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자, 행동하는 양심, 자원봉사자의 귀감 등으로 별칭 되는 한완상 대한적십자사 전(前) 총재. 그가 지난 2008년 자신의 설교들을 한데 모아 내놓은 <예수 없는 예수교회>에는 한국교회가 회복해야 할 '역사적 예수(실물 예수)'의 체취와 숨결과 비전이 들어 있습니다. 제가 아끼는 도서 목록 1호로 분류해 놓고 반복해서 읽는 이유이지요. 오늘도 실물 예수님이 몹시 생각나서 책꽂이에서 꺼내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본문을 읽느라 미처 읽지 못한 긴 편지 '참회하는 마음으로 쓴 수난절 편지' 한 장을 발견했습니다. 부활주일을 앞두고 여러 모로 분주할, 한국교회, 특히 대형 교회 담임목사들이 조용한 시간을 내어 꼭 일독했으면 좋겠다 싶어 이렇게 소개해 봅니다. -필자 주


사랑과 평화의 예수님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절기를 앞두고, 1세기 닫힌 유대 사회에서 역사적 인물로서 당신이 친히 겪으셨던 외로움과 괴로움, 억울하고 부당했던 고통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과연 저 같은 인간이 거의 2,000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주님의 그 아픔에 역지사지할 수 있는지 자문하며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주님보다 거의 두 배나 긴 시간을 살았지만, 부끄럽고 후회스러운 삶이었기에 주님의 발자취를 거울삼아 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싶습니다.

비록 2,000년 전에 주님이 겪으셨던 고통이었으나, 지금 저는 제 자신이 그때의 가해자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만일 제가 1세기 유대에 살았다면 주님을 율법주의 잣대로 비판하고 심판하려 했던 당시의 지식인과 종교 지도자의 반열에 섰을 가능성이 크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주님에게 손가락질과 삿대질을 해 대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서 제 모습을 보는 듯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역사적 알리바이는 뚜렷하더라도 저는 주님의 억울한 수난에 무관하다 말하기 어렵다고 느낍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뒤 초대교회는 로마의 잔혹한 학정 밑에서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실존적 체험과 그 체험에서 나온 새 희망과 믿음을 꿋꿋이 지켜 냈습니다.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기에, 저는 오늘도 예수따르미답게 제대로 못 사는 자신을 나무라며 부활의 주님을 바라봅니다. 예수님처럼 살기에는 21세기 제 삶이 너무 풍요롭고 너무 안정되어 도무지 주님처럼 자기 비움을 이룰 수 없음도 솔직히 고백합니다.

그런데 초대교회가 세속적 인정을 받아 힘과 부를 취하게 되자, 예수 운동은 점차 약해지고 역사적 예수의 놀라운 말씀과 행적은 교리의 높은 담벼락에 가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케리그마는 교리로 포장되었고, 주님의 감동적인 역사적 삶은 희미해진 듯합니다. 특히 초대교회가 역사적 예수를 기독교화하는 과정에서 주님이 실제로 겪었던 그 역사적 아픔은 신학적으로 추상화되고 만 듯합니다.

그뿐입니까? 주님의 수난, 죽음, 부활에 대한 교리적 담론이 변증론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게 되면서 점점 교회는 독선과 교만과 비관용의 제도로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힘 있는 중심 제도로 뿌리내린 교회는 주님의 이름으로 끔찍스러운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라는 제도와 교회라는 공적 기관이 교리로 고착된 하나의 그리스도상(像)에 어긋나는 모든 예수 담론을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신화의 옷을 입은 교리의 그리스도는 갈릴리 예수로부터 아주 떨어져 나가고 말았습니다. 주님의 몸이라고 주장해 온 교회가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을 심각하게 분열시키고 괴롭혔다는 역설을 알기에 저는 단순히 기독교 신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그것을 너무나 부끄럽게 생각하기에 이렇게 주님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갈릴리의 예수님, 사랑하고 존경하는 역사의 예수님

따지고 보면 주님의 말씀 하나하나, 주님의 행적 하나하나가 주님을 위험한 인물로 낙인찍었던 당시 종교 지도층으로 하여금 주님에게 의심과 차별, 억압과 비난을 쏟아붓게 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삶의 방식 자체가 기득권층에게는 위험하고 혐오스러운 떠돌이 삶으로 인식되었지요. 주님은 자기 주소로 된 집 한 채 제대로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주님은 길바닥의 존재로 사셨습니다. 하늘을 이불 삼고 땅바닥을 요로 삼아 살았습니다. 정말 처절하게 외로운 떠돌이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탄식하셨겠지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 9:58)"고 말이지요. 주님의 삶은 여우와 새보다 더 외로운 떠돌이 삶이었습니다. 주님의 삶에 견주어 우리의 삶은 너무나 여유로워 도무지 주님의 그 고독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주님은 고향 사람들에게도 배척을 받았습니다. 이른바 지역감정을 철저히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고향 나사렛에 있는 회당에서 첫 메시지(취임사)를 선포하신 뒤, 하필이면 반유대적인 발언을 하시어 유대 선민의식과 자존심을 심각하게 훼손시켰습니다. 하마터면 동네 사람들에게 떠밀려 낭떠러지에 추락사당할 뻔하지 않았습니까? 지역감정을 들먹여 정치적 자리 하나 얻으려는 우리네 추한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주님의 고결한 자세를 새삼 우러러 보게 됩니다. 고향 사람에게 왕따당하셨던 주님의 아픔을 지연과 혈연을 소중히 여기는 한국 크리스천들이 제대로 이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 부끄럽습니다.

