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소중한 우리의 이웃

'일본은 있다, 없다, 일본 침몰'등 그동안 우리 주위에서 수많은 책과 영화들을 흔하게 보았다. 설마를 연상하며 그러한 재앙은 절대로 닥치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오판이 최근에 막을 내렸다. 지난 10일 일본 북동부 지방에서 발생한 대지진은 책도 영화도 아닌, 실제 상황으로 휘몰아치며 막대한 인명 피해와 재산 손실을 발생시켰다. 검푸른 성난 파도가 키를 세우며 전 속력으로 달려와 일본 열도를 단숨에 삼켜 버렸다. 문명의 탑들은 넘실대는 검은 파도의 먹잇감이 되어 순식간에 무너졌다. 부모 형제 자녀, 그리고 내 이웃들이 집채 만한 파도에 휩쓸려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이 엄청난 일본의 재난 앞에서 감히 누가 누구를 탓하며 원망할 수 있겠는가. 과거 동아시아의 피어린 역사의 비극은 묻고, 지금은 내 이웃의 고난과 아픔을 조건 없이 안아야 할 때다. 대한민국은 가장 먼저 구조 인력을 피해 복구 현장으로 보냈다. 정부와 각 종교계, 사회단체, 한류 스타들 그리고 정치권과 정신대 할머님들까지 처참한 내 이웃의 아픔을 함께 보듬자고 나섰다.

과거 우리가 당한 역사적인 치욕과 아픔을 지금 이 상황에서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은 인류애가 아닐 것이다. 하늘 아래 호흡 있는 모든 생명체는 어느 것 하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다. 21세기 지구촌은 서로 손을 잡고 용서와 긍휼함으로 함께 가야 한다. 지난 역사에 주저앉아서 원수를 갚으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지금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마음으로 오직 내 이웃의 아픔을 보듬고 상처를 치유해 주는 것만이 복음이다. 긴 세월 일본을 미워하고 증오했던 나라들도 현 시점에서 일본을 돕고자 모두가 가슴을 열었다. 

특히 종교인은 더 나아가 종교라는 이기적인 조직을 떠나 고난당한 이웃의 곁으로 달려가야 한다. 생명이 죽어 가고 있는데 강대상에서 실언하는 자들은 '원수도 끌어안으라'는 하늘의 소리가 들리지 않은 것인지. 현대판 '카노사의 굴욕'(1077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가 자신을 파문한 그레고리 교황 7세를 맨발로 찾아가 교회의 권력에 세속 권력이 굴복한 대표적인 사건)을 떠오르게 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가 요즘 대통령보다 더 위에, 헌법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자문해 보아야 한다. 이곳저곳에서 실성한 자들의 교만한 소리가 또 다시 사회적 갈등을 일으키고 있으니 말이다.

일본, 영원한 우리의 동반자

지금의 재난도 냉정하게 분석해 보면 어느 한 나라의 죄도 아니요, 어느 한 사람의 죄가 아닌 모든 인류의 죄다. 인간은 엄청난 자연재해(自然災害)앞에서는 무력한 피조물일 수밖에 없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천재지변(天災地變)과의 싸움은 인류 공동체가 함께 극복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자연재해 앞에서 국가와 민족, 과거 역사의 비극, 그리고 서로 다른 종교 분쟁은 더 이상 있을 수 없다. 내 이웃의 재난을 돕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을 돕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한반도가 안전하다 해서 감사하다는 생각도 어리석은 생각이다. 지구촌은 하나의 공동체로 한 배를 타고 가고 있다. 중도에서 먼저 내릴 수도,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함께 더불어 가야만이 공생공존(共生共存)하며 살 수 있다.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지구촌 전 인류는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 공동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재앙은 그동안 창조 질서를 어지럽히고 자연을 파괴한 온 인류의 죄이기에, 어찌 보면 일본은 희생양이다. 인류의 죗값을 대신 치루고 있는 그들 곁으로 오직 긍휼한 마음으로 다가가는 것만이 사랑의 실천이다. '우상을 숭배한 죄, 교만한 죄, 하나님의 경고, 무신론, 물질주의에서 온 죄인'이라 말하는 자들은 망언을 삼가고 이제 그만 거짓의 옷을 벗기 바란다. 참으로 사악한 뱀들은 갈등만을 초래하고 있으니 복음이 부끄러울 뿐이다.

