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이번 호에서는 '청교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윌리엄 퍼킨스가 쓴 <설교의 기술과 목사의 소명>이라는 책의 일부를 취하여, 오류를 살펴보고 이를 기반으로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에 적용할 부분을 나누고자 한다.

이 책은 '부흥과 개혁사'에서 채천석 목사의 번역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은 퍼킨스가 각각의 책으로 펴낸 것을 합본으로 번역 출간한 것이다. 여기에서 '목사의 소명' 부분에 있어서 특별히 '목사의 죄 용서 선언의 권한'에 대한 부분을 비평하고자 한다. 따라서 여기에서의 '이 책'은 '목사의 소명' 부분에 국한된 용어로 사용될 것이다. 여기의 비평은 해당 부분의 원문 번역이 타당하게 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번역본의 내용에 대한 것이다.

개요

이 책은 목사의 소명에 대하여 특별히 그 직분의 엄숙함을 설교 사역에 초점을 두어 소개한 것이다. 목사로서 사역 중인 분이나 목사로서의 소명을 기대하는 분들에게 일독의 가치가 있다. 그의 모든 타당한 서술에도 불구하고 목사의 위임에 있어서의 죄 사함의 선포(의의 선포 혹은 구원의 적용)에 있어서는 일반적인 개혁 신앙의 해석을 초과하는 대목이 여러 군데 발견된다. 이것은 목사의 설교의 중요성이라는 큰 요지 안에서 흡수될 수도 있겠지만 독자에 따라서 오해의 여지가 분명히 존재하고 또한 잘못 해석되어진 측면이 있다고 보여진다. 이에 아래에서 그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나단과 다윗의 경우

이 장면은 143페이지 하단에서 144페이지 중반에 걸쳐 소개되어진 내용이다. 요지는 목사는 '인간에게 의를 선포하는 특수한 직무'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무엘하 12장에 나오는 나단과 다윗의 대화에서 나단이 다윗에게 죄 사함을 알려 준 것은 특별한 경우로 다룰 필요가 있다. 나단과 다윗의 이야기 전체에서 볼 때, 나단은 다윗을 다루시기 위한 일련의 지침을 하나님께로부터 총체적으로 받고서 다윗에게 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다윗이 분명한 죄 고백을 했을 때 즉각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셨음을 말할 수 있었고 또한 다음에 이어질 징계에 대해서도 곧장 말할 수 있었다. 이 이야기 안에는 하나님께서 나단에게 다윗이 죄 고백을 할 경우 죄가 사해졌다는 것을 알려 주도록 지침을 하달했고 이어서 다윗은 살겠지만 그의 아들은 징계받을 것을 말하도록 미리 나단에게 알려 주셨다는 것이 확연하게 보여진다.

따라서 이것을 일반화시켜서 목사가 죄 고백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당사자의 죄를 사했다고 말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선을 넘는 것으로 봄이 합당할 듯하다. 아무도 하나님으로부터 특정한 사람이 죄를 고백할 때, 즉시 죄가 사해졌다고 직접 말하도록 지침을 받지는 않았다는 것이 개혁 신앙의 견지에서 이해되어진다. 죄 사함의 선포에 대한 직무는 복음의 설교 안에서 수행되어지는 것이다. 즉, 죄를 드러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을 말하고 은혜로 죄를 깨닫고 회개할 때 죄 사함을 얻는다는 약속을 선포하는 직무를, 목사는 설교라는 수단을 통해 행하도록 위임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목사를 포함하여 어느 누구도 특정한 사람에게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포할 수 있는 위임을 받지는 않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한 성령님의 역사로서만 죄 사함이 가능하고 하나님만이 죄 사함의 여부를 결정하시는, 확고한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죄 사함의 선포를 위임받았다고 할 때는 언제든지 복음 설교를 통한 공적 선포이지 각 개인에게 죄 사함을 직접 말해 줄 수 있는 권리를 위임받은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분명한 오해이다. 이 점에서 퍼킨스의 사무엘하 12장의 인용은 분명 오해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묶고 푸는 것에 대하여

이것은 150~151페이지에 소개되어진 부분이다. 여기에서 퍼킨스는 마태복음 16장 19절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와 요한복음 20장 23절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를 인용하고 있는데, 이어지는 그의 해설은 여전히 오해의 여지를 남긴다.

퍼킨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도 목사와 마찬가지로 묶기도 하고 풀기도 하시며, 목사와 마찬가지로 죄를 사하기도 하시고 그대로 두고 보기도 하신다. 목사들의 말을 응하게 하고, 그들의 경고를 이루심으로써 말이다."

