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위에, 대형 교회 목사

대부분 총은 적을 향해 쏘는 무기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먼저 방아쇠를 당겨야만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전쟁터도 아닌 거룩한 성전에서도 생뚱맞게 총을 맞는 경우가 있다. 지난 2월 27일 4부 예배에서 조용기 목사는 "하나님의 주권에 저항하고 교회와 사역자에게 대적한 국가나 개인은 반드시 망한다"고 표현했다. 필자가 배운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은 협박하고 휘두르는 칼날이 아니라,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사랑과 긍휼을 실천하며 사는 삶이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알고 있다.

아마도 요즘 성경책이 자주 바뀌면서 잘못 인쇄되었나 보다. 필자의 성경 66권을 다 찾아보아도 그런 협박은 없기에 말이다.

최근 이슬람 채권법(조세특례제한법, 수쿠크법안)안을 놓고 뜨거운 공방이 벌어졌다. 개신교는 국회의사당이 아닌 대형 교회 예배당에서도 또 다시 힘과 완력을 보여 주었다. 국가 경제와 정치 마당까지 넘나들며 위세를 떨치고 있으니 중세 시대 종교의 타락을 다시 보는 것 같다. 앞으로 대통령 더 하고 싶고, 국회의원 더 하고 싶은 사람들이 꼼짝 못할 정도니, 항간에 떠도는 '하나님 위에 대형 교회 목사'라는 말이 틀린 말도 아닌 것 같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외치는 자의 자리는 항상 자신부터 먼저 비워야 한다. 거룩한 강대상에서 국가와 성도들을 협박하는 것은 오만의 극치가 될 수 있다. 어찌 한 나라의 국가 경제와 정치적인 문제까지 강대상에서 거론하는 것인지, 설교가 도를 넘다 보니 예배의 경건성은 간 곳 없고 사람의 독선과 독주만이 보일 뿐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의를 위해 핍박받는 자, 애통하는 자의 자리에 앉는 것이라 했다. 또한 예배는 사람의 의가 드러나는 곳이 아닌, 하나님의 의와 사랑이 선포되는 곳이다.

성경 66권을 엑기스로 줄이면 오직 '사랑'만이 남는다. 하나님은 당신의 실체가 사랑이심을 수없이 긍휼함과 죄 사함으로 보여 주셨다. 또한 가죽옷을 입혀 주시며 푸른 초장 쉴 만한 물가로 당신의 자녀들을 인도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이다. 그런데 오늘날 수많은 목회자들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진노의 하나님, 벌만 주시는 무서운 하나님으로 각인시켰다. 그것도 부족해서 하나님보다 더 높이, 더 큰 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핵폭탄처럼 터트리며 여전히 협박적인 설교를 하고 있다.

이 땅에서 한 번 태어난 모든 생명체는 반드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성서적이다. 개혁의 길에서 외치는 자, 맹신 맹목하며 사는 자, 하나님의 주권을 내세워 망언하는 자, 저 높은 곳에서 통치하는 자,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자, 결국 모두가 함께 가야 할 길은 죽음의 길에서 만나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진리다.

인간은 어느 누구나 생로병사(生老病死),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넘나들며 살다가 부르시는 그날, 하늘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하다. 교회와 사역자에게 대적해서 망하고 죽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또 다른 영의 세계인 천국이 있는 곳 아닌가. 사역자가 한 국가와 성도들을 향해 총을 쏘아 대는 것은 범법 행위다. 사역자는 오직 국가와 성도를 향해 섬김의 자세로 내려가는 길만이 사명이며 그 길만이 소명자가 가야 할 길이다.

더 이상 넓은 길에서 국가 경제와 정치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은 방종이다. 넓은 길은 종교가 교통정리를 하는 곳이 아니다. 그곳은 종교를 초월해서 우리 사회 전반적인 소통의 길을 열어 가는 자들이 있다. 성직자가 설교 가운을 입고 넓은 길에서 갈등을 초래하는 교통정리를 한다면 모두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기정 사실 아닌가.

종교는 어떠한 집단이기에 치우쳐 힘을 과시하면 그것은 졸개 집단이다. 조직 폭력이 왜 우리 사회에서 지탄을 받는가. 그들은 힘의 논리로 폭력과 협박을 앞세워 약탈하며 개인의 이득을 취하기 때문이다. 종교의 논리는 배려와 섬김, 화합과 긍휼이다. 개신교가 이명박 대통령을 당선시킨 공로자인 것처럼 하야 문제까지 거론한 것은 마치, 현 정부가 종교적인 야합으로 당선됨을 여실히 보여 주는 결과가 되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다음 정권에서 불교 신자나 천주교 신자가 나온다면 당선은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종교의 분포도를 보면, 불교와 가톨릭은 점차 숫자가 늘어나는 방면에 개신교만이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는 상황임을 각 교단들은 더욱 예민하게 잘 알고 있기에 말이다. 한 국가의 대표자에게 표를 몰아주었다는 명분으로 그렇게 다그쳐서야 되겠는가. 대통령은 어느 특정 종교의 대표자가 아닌, 모든 종교인과 대한민국 국민들이 뽑은 대표자임을 명심해야 한다. 지금 기독교가 숫자와 힘을 믿고 방종할 때가 아니다.