게다가 주님을 따른다는 제자들, 대체로 무식했던 열두 제자들의 한심한 정신 자세는 어땠습니까? 그들이 주님을 따르기로 결단했을 때부터 그 동기는 퍽 세속적이었던 듯합니다. 예수님이 집권하여 왕이 되면 한자리라도 얻어 걸칠 것을 계산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또 그들은 도무지 주님의 말씀의 깊이를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쉬운 비유의 말씀도 알아듣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짧은 경구의 뜻도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뿐입니까! 주님을 따르는 열둘 중에는 주님을 반대 세력에 팔아넘긴 가롯 유다가 있는가 하면, 목숨을 내놓고 끝까지 따르겠다고 핏대를 올리며 충성 맹세를 했다가 종내 비겁하기 짝이 없는 짓을 하고 만 베드로가 있지 않았습니까? 저는 최후 만찬에서 가롯 유다를 쳐다보시는 주님의 외로운 눈빛을 가끔 생각합니다. 저 같으면 유다의 뺨이라도 시원하게 갈겨주면서 '이놈, 정신 차려!' 하고 야단쳤을 텐데, 주님은 유다의 흑심을 꿰뚫어 보면서도 사랑과 연민이 교차하는 눈빛으로 그를 그윽하게 쳐다보시면서 오히려 한없이 안타까워하셨겠지요.

가롯 유다는 로마제국을 꺾고 민족국가를 세우려 했던 열혈 민족주의자들의 결사체 요원이었기에 예수님의 로마 대응 방식에 실망했을 테지요. 그가 과격한 민족 투쟁 의지 때문에 주님을 배신했다면, 저 역시 그같은 상황에서 제2의 가롯 유다가 절대로 안 될 것이라 장담할 수 있을까요? 주님은 가롯 유다의 뜨거운 민족애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기에 그를 더욱 연민의 눈빛으로 바라보신 것이 아닌지요? 게다가 그 배반 행위로 그가 겪을 엄청난 정신적, 역사적 저주와 고통을 미리 아시고, 그것을 더욱 안쓰러워하셨던 게 아닌가요? 주님의 마음을 이제는 얼마간 이해할 듯합니다.

너무나 인간적이기에 인격적인 예수님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이 겪었을 그 외로움과 괴로움을 이 수난절에 새삼 되새겨 봅니다. 주님의 입장에 서 보고 싶습니다. 사실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 아니 하나님과 같은 전지전능하신 분으로만 믿는다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의 모습은 조금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감동적인 사건도 될 수 없겠지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죽음을 초월하시는 분인데, 무엇 때문에 수난을 앞두고서 불안해하거나 떨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로만 주님을 우러러 본다면, 겟세마네는 견디기 어려운 고뇌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인간적 외로움과 괴로움을 설명해 주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예수 잘 믿는' 신자가 되어 주님을 일방적으로 신격화하여 주님의 외로움과 괴로움을 신학적으로 추상화시킨 잘못이 부끄럽습니다. 주님은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솔직히 표현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따로 떨어져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는 너무나 처절했습니다. 얼굴에서 피와 땀이 흘러내릴 만큼 결사적이었습니다. 주님의 그 모습, 우리처럼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똑똑히 보게 됩니다. 또 봐야 합니다. 나아가 그 아픔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문득 1978년 2월 말 유신 체제 하에서 함석헌 선생이 동지들과 함께 작성한 3․1절 성명을 읽다가 연행된 사건이 떠오릅니다. 함 선생께서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저는 이제 내 차례구나 여기며, 그날 밤 한순간도 자지 못해 불안에 떨다가 주일 아침 일찍 교회에 가서 홀로 기도했습니다. 체포되기 직전의 순간으로 생각했기에 겟세마네 동산의 주님과 어느 정도 역지사지(易地思之)할 수 있었습니다. 피와 땀을 흘리지는 못했지만, 잔뜩 겁을 먹고 불안해 견딜 수가 없었기에 주님께 힘과 용기를 달라고 매달렸습니다. 물론 주님의 그 괴로움과는 견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때의 작은 사건으로 저는 겟세마네에서 주님이 보여 주신 실존적 몸부림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아픔은 단지 로마 당국에 체포되어 십자가형에 처해지리라는 예감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 중에서도 쓸 만하다고 여긴 핵심적인 세 사람,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가신 것은 주님의 아픔을 그들과 함께 나눠 갖기를 원하셨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 선택된 세 제자는 스승의 아픔을 외면하는 데도 역시 출중했습니다. 스승은 피땀 흘려 하나님께 매달리고 있는데, 그들은 잠을 이기지 못해 연신 고개를 떨구고 있었습니다. 긴장이 되었다면, 인간적 고뇌가 깊었다면, 스승의 아픔을 체휼했다면, 어찌 그렇게 잠이 쏟아졌겠습니까? 정말 한심한 제자들 아닙니까? 이런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신 주님도 정말 딱하다고 생각됩니다.