이 구절은 해석이 올바로 된 것이라면, 최소한 두 가지 비성경적 냄새를 풍긴다. 첫째는 마치 목사가 하나님과 같은 죄 사함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하고, 둘째는 만일 그것이 아니라면, 목사가 죄 사함을 얘기하면 하나님이 자동적으로 승인해 주신다는 뉘앙스를 다분히 주고 있다.

이어지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를 들어 참된 목사는 죄로 강퍅해지고 하나님의 뜻을 여전히 대항하고 있는 죄인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목사는 그의 불의와 죄를 선언하고, 받아야 할 하나님의 정죄를 경고한다. 여기 이 땅에서 목사는 죄인의 죄들을 묶고 가둔다. 그러면 저 하늘에서 이 죄인의 죄는 묶이고 갇히게 된다. 한편으로 참된 목사는 회개하고 믿는 사람들을 보고 그에게 죄 사함과 참된 행복을 확증한다. 따라서 목사는 그 사람이 이제 의롭게 되었다고 말함으로써 죄의 속박에서 풀어 준다. 이 사람의 죄는 마찬가지로 하늘에서 풀어지고 면제된다. 목사가 세상에서 이 일을 행할 때 하나님은 하늘에서 그 사람을 자유하다고 선언하신다."

여기에서도 퍼킨스는 목사가 '죄 사함을 확증하고 의롭게 되었음'을 말할 수 있다고 얘기함으로써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목사는 죄 사함과 의롭게 되는 복음을 설교할 수 있을 뿐이지, 죄 사함과 칭의를 각 개인에게 확증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이것이 하나님의 고유한 역사임을 잊어버리도록 유도하는 결과를 낳는다. 퍼킨스의 요지는 목사의 복음 설교의 중대성과 그 효력을 해설하고자 한 것이지만, 그는 일부에서 목사의 위임을 지나치게 표현함으로써 하나님의 고유 영역을 목사가 하나님과 나누어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는 여지를 많이 남기고 있다. 이는 마치 목사가 인정하면, 하나님께서 생명책에 받아 적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퍼킨스가 인용한 마태복음 16장 19절과 요한복음 20장 23절은 명민한 신학자들에 의하여, '복음 설교의 엄숙한 위임'으로 이해되어지고 있다. 성경 전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죄 사함을 확증할 수 있는 신적 권위를 부여하셨다고 말하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목사에게 위임된 죄 사함과 의의 선포는 곧 복음 설교를 말하는 것으로서 공적 및 외적 선포이지, 각 개인에게 직접 적용되어지는 신적 및 내적 선포가 아님을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이는 하나님 한 분만의 양도할 수 없는 일이다). 퍼킨스는 여기에서 목사들이 마치 신적 및 내적 선포를 할 수 있는 것으로 해설함으로써 혼란을 빚어내고 있다.

도구로서의 목사에 대하여

이 책 155~156 페이지에도 비슷한 혼란이 있다. 여기에서 퍼킨스는 화목(구속)의 수단은 그리스도이며 목사는 도구라고 밝히면서, 목사는 화목의 수단을 적용하고 그 다음에 이 수단들을 사용하여 참회하는 개인에게 안전하게 구원받았다고 선언할 수 있다고 해설한다. 즉, 목사가 개인에게 그리스도를 적용하기도 하고 구원받았다고 선포까지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는 단연코 성경과 부합하지 않는 잘못된 견해이다. 이어서 퍼킨스는 다음과 같이 쓴다.

"이것은 목회 사역으로 부름받은 모든 사람의 가장 커다란 영예다. 사실상 그것은 사람이나 천사에게 주어진 가장 큰 특권이다. 그것은 분명 지옥 권세에서부터 사람들을 구원하고, 그들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하늘의 상속자를 만드는 위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상 천사는 이 위임을 갖지 못했다.…(중략)…오직 목사만이 이 위임을 받는다."

여기에서 퍼킨스는 분명하게 목사의 위임이 하나님만의 고유한 사역을 직접 수행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사람들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하늘의 상속자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이며 분명 구원은 하나님께만 속하는 것이며 생명책에 이름을 쓰는 것도 하나님의 고유 권한이다. 하나님은 결코 이 신적인 권한을 목사에게 위임한 적이 없다. 분명 목사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구원 사역에 말씀을 전하는 일을 위임받은 것뿐이다. 즉 하나님은 설교라는 도구를 사용하셔서 사람들을 구원하시고자 한 것이다. 목사는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시는 구원 사역에 복음을 설교하는 일로써 참여하게 된 권한을 위임받은 것이지 사람을 구원시키고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 수 있게 하시지는 않았다. 이 부분에서 퍼킨스는 분명히 성경보다 더 나갔다.