하나님은 낮은 곳에서 함께 하신다

이슬람 채권법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 차이는 당연히 있을 수 있다. 개신교 교리상 완강히 반대할 수 있는 문제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반대의 의견 제시가 부당한 정치적인 개입으로 종교가 정치를 좌지우지한다면 대한민국 미래도 어두울 수밖에 없다.

현재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수쿠크 법'은 여야 할 것 없이 선거 전략상 표와 연결되는 예민한 문제이기에 모두가 침묵할 뿐이다. 혹자는 기독교의 위대한 승리로 볼 수 있지만, 개신교는 힘의 논리, 숫자의 논리로 압박하며 종교의 신성을 기만했다. 대한민국은 개신교 국가도 아닌,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종교일 뿐이다. 이러한 종교의 이기가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것은 타 종교와 더 높은 담을 쌓을 뿐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국교(國敎)를 인정하지 않고 정치와 종교의 분리 원칙을 명백히 하고 있기에 특정 종교의 정치 개입은 반칙이다. 그래서 정교분리(政敎分離)는 모든 종교가 지켜야 할 생명선과 같다. 이러한 기본 질서를 넘어선 한기총도 새에덴교회에서 3·1절 기념 예배를 드렸다.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로 종교의 이기성을 보여 주었다. '수쿠크법'이 폐기된 것은 한기총의 노력 덕분이라 자화자찬했다. 또한 이슬람 채권법을 찬성하는 의원들에게는 낙선 운동을 벌이겠다는 협박도 잊지 않았다.

기독교의 협박 앞에서 여야 할 것 없이 표와 직결되는 문제이기에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기를 꺼려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경제 문제에 종교가 개입하며 불거진 사회적인 갈등은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다. 경제계는 물론 정부와 학계 모두 부담스러워하고 있지만, 기독교의 보복이 두렵기 때문에 눈치만 보고 있을 뿐이다.

그 와중에 노장인 이회창 자유선진당 대표만이 따끔한 한마디를 던졌다. "권력화된 교회를 경계하면서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언동"이라고 꾸짖었다. 헌법의 정교(政敎)분리 원칙을 거론할 것도 없이, 큰 틀의 국가적 이익보다 편협한 종교적 이해가 앞설 수는 없다는 것이다. 경제 전문가와 중동 지역에 자사를 운영하고 있는 기업가들은, "이슬람 채권법은 중동 오일 머니를 적극 유치하고, 금융 위기 때와 같은 외화 자금 유출을 막는 데 긴요하다" 했다.

앞으로 자유선진당은 기독교인 표가 사라질 상황에서 이러한 당당한 발언을 했으니 교회와 사역자들에게 대적한 그 죄가 무엇으로 돌아올 것인지 궁금하기도 하다.

역시 그 반응은 PUP(대통령을 위한 기도시민연대)로부터 "오만불손한 이회창 씨는 사과하고 정계를 은퇴하라"는 총알이 날아왔다. 또한 한나라당을 향해서 "말을 듣지 않으면 법안 추진 의사가 있는 줄 알고 다가오는 4월, 그리고 내년 총선부터 한나라당 비토 운동을 전개하겠다"고 경고했다. 기독교가 선거를 좌지우지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철새처럼 보인다. 복음은 생명을 살리고 긍휼을 실천하기 위한 순교 정신으로 서야 하는데, 마치 '우리 말 안 들으면 국물도 없다'는 협박이 어두운 뒷골목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아 씁쓸하다.

그러나 수많은 네티즌들은 용기 있는 자유선진당을 응원하고 있으니, 이 또한 이변이지만 그만큼 기독교 대표자들과 다름을 보여 주는 모습이다. 그들은 어김없이 종교의 오만에 집중 사격을 가하고 있다. 손봉호 교수는 오늘날 교회가 막강한 세력을 가졌다면 더 많이 위축되어야 하고 더 많이 욕을 먹어야 함을 강조했다. 당연히 지탄받아 마땅하다는 의미다.

하루속히 종교가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비움을 실천하는 '예수 살기'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개신교 지도자들은 '예수 팔기' 자리에서 '예수 살기' 자리로 내려오기를 바란다. 지난 어두운 시절 개혁자들은 순교 정신으로 '예수 살기'를 외치며 이 땅에 수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그 결과 축복과 함께 교회는 초대형화와 더불어 기업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집은 커지고 숫자는 많아졌지만 순교 정신은 사라졌다. 이제 그만 저 높은 곳에서 내려와 진정한 비움의 자리로 내려와야 한다.

지금 자신들의 이름으로 교회 재산이 등록되어 있는 자, 세습과 건축에 탑을 쌓는 자, 감투 놀음에 판돈을 거래하는 자, 정치까지 좌지우지하며 갈등을 초래한 자들은 하루속히 '선어부비취(善漁夫非取)'하기 바란다. '착한 어부는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고사성어(古史宬語)다. 그러나 이 말을 영어로 발음하면 그 뜻은 완전히 달라진다. '선 오브 비취(son of a bitch)'라는 해변의 사생아로 바뀐다.

믿는 자에게는 분명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다. 그러나 총을 국가나 사람을 향해 쏘는 자는 아버지가 없는 사생아가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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