갈등)을 지적하지요. 저는 앞서 제기한 사도바울의 여성관과 관련하여, '초기 교회에서의 여성의 역할'이 전문 필사자들 이전의 아마추어 필사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흥미롭게 설명한 부분을 소개하려 합니다. 부디 이 글을 통해 교회 안팎에 도사리고 있는 남녀 불평등의 불씨들이 사그라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초기 교회의 여성들

사실 교회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역할이 신약성서 본문 전승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영향을 끼친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다. 이와 관련된 재미있고 중요한 단락들이 있다. 이러한 종류의 본문 변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러한 논쟁의 배경부터 짚어 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오늘날 학자들은 초기 교회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한 논쟁이 벌어진 것은 여성에게 주어진 일정한 역할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여성들에게 매우 중요하고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역할이 주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한 직후부터 여성들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지 않았던가! 물론 열두 제자를 포함한 예수의 최측근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남자였다. 이것은 1세기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활동하던 유대인 교사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초기 복음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여성들도 예수를 따라다니지 않았던가! 게다가 이 가운데 일부는 예수와 제자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했으며, 예수의 순회 선교 사역의 후원자 역할을 잘 감당했다(막 15:40~47, 눅 8:1~3). 예수는 공개적으로 여인들과 대화를 나누셨으며 여인들을 대상으로 사역했다(막 7:24~30, 요 4:1~42). 특별히 여인들은 예수가 예루살렘에 갔던 마지막 여행에 동행했다. 여인들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목격했으며, 남자 제자들이 도망갔을 때도 끝까지 예수를 믿고 따른 것은 오로지 여인들뿐이었다고 복음서는 보도하고 있다(마 27:55, 막 15:40~41).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여인들이 빈 무덤을 발견했다는 복음서 기자들의 보도다. 4복음서는 일제히 막달라 마리아가 빈 무덤을 발견했으며, 결과적으로 처음으로 예수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를 증언하게 되었다고 보도한다(마 28:1~10, 막 16:1~8, 눅 23:55~24:10, 요 20:1~2). 예수의 메시지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여인들의 관심을 끌었을까? 대다수 학자들은 예수가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했다고 확신한다.

하나님나라에서는 부자건 가난한 자이건, 노예건 자유인이건, 남자건 여자건 모든 사람들이 동등하다. 이와 같은 예수의 메시지가 당시에 억압당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매력적이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과 버림받은 자들에게 예수의 말은 희망의 메시지였을 것이다. 물론 여자들에게도 말이다. 어쨌든 예수의 메시지는 예수가 죽은 뒤까지도 여인들에게 매력적이었다. 2세기 말의 켈수스를 포함해 초기 기독교의 이교도 적대자들은 기독교인들이 거의 모두 아이들과 노예들과 여자들이라는 이유로 기독교를 업신여겼다.

전체적으로 보아 사회적으로 천한 사람들의 집단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켈수스의 주장에 반박문을 쓴 오리겐도 이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은 약한 자들을 들어 그들에게 힘을 주실 것이라고 함으로써 켈수스에게 대응하려고 했다. 하지만 초기 교회에서 여성들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멀리 2세기 말까지 갈 필요도 없다. 가장 초창기 기독교 저자의 작품들이 이미 이와 같은 사실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남아 있는 이 사람의 작품, 바로 바울의 편지들이다.

신약성서의 바울 서신을 보면 매우 초기부터 태동하는 기독교 공동체에서 여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로마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서 바울은 로마 교회의 여러 사람들에게 안부 인사를 한다(로마서 16장). 물론 여기서 바울이 여자들보다는 남자들을 더 많이 언급하기는 하지만, 분명히 여인들도 언급하고 있다. 바울은 교회 안에서의 위치가 교인들에게 전혀 뒤처지지 않는 여인들을 거명하고 있다. 예를 들면, 바울은 겐그레아 교회의 집사인 뵈뵈를 언급한다(1절).