필자도 과거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긍정적인 호감은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미움과 원망은 여전히 가시지 않은 채 항상 앙금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지난날 일본 여행지에서 만난 현지 사람들은 종교를 떠나 사람의 향기가 그윽한 예의 바른 이웃이었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풍겨 나오는 친절은 그동안 품었던 일본에 대한 나의 감정과 선입관을 바꾸어 주었다. 그들의 속 깊은 배려에 감사만 가득 안고 돌아와 일본을 새롭게 다시 만났다.

일본, 우리는 당신들을 사랑합니다

일본은 어릴 때부터 개인보다 집단의 공리적 질서를 앞세우는 교육의 효과로 세계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고 살았다. 그 결과 이 재앙 앞에서도 마음과 뜻을 이룬 공동체가 희망을 향해 가고 있다. 약탈과 사재기는 사라지고 오직 바이오필리아(biophilia·생명애)를 실천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지구촌 모두에게 참다운 질서를 보여 주었다. 감당할 수 없는 자연재해 앞에서 국가와 국민은 하나가 되어 서로를 보듬고 위로하며 지구촌을 감동시켰다.

인명 피해가 가장 막심한 미야기현 미나미산리쿠(南三陸)에서도 진정한 섬김을 보여 준 사건을 접했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다가 순직한 동사무소 여직원의 살신성인(殺身成仁)정신이 눈물겹기만 하다. 끝까지 외치며 마을 주민들을 대피시킨 엔도 미키(25)씨는 마을 위기관리과 직원들과 방재대책청사에 남아 "쓰나미가 오니 빨리 도망치라"는 방송을 되풀이하며 마지막까지 자신의 임무에 최선을 다했다. 다행히 마을 주민들은 급하게 대피해 목숨을 구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자리에서 쓰나미에 휩쓸려 가고 말았다. 지구촌은 그녀의 헌신적인 희생 앞에서 애도하고 있다.

이렇듯 생명을 구제하는 것은 이념도 종교도 아닌 인간의 최상 의무이다. 21세기는 이웃을 향한 생명 사랑만이 인류가 추구할 수 있는 유일한 자원과 자본이기 때문이다. 이웃 사랑과 생명 사랑 안에는 바로 사랑의 실체이신 전능자가 현존해 있다. 전능자는 생명 사랑 안에서만이 살아서 역사하신다. 그래서 모든 종교가 드리고 있는 예배는 바로 사랑의 실천을 나누기 위한 산제사가 되어야 한다. 종교가 어떠한 집단이기에 치우치면 그것은 바로 졸개 집단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지금 만약에 갑자기 '빨리 도망쳐라, 쓰나미가 닥쳐온다'는 급박한 방송이 나온다면, 과연 이 시대 맘몬들은 어디로 도망가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아마도 양들은 모두 우리에 가두어 놓은 채 자신만이 살기 위해 줄행랑치는 모습이 떠오르니 안타깝다. 한반도도 영원한 안전지대는 아니기에 말이다. 지금 당장 무조건 안전하다는 인식에서 벗어나 지진해일 대응 시스템에 사전 대비하는 것만이 타산지석(他山之石)이다.

현재 이 큰 재앙 앞에서 온 인류는 종교, 이념, 정치 이 모든 것들을 떠나 오직 긍휼한 마음으로 다가가야 한다. 대한민국에 근접해 있는 일본은 남의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과 아픔도 남의 일이 아니다. 일본은 바로 우리들의 소중한 이웃이며 친구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웃 나라 일본은 우리와 수 세월 갈등하면서도 함께 가는 영원한 동반자다. 더 이상 원전 피해가 확장되지 않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드린다. 재난 가운데서도 사람의 참모습을 보여 준 소중한 이웃 나라 일본을 향해 이렇게 외쳐 본다.

"힘내세요, 영원한 우리의 친구인 일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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