소결론과 제안

전체적으로 '목사의 소명'에 대해 훌륭하게 기술하고 있음에도 퍼킨스는 일부분에서 목사의 소명을 지나치게 표현함으로써 즉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직접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은 것으로 기술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오해를 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였다. 이것은 분명 개혁 신학적 견지에서 인정하기 힘든 것이며 성경적으로도 맞지 않는다. 따라서 위에 제시한 부분들의 번역이 과연 적절하게 된 것이라면 이 부분의 오류에 대한 원인은 윌리엄 퍼킨스에게 있다고 보여진다. 결과적으로 본인은 이 책의 해당 부분의 번역이 합당한지에 대한 검토와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들에 대한 합당한 성경적 견해를 각주를 통해 밝힘으로써 독자들이 목사의 권한에 대해 오해하지 않도록 할 것을 해당 출판사에 권하는 바이다.

칼뱅의 가르침

여기에서 우리는 칼뱅이 퍼킨스가 지나치게 이해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 보다 더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우리는 성경이 보여 주는 목사의 권한은 전적으로 말씀의 교역 안에 포함되어 있으며 이 말씀의 교역에 국한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말씀의 봉사자로 만드셨기 때문에 사실 권세는 그들 자신에게가 아니라 저 말씀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런 근거에서 목사들은 말씀을 나누어 주는 자들로 세우심을 받았으므로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감행해야 할 것이다. 목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위엄을 높이고 이에 순종하며 이에 자리를 내어 주도록 이 세상의 모든 권세, 영광 및 교만을 억제해야 할 것이다. 목사들은 가장 작은 일에서 가장 큰일에 이르기까지 말씀으로 명령해야 하며, 그리스도의 집을 세워야 할 것이다. 목사들은 양 무리를 먹여야 하며 이리들을 죽여야 하고 말씀을 수용할 준비가 된 사람들을 가르치며 권고해야 할 것이다. 목사들은 반항자들을 질책하며 권고하며 죄인임을 알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우리는 말씀에 의존해서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목사들이 말씀을 떠나서 자신들의 허망한 꿈이나 날조된 생각들로 돌아설 때 그들은 이미 목사들로 받아들여질 수가 없다. 이 경우 그들은 사악한 늑대로 보여 결국 축출당하고 말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에게만 귀를 기울이라고 명령하신다(<칼뱅의 신앙교육서>, 이형기 역, 크리스천다이제스트, 75~76 쪽)."

"다른 사람들이 교회에 속하였는지 아닌지를 명확하게 판단하는 것과 선택된 자들을 유기된 자들로부터 분별하는 것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증언하는 바대로 누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인지 아는 것은 오직 고유한 그분의 대권이기 때문이다(딤후 2:19).…(중략)…왜냐하면 극도로 파멸한 듯이 보였으며 명백히 절망에 빠진 사람들도 그분의 인자의 길로 다시 부름을 받으며 남은 자들 앞에 서 있듯이 보였던 사람들도 종종 무너지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의 눈만이 누가 끝까지 견인될 것인지 본다. 왜냐하면 오직 그분만이 구원의 머리이시기 때문이다(히 2:10).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종들의 말들로 땅에서 풀고 맨 것은 하늘에서 풀리고 매인다고 보증하신 것으로부터(마 16:19) 누가 교회에 속하였으며 누가 교회로부터 외인들이 되는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다는 사실이 파생되지는 않는다. 이 약속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풀린 자들과 매인 자들을 공공연하게 지적하고 눈앞에 어떤 외부적인 지표를 주시고자 원하시지 않으셨으며 단지 그리스도께서 땅에 주어지심으로써 복음과 자유가 되셨다는 복음적인 약속을 주시기를 원하셨다(<기독교강요>초판, 문병호 역, 크리스천다이제스트, 2009, 201~202 쪽)."

사라져야 할 영접 기도

"태양은 아침에 동쪽에서 떠서 저녁에 서쪽으로 진다." 이것은 우리가 즐겨 쓰는 표현이지만, 천체 과학적인 입장에서는 어디까지나 진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태양은 항상 떠 있으며 결코 지지 않고 다만 지구가 자전하면서 태양 주위를 돌고 있으므로 지구에 살고 있는 인간의 입장에서 그렇게 보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의 문구는 우리에게는 아주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며 비록 우리는 과학적 진실을 알고 있음에도 위와 같은 허위적 표현을 합당하게 받아들인다. 이러한 자연현상을 표현하는 일에는 과학적 진실이 아닌 편의적 표현을 사용하는 것에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으며 느낄 필요도 없지만, 이런 현상이 복음을 말하는 것에 대해서라면 상황은 매우 심각한 것이 되고 만다.