뵈뵈는 바울의 후원자였다. 로마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바로 이 사람을 통해 보낼 정도로 바울은 뵈뵈를 신뢰했다(1~2절). 브리스길라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바울의 동역자인 브리스길라는 남편 아굴라와 함께 이방 선교를 책임지고 있었으며, 기독교 공동체가 자기 집에서 모임을 가질 수 있도록 힘껏 지원했다(3~4절). 여기서 여자인 브리스길라가 남편 아굴라보다 먼저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도 암시하는 바가 크다. 마리아라는 여인도 소개된다(6절). 바울의 동역자로서 마리아는 로마 교인들을 위해 일한 것으로 되어 있다.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와 버시라는 여인들도 언급된다(12절). 그 외에도 율리아, 루포와 그의 어머니, 네레오와 그녀의 자매도 있다. 이들은 모두 공동체 안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13, 15절). 이 모든 여인들 가운데 가장 관심이 가는 인물은 유니아다. 우리말성경에서는 그녀가 "사도들에게 좋은 평을 받고 있다(7절)"고 되어 있지만, 그리스어 신약성서의 문장은 "사도들 가운데서 가장 뛰어나다"고 번역할 수 있다. 이것만 보더라도 당시의 사도들은 우리들이 잘 아는 열두 명의 제자들의 범위를 넘어선 것 같다.

요약하자면, 여인들은 바울의 시대에만 해도 혁혁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같은 여인들의 높은 지위는 사실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조금 어색한 일이었다. 앞서 논의한 바와 같이 이러한 신약성서의 보도는 아마도 예수의 메시지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제 곧 오게 될 하나님나라에서는 남성이나 여성이니 다 동등할 것이라는 보도이다. 이것은 예수의 메시지일 뿐만 아니라 바울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이 사실은 갈라디아서에 나타나는 바울의 유명한 선포에도 잘 드러나 있다.

"여러분은 모두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 3:27~28)."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동등하다는 사상은 바울 공동체의 예배 의식에서 분명하게 나타났을 것이다. 여자들은 침묵하는 가운데 그저 수동적으로 '말씀을 듣는 사람'이 아니었고, 오히려 활발하게 예배에 참여했다. 예를 들면, 여자들도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기도와 예언하는 일을 했다(고전 11장). 동시에 현대의 주석가들은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상하 관계로 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논리적으로 생각할 때 상하 관계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바울이 의도했던 바는 그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보자. 교회에서 여자가 기도하거나 예언할 때, 바울은 이들이 그 머리에 '권위의 표'로 무언가를 쓰고 할 것을 요구한 것만은 분명하다(고전 11:3~16, 특히 10절).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바울은 남자와 여자의 사회적인 관계를 혁명적으로 뒤엎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마치 그리스도 안에서 노예도 없고 자유인도 없다고 하면서도 노예 제도를 폐지하자고 주장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바울의 주장은 (하나님나라가 도래할 때까지)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모든 사람은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만족하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자신의 처지를 바꾸려고 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가 노예이든 자유인이든, 기혼자이든 미혼자이든, 남자든 여자든 그 상태 그대로 머물라는 뜻이다(고전 7:17~24). 이러한 바울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사실 여성의 역할에 대한 바울의 태도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자들은 남자들과 동등하며 교회 생활에 공식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결코 남자와 같지는 않다. 여자들은 머리에 쓴 것을 벗어서도 안 되고 그 '권위의 표' 없이 남자 흉내를 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바울의 모호한 표현은 후대 교회에서의 여성의 역할에 재미있는 영향을 끼쳤다. 일부 교회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동등함이 강조되었다. 반면에 다른 교회에서는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근거로 바울의 표현이 인용되었다. 따라서 전자의 교회에서는 여성들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물론 지도자의 위치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반면 후자의 교회에서는 여성의 역할이 축소되었으며 여성들은 교회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바울이 죽은 뒤, 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교회와 관련된 후대의 문서를 보면 여성들의 역할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결국 나중에는 전 교회에 걸쳐 여성들을 억압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바울의 이름으로 된 한 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오늘날의 대다수의 학자들은 디모데전서가 바울이 직접 쓴 편지가 아니라는 데 동의한다. 아마도 바울의 제2세대 추종자 가운데 한 사람이 쓴 문서일 것이다.