문제는 주님의 기도에 있습니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 지난 세월 크리스천과 제도 교회와 기독교는 그리스도에 관한 신조만 주목하고 강조했습니다. 주님의 경건한 종교적 믿음만을 강조하면서, 역시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라며 주님을 우러러 왔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실존적 고뇌와 진솔한 인간적 고백을 외면해 왔습니다.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또 이해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아픔은 바로 우리의 아픔과 같은 것으로 이 표현에 농축되어 있지 않습니까? 우리 보통 사람들의 아픔과 같기에 주님의 솔직한 이 기도가 더욱 뜨겁게 연약한 우리 인간의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린아이가 위험에 직면하여 아빠, 엄마를 찾는 심정으로 아바(Abba) 하나님을 외치신 주님의 너무나 인간적인 호소에 주님을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

주님은 십자가의 엄청난 고통, 육체적․정신적․종교적․사회적 저주와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습니까? 주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웃으며 죽음의 잔을 들어 마시는 거룩하고 간 큰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우리처럼 죽음의 위협 앞에 극도로 초조해하며 불안해하는 그런 인간적인 분이었습니다. 그 고통은 너무나 진솔한 인간의 아픔이요, 인간적인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두려움이 컸으면 땀과 피가 비 오듯 얼굴을 적셨겠습니까?

우리가 주님의 아픔을 연기자의 거짓 아픔처럼, 절대 전능하신 분의 하찮은 감정처럼 간단히 처리해 왔음을 고백합니다. 적어도 수난절에나마 역사적 예수가 온몸으로 가슴 저리게 느꼈던 죽음의 공포와 불안을 우리의 것으로 체휼(體恤)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했음이 부끄럽습니다. 특히 주님의 실존적 아픔을 기독교 교리 입장에서 왜소화하고 탈각시켜 버린 잘못을 회개합니다.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외치셨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의 절규를 신학화하여 인간적 아픔의 극치를 둔화시킨 저희들의 안일한 신앙 행태를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이미 구약에서 예정된 계획에 따라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기계적으로 연기한 것처럼 받아들임으로써, 주님의 아픔을 신앙의 이름으로 너무나 가볍게 다루었습니다. 사실 예수의 절규를 연약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부르짖게 되는 원망과 절망의 외침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를 우리와 같은 분, 비겁한 우리들의 참된 벗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도 보통 사람의 아들처럼 애절한 절규를 내뱉을 수 있음을 보여 줌으로써, 보통 사람들에게 더 큰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랑과 평화의 그리스도 예수님

이제 저는 역사적 예수를 교리의 옷을 입혀 박제해 버린 우리 기독교 신자들의 잘못을 회개하고자 합니다. 역사적 예수는 유대 율법주의자들과 로마제국에 의해 고난당하셨을 뿐 아니라, 신앙의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제국의 국교로 변질된 기독교에 의해서도 심각하게 괴롭힘을 당하셨습니다. 교회가 길고 긴 시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저지른 반인륜 범죄를 어떻게 일일이 열거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행된 끔찍한 범죄가 생겨날 때마다, 주님의 아픔은 2,000년 전 골고다의 십자가 위에서 겪으신 아픔보다 더 컸을 것입니다. 정말 그리스도 예수께 어떻게 사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타계한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가톨릭교회의 엄청난 잘못에 대해 개괄적으로 회개한 적이 있습니다. 비록 추상적이고 개괄적인 참회라며 일부 유대인이나 타 종교인들이 비판했지만, 그간 교황의 무오설을 믿어 왔던 가톨릭교회가 교황의 입을 통해 그같은 회개를 토해 내는 모습에 저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간 기독교(넓은 뜻에서 신․구교 모두)는 진리와 교리의 이름으로 타 종교에게 박해를 가했고, 선교의 이름으로 토착민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했으며, 기독교의 틀 안에서도 이른바 정통 교리에 위배되는 신앙 행위를 가혹하게 처단했으며, 종교재판을 통해 많은 신자들을 박해했고, 마녀사냥으로 특정 여성의 신앙 행위를 무자비하게 고문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죄악을 더 구체적으로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히틀러와 스탈린이 수백만 명을 숙청하고 살육하는 동안 그 끔찍한 범죄를 구경만 했던 경건한 기독교인과 교회도 그 무관심에 대해 뼈아픈 회개를 해야 합니다. 바로 그같은 교회의 비관용과 무관심, 노골적인 고문 행위야말로 바로 역사의 예수와 부활의 그리스도를 모두 따돌리고 고문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역설적이게도 크리스천들은 제도 교회의 교리적 틀 안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당하게 그리스도 예수를 괴롭혀 온 셈입니다. 왜 이런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을까요?