이 예를 드는 것은 바로 우리 인간이 본성적으로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임을 드러내고자 함이다. 누군가 얘기했듯이 타락한 인간은 본성적으로 펠라기우스적이며 성령님을 거역한다. 즉, 인간에게는 무언가 선한 의지가 남아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무한히 높이고 그 안에서 자신의 참혹함을 인식하기보다는,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의를 높이는 것이 인간에게는 보다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본성은 비록 중생한 이후에도 금방 시들지는 않는다.

이러한 인간 중심적 사고 체계는 성경의 진리를 얕게 보거나 오해하거나 하나님의 장엄하심에 매일 압도되어지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서 '소위 부흥'이라는 감정주의적 운동과 인간의 의지의 선택에 의한 믿음이라는 인간 중심적 믿음을 양산해 왔으며 또한 '소위 전도자'들은 영접 기도를 통과한 사람에게 목사마저도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선포'까지 해 왔다. 이런 방법이 마치 올바른 것인 것처럼 크게 유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러한 것이야말로 우리 인간에게 편리하고 안전하며 효과적이고 간편하며 온화하고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방법이라는 인간 중심적 절대적 확신에 강하게 붙들려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태양이 동에서 떠서 서로 진다'는 표현처럼 허위임에도 진실인 양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방법을 고수할 때, 영접 기도 단계 이전의 해설이 얼마나 견실했는지에 관계없이 위선적인 믿음으로 사람들을 인도할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밖에 없다. 사단은 교회사적으로 항상 이것을 다양한 방법으로 즐겨 사용해 왔으며 지금까지도 그러하다. 두말할 것 없이 사단의 주요한 목적은 성령님을 전도와 설교에서 축출시켜 버리는 것이다(그러나 성령님은 이런 오류들 속에 갇히지도 않으시며 사단에 의해 축출되지도 않으시므로 모든 오류들 가운데서도 여전히 주권적으로 역사하신다). 결과적으로 아주 소수의 개혁주의 신학자들과 개혁주의 목회자들과 진리의 참맛에 압도된 사람들만이 이 시대의 코페르니쿠스로 남아 있을 뿐이다.

19세기 미국의 부흥 시기 가운데 '부흥주의'를 보았던 제임스 알렉산더 목사는 뉴욕의 회중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는데 그 현상은 2011년 현재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상황과 흡사하다고 하겠다.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어두움 속에 사라져 버렸고 중생에 대한 새롭고 위험한 견해는 일상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던 습관은 점점 사라져 버렸고 신앙은 인간이 고안하고 만든 인본주의 신앙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심지어 부흥에 대해 우리가 보였던 전통적인 경외심은 적들로 인해 고통을 당했고 그로 인해 부흥의 모양은 있으나 부흥의 능력은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우리는 참된 부흥의 영광을 탕진했고 심지어 타락한 본성을 바꾸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까지도 제거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현재 특정한 외적 수단과 방법을 지대하게 강조하고 있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부흥과 부흥주의>, 이안 머리, 부흥과 개혁사, 511~512 쪽)."

글을 맺으며

북한 선교와 통일과 기도 운동이라는 이슈들에 사로잡혀 가는 만큼, 아니 그 이상 우리는 하나님의 장엄하심에 몰입하고 압도되어 있는가? 성령님께서 배제당하시는 인위적인 '부흥주의'의 현실을 우리는 직시하고 있는가? 오늘날 가시적 교회 안에서 진정 중생을 경험한 사람들은 매우 소수이며, 말씀을 맡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그러하다는 현실 고백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는가? 중생이 어떤 것임을 당신은 알고 있는가? 진정 중생하였는가? 중생한 경우라면, 중생한 신자로서 북한 선교에 대한 우리의 실제적 임무는 무엇인가? 우리가 지난 호에서 살펴본 것처럼 북한 선교와 통일 운동은 복음 운동이며, 그것은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도록 우리가 그 역사에 참여하는 운동이다. 그것은 우리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며, 아무도 이 운동을 주도할 수 없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도록 우리는 복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전달해야 하는가? 우리는 영접 기도 방법을 버리고 옛 방식을 취할 준비가 또 그렇게 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기회가 된다면 다음 호에서 이 부분을 다루어 보고자 한다.

관련 글 : 사영리 수정 1 및 2, 한국교회의 지금 그리고 부흥을 위한 개혁 1 ~ 8 (구글 검색)

이 글은 <북한사랑> 2011년 5월호에 투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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