신약성서에는 여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잘 알려진 구절이 여럿 등장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디모데전서에 나온다. 이 단락에 의하면, 율법에서 증언하는 대로 여자는 처음부터 남자보다 열등한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남자를 가르치려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먼저 아담을 지으시고 나중에 아담을 위하여 하와를 지으셨다. 따라서 하와가 아담을 지배할 수 없는 것처럼 여자가 남자를 가르치려 하거나 지배해서는 안 된다.

더 나아가 디모데전서의 저자에 의하면, 여자가 가르치는 역할을 맡게 되면 그 결과는 뻔하다. 여자는 선천적으로 (마귀에게) 잘 속는 체질이기 때문에 여자가 남자를 가르치게 되면 결국 그 남자를 미혹하여 잘못된 길로 이끌 뿐이다. 따라서 여자들은 집에 있으면서 '여자답게' 살아야 한다. 즉 남편을 위하여 자녀를 낳고 겸손하게 지내야 한다. 바로 아래의 구절이 위의 내용을 담은 단락이다.

"여자는 조용히, 언제나 순종하는 가운데 배워야 합니다. 여자가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을 나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조용해야 합니다. 사실, 아담이 먼저 지으심을 받고 그 다음에 하와가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아담이 속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여자가 속임을 당하고 죄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가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을 지니고 정숙하게 살면 아이를 낳는 일로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딤전 2:11~15)."

그렇지만 이러한 해석은 바울의 견해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다. 바울은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고전 11:11)"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2세기에 접어들면서 두 진영 사이에 전선이 명확히 그어졌다. 여성들에게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는 교회도 있었으며 또 여성들이 교회에서 침묵하고 남자들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확고하게 믿는 교회도 있었다. 후에 성서가 된 문서를 베끼던 필사자들도 여성의 역할에 대한 이러한 논쟁에 무관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결과, 이러한 논쟁은 때때로 성서 본문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사본을 베끼는 필사자들의 생각이 본문에 반영되어 있는 셈이다. 여성의 역할과 관련된 본문상의 변경이 발견되는 단락들을 살펴보면 거의 모든 단락에서 본문이 한쪽 방향으로만 변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방향이란 교회에서의 여성의 역할을 제한하고 여성의 역할을 축소하는 쪽이다. 여기서 몇 단락만 살펴보도록 하겠다.

여성의 역할과 관련된 본문의 변경

지금 우리가 다루는 주제, 즉 교회에서의 여성의 역할이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가장 먼저 살펴야 할 단락은 고린도전서 14장이다. 영어로 번역된 성서를 포함해 대다수의 성서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평화의 하나님이십니다. 성도들의 모든 교회에서 그렇게 하는 것과 같이 여자들은 교회에서는 잠자코 있어야 합니다. 여자에게는 말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습니다. 율법에서도 말한 대로 여자들은 복종해야 합니다. 배우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으십시오.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자기에게 부끄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났습니까? 또는 여러분에게만 내렸습니까?(고전 14:33~36)."

이 단락은 매우 분명하고 직접적인 어조로 여성이 교회에서 (가르치는 일은 고사하고) 말하는 것도 금지한다는 내용의 명령처럼 보인다. 디모데전서 2장 내용과 매우 유사하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대다수의 학자들은 바울이 디모데전서를 쓰지 않았다는 데 동의한다. 물론 고린도전서가 바울의 편지라는 사실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단락만큼은 바울의 진정성이 의심된다.