예수의 처형을 목격하면서 비겁하게 달아났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뒤, 담대한 죽음의 증인으로 변화된 것은 분명히 기독교를 탄생시킨 놀라운 은총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가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케리그마 복음이 역사적 예수의 감동적인 삶(말씀과 행위)에 무관심하거나 그것을 무시하면서 문제는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부활 이후의 예수를 그리스도로 격상시키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은 희미해지거나 실종되고, 그리스도 담론만이 단단한 교리의 옷을 입은 변증적 신학 체계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교리는 차별과 비관용의 기준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리스도 담론, 즉 기독론은 이단을 경계하면서도 역설적으로 그것을 양산했고, 교회와 교인을 끊임없이 분열시켰으며, 그 분열에 따라 이른바 힘을 지닌 주류는 비주류를 줄기차게 차별하고 박멸하려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종교재판, 마녀사냥, 십자군 전쟁의 참화와 죄악이 나타났고, 마침내 해외 선교의 이름 아래 기독교 제국주의 정책이 토착민을 참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모든 것이 신성한 이름, 곧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저질러지고 정당화되었습니다. 너무나 끔찍한 고통을 주님에게 덮어씌우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참으로 한심한 것은 아직도 기독교와 교인들이 이 잘못을 제대로 깨닫지도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국교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빨리 성장했다는 한국 개신교회는 부끄럽게도 교회 분열을 통해 가속적으로 성장해 왔습니다. 마땅히 하나가 되어야 할 예수님의 몸은 교파 교리와 교파 내 복잡한 이해관계로 여러 갈래로 찢기고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예수파와 그리스도파가 싸우기도 했습니다. 예수교 장로교단과 기독교 장로교단의 싸움, 예수교 성결교단과 기독교 성결교단의 싸움이 그러합니다. 장로교단도 한국에서만 100개 이상으로 분열되었습니다. 이런 교파주의는 당신의 몸에 무수한 분열의 창칼을 들이대는 것과 같습니다. 얼마나 아프셨습니까? 주님, 저희를 용서하소서. 이제 부활절을 앞두고 주님의 고난이 지닌 참뜻을 깊이 깨닫고, 우리가 주님을 더욱 아프게 한 장본인임을 고백하게 하소서.

갈릴리 예수님, 생명과 부활의 그리스도여!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따르고자 합니다. 예수따르미가 되고자 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담백한 삶, 비움의 삶, 체휼의 삶을 닮기에는 21세기 자본주의 정보화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가 너무나 부유하고, 너무나 복잡하고, 너무나 탐욕스러움을 고백합니다. 그래도 갈릴리 예수를 닮는 길만이 인류가 구원받는 진리의 길임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그 길에 당당히 나서도록 우리에게 소망과 비전, 용기와 능력을 허락하소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그 힘과 비전을 내려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역사적 예수를 따르는 데는 부활의 그리스도 능력이 절대로 필요함을 고백합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영을 허락하소서.

우리 자신이야말로 21세기의 바리새인, 서기관, 대제사장, 로마 당국과 같은 존재임을 참회하게 하소서. 1세기 유대 땅에서 역사적 예수를 괴롭혔던 이들처럼, 21세기 정보화 세계에서도 크리스천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님을 괴롭히고 있음을 회개하게 하소서. 이 잘못을 용서해 주시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지금 여기서 예수의 삶을 살 수 있게 하소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리면서까지 죽음의 고통을 피하고자 몸부림치셨던 주님의 모습에서 우리 연약한 인간들이 새삼 용기를 얻고, 주님의 그 아픔을 오늘 여기서 체휼하게 하소서. 오늘 이곳이 겟세마네 동산이 되어 "이 잔을 피하게 해 주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하나님 뜻이 이뤄지게 하소서"라고 하나님께 피땀으로 외치셨던 인간 예수를 뜨겁게 만나는 은총의 자리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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