지금 문제가 되는 구절(34~35절)과 관련된 중요한 이문(異文, 변경된 구절)이 몇 개 있다. 3개의 그리스어 사본과 몇몇 라티어 사본에 보면 이 구절은 33절 바로 뒤가 아니라 뒷부분 즉 40절에 뒤이어 나온다. 이를 근거로 어떤 학자들은 이 부분을 바울이 쓰지 않았다고 추정한다. 이들에 의하면 디모데전서 2장의 영향을 받은 어떤 필사자가 난외에 주석을 달아 놓았는데 이것을 대본으로 삼은 다른 필사자들이 그것을 본문에 첨가시켰다. 어떤 필사자는 33절 다음에 삽입시켰으며 또 어떤 필사자는 40절 다음에 삽입했다는 것이다.

이 단락이 바울의 저작이 아니라고 여길 만한 이유는 그 밖에도 많이 있다. 먼저 이 단락은 문맥에 맞지 않는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바울은 교회에서의 예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기독교인 예언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들이 공중 예배 시간에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지를 가르친 것이다. 이것이 바로 26~33절의 주제다. 또한 36~40절의 주제도 이와 같다. 만약 34~35절이 빠진다면 '기독교인 예언자들의 역할'이란 주제가 일관되게 드러나며 전체적으로 문맥도 훨씬 부드러워진다.

그런데 여성들의 역할이라는 주제는 지금 이 단락의 문맥을 끊어 버린다. 다시 말하자면 바울은 지금 다른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여성의 역할이라는 주제가 끼어들어 그 원래 주제의 흐름이 끊기고 있는 것이다. 문맥의 문제만도 아니다. 이 구절은 매우 파격적으로 보인다. 바울이 고린도전서의 다른 맥락에서 말하는 내용과 너무나 명백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여자들이 교회에서 말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다. 고린도전서 11장을 보면 기도하거나 예언할 때 여자들은 반드시 무언가를 머리에 써야 한다(고전 11:2~16).

기독교인들이 예배를 드리는 중에 기도와 예언 활동은 예나 지금이나 큰 소리로 하는 것이다. 바울의 진정성이 의심받지 않는 바로 이 단락에서 바울은 여자들이 교회 안에서 말하는 것을 인정한다. 그는 여자들이 교회 안에서 말할 수 있으며 또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다루는 고린도전서 14장의 해당 구절을 보면 '바울'은 여자들이 말하는 것을 전혀 허용하지 않고 있다. 이 두 본문은 명백히 상충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1장이 보도하는 것처럼 바울은 여자들이 말하는 것을 허용했는가? 아니면 14장에서처럼 전혀 허용하지 않았는가?

바울이 11장에서는 이런 말을 하고 그런 말을 한 바로 뒤 14장에서는 이와 완전히 반대되는 말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이 때문에 14장에 나오는 구절이 바울의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따라서 위에서 논증한 바를 종합하면 즉 사본상의 증거와 14장의 문맥과 고린도전서 전체에서 드러나는 바울의 사상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보면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은 바울이 쓴 단락이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이 단락은 필사자가 본문을 변경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추측하건대 아마도 난외에 적어 놓은 주석이 본문 안으로 흘러 들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다른 많은 사본들에 어느 정도 일관되게 이 단락이 33절 뒤에 있는 것을 보면 이러한 변경이 일어난 것은 매우 초기의 일이라 할 수 있다.

본문을 이처럼 변경시킨 필사자는 의심할 여지도 없이 여자들이 교회에서 어떠한 공식적인 역할도 수행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는 사람이었다.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해야 하고 남편들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필사자가 본문을 변경시켰다. 그래서 여성에 대한 이러한 견해가 본문 안으로 흘러 들어간 것이다. 본문을 변경시키기까지 하면서 말이다. 이와 비슷한 종류의 구절이 몇 가지 더 있다. 그 가운데 몇 구절만 간단히 살펴보자.

한 구절은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는 로마서 16장이다. 여기서 바울은 유니아(Junia)라는 여인과 그의 남편으로 추정되는 안드로니고에 대해 말한다. 그런데 그리스어 원문을 보면, 바울은 이 두 사람을 '사도들 가운데서도 선두권에 있는 자들(7절)'이라고 부른다. 이 구절은 매우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신약성서 전체에서 여자를 사도로 부르는 유일한 구절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로 인해 많은 주석가들은 당황했다. 그래서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이 구절을 그렇게 해석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이 구절을 번역하면서 여기서 말하는 '사도들 가운데서도 선두권에 있는 자들'이 가리키는 이름은 유나아라는 여자 이름이 아니라 유니아스(Junias)라는 남자 이름이라고 했다. 바로 유니아스라는 남자가 그의 동료 안드로니고와 함께 '사도들 가운데서도 선두권에 있는 자들'이라고 칭송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해석에는 문제가 있다. 유니아스라는 이름이 남자의 이름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유니아스라는 남자 이름에 대한 전례가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유니아라는 이름은 전형적인 여자 이름이다. 여기서 바울은 유니아라는 여자를 일컫는 것이 틀림없다. 아직까지도 일부 성서에는 이 이름이 남자의 것인 양 유니아스로 번역되어 있다. 독자들이 보고 있는 성경에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확인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리라. 일부 필사자들은 잘 알려지지도 않은 여인에게 사도라는 칭호를 부여하기가 거북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필사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본문을 살짝 바꾸기도 했다. 그래서 어떤 사본을 보면 "나의 친척이며 한때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사도들 가운데서도 선두권에 있는 자들입니다"를 "나의 친척인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여 주십시오. 또한 한때 나와 함께 갇혔던 자들에게도 문안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사도들 가운데서도 선두권에 있는 자들입니다"로 변경시켰다. 이렇게 본문을 변경시킴으로써 여성에게 사도의 권위를 부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도행전을 베끼던 필사자들도 이와 비슷하게 본문을 변경시켰다.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바울과 그의 동역자 실라는 데살로니가에 이르러 유대인들의 회당에 들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했다. 4절의 보도에 의하면 이 두 사람은 거기에서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켰다. "그들 가운데 몇몇 사람이 승복하여 바울과 실라를 따르고 또 많은 경건한 그리스 사람들과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그렇게 하였다." 그런데 몇몇 필사자들은 여기에 등장하는 여인들을 귀부인, 즉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라고 묘사하는 것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여인들을 신분이 높은 개종자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저 높은 사람들 정도로만 묘사해도 너무 높이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본에는 본문이 다음과 같이 변경되었다. "그들 가운데 몇몇 사람이 승복하여 바울과 실라를 따르고 또 많은 경건한 그리스 사람들과 적지 않은 높은 사람들의 부인들이 그렇게 하였다." 이 변경된 본문대로라면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개종한 부인들이 아니라 그들의 남편들이 된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울의 동역자 부부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이 두 부부의 이름을 언급할 때 부인의 이름을 먼저 부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마치 아내인 브리스길라가 바울과의 관계에서나 선교 사역에서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사도행전뿐만 아니라 로마서 16장 3절에서도 아내의 이름인 브리스가가 먼저 나온다. 사도행전의 브리스길라와 로마서의 브리스가는 같은 사람을 가리킨다. 몇몇 필사자들이 이름의 순서를 바꾼 것은 이제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마땅히 남편의 이름이 먼저 나오는 것이다. 이들 필사자들에게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니라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순서였던 셈이다.

요컨대 초기 교회에는 여성의 역할과 관련된 논쟁이 있었다. 이러한 논쟁은 간혹 신약성서의 전승 과정에서 본문에 유입되었다. 즉 성서의 본문이 교회에서의 여성의 역할에 대한 자신의 생각에 더 가까워지도록 필사자들이 본문을 변경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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