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고 오묘한 감투의 맛

"너, 나 몰라? 시의원 이숙정이도 몰라?"

인간은 어느 누구나 자신이 앉아야 할 자리가 있다. 가정과 사회 모든 분야마다 제각기 역할 분담이 다른 자리다. 이렇게 수많은 자리 중, 섬김을 우선으로 실천해야 하는 자리는 바로 공직자와 성직자의 자리다. 대표적으로 대통령, 총리, 장관, 국회의원, 지방의원, 종교 지도자 등 각기 맡은 바 업무는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반드시 섬겨야 하는 책임 있는 자리다.

며칠 전, 민주노동당 소속 이숙정 성남 시의원이 자신을 몰라본다는 이유로 화끈하게 퍼포먼스를 벌렸다. 그녀는 권세를 남용해 거침없는 오버 킥으로 여론의 이슈가 되었다. 이의원은 성남 시민이 직접 뽑은 시의원이기에 분명 이 사람의 역할은 성남 시민과 소통하며 섬기는 것이 의무이자 책임이다.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군림하는 자가 되어 해프닝을 날린 사건으로 진보들은 4월 보궐선거를 앞두고 좌불안석(坐不安席)이다. 자신들 밥에 누군가가 물을 말아 버린 것 같아 울상이다. 그러나 보수 진영은 이를 이용해 4월 지방선거에서 호재를 누릴 기회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사건도 반드시 발단이 있기 마련이다.

이번 사건의 발단도 때마침 설 명절이라 주민센터에서 이 의원에게 선물을 보낸 것이다. 여러 번 거듭 선물을 보내지 말라 요청했지만, 듣지 않아서 동사무소에 전화로 항의하다 사건은 난동으로 커져 버렸다. 민주노동당은 '일하는 사람들의 희망'의 등대지기 역할을 진보 정신으로 감당해야 했다. 그런데 희망의 등대지기가 완장을 차고,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공공근로자에게 절망의 화살을 날렸으니 따끔한 여론의 몽둥이를 맞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사실 지금까지 여러 광역 지방의원들의 완장 행위는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뇌물, 성폭행, 폭언 등 이보다 더한 상해를 입혔어도 이렇게 이슈가 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왜 민노당 소속 이숙정은 여론몰이 한 방에 나가떨어지는 것인지, 행여 그녀가 나이 어린 여성이기에, 아니면 당리당략에 치우친 마녀사냥은 아닌지. 이번 사건은 이상하게 진보, 보수, 유명 인사까지 합세해서 모두가 난리 법석을 피우고 있다.

만약 그녀가 현 집권당 출신이거나, 제1야당 소속이었다면 이렇게 세찬 바람을 맞았을까? 얼마 전에 집권당 안상수 대표는 보온병 사건, 자연산 사건, 광주 망월동 사건 등 푸짐하게 웃지 못할 저질 코미디를 행하고도 지금도 건재하게 완장을 차고 있다. 도대체 이 사람은 신의 아들인가.

또한 수시로 검증되지 않는 사건을 터트리는 제1야당 의원들은 여전히 국민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이들은 운 좋게도 신의 애첩인가. 그렇다면 민주노동당의 이번 사건을 돌아보면 불행하게도 이들은 신의 서자들로 보인다. 조금만 잘못해도 여론몰이로 혼나고, 여기저기서 무시당하고, 바람막이가 없기에 허허벌판에서 쉽게 얻어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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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공직자로서 그녀의 잘못과 실수는 크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사정없이 그녀를 몰아 낭떠러지로 밀어버린다면, 결국 공정성과 양심도 함께 떨어진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어느 누구든지 그 자리에 가 보아야만이 진정한 자신을 만나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미 에덴의 자리를 떠나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부를 가리고 살고 있다. 자연계 속에서 사는 동물들도 자리를 지키기 위해 크고 강하게 자신을 과시하며 치열한 싸움을 벌인다.

이것이 바로 권력의 치부다

"나는 과거에 돈 선거를 했다, 흙탕물에 빠져서라도 한기총 개혁을 이루겠다."

이에 못지않게 인간도 온갖 형형색색 형상으로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자리를 만든다. 또한 수많은 직업과 직위에 따라 의상과 형상은 권위적으로 다르다. 흔히 종교는 모든 종파마다 자리에 따라 예복이 각기 다르다. 오늘날 종교의 힘이 커질수록 형상들은 더 세분화되어 온갖 문양으로 권위를 나타내며 믿음보다 돈을 믿으며 '금권 선거'로 얼룩져 가고 있다.

더불어 권력의 맛, 자리의 맛은 세상 어떤 요리보다 달콤한 맛이 나는 최상의 진미다. 연일연야 감투싸움과 권력 싸움에 목을 매는 것을 보면 그 맛의 진가를 알 듯하다. 누군가가 필자의 글 아래 이런 댓글을 남겼다. "이단 위에 교단이 있다"는 댓글의 의미가 지금의 사태를 정확히 판단해 주었다.

최근에 벌어진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맹) '금권 선거'에 대한 추태를 유명 일간지 신문을 통해 보았다. '금권 선거에 대한 양심선언'을 터트렸지만, 그 양심이 누구를 향한, 무엇을 얻기 위한 행동인지, 복음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어 보이며 그들의 실상이 가증스럽기까지 하다. 이들도 처음 시작의 자리는 분명 복음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사태는 '내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심히 창망(悵惘)하리라'로 보인다.

어찌 성직자들이 정치 속보다 더 추악한 금권 선거를 치른단 말인가. 도대체 그 돈은 누구의 돈이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지, 정확히 돈의 방향부터 알고 싶다. 모두가 "흙탕물에 빠져서라도 개혁 정신으로 맑은 물을 만들겠다"고 약속하지만 이 또한 포퓰리즘으로 회칠하는 마당이다. 진정 자신들의 호주머니 속 돈이라면 그렇게 기분 좋게 나누어 썼을까? 이숙정 의원은 작은 선물까지도 사양하다가 사건이 커져서 당을 탈당했다. 그런데 이들은 '흙탕물 선거, 금권 선거'를 치르면서도 여전히 건재하다. 이들도 신의 아들인가 보다.

흔히 높은 공직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세금을 멋대로 쓰는 경우가 있다. 내 사람 챙겨 주며 사이좋게 나누어 먹기를 한다. 종교 단체도 이에 못지않게 헌금을 일개인의 유명세에 덧칠하는 곳에 예수님의 이름을 앞세워 가며 쓴다. 원래 '로비'란 개인의 이득을 떠난 조직의 발전을 위한 이타성을 말한다. 지난 집권자가 이제 와서 양심선언을 외치지만, 그렇다면 그때의 양심은 잠시 나들이 갔었단 말인가. 진정한 양심선언은 자신이 죽는 것뿐이다. 십자가 앞에서 말이다.

그러나 십자가는 이미 하나의 형상으로 성전이 장식품이 되어 버렸다. 십자가 앞은 무릎을 꿇어야 할 자리이기에 감히 목이 곧은 자들은 무릎을 꿇을 수가 없다. 그들의 무릎은 이미 석회석으로 굳어져서 십자가는 홍보용으로 권력을 탐하는 수단일 뿐이다. '금권 선거'에 대한 진상을 묻고자 어느 기자가 이들과 통화를 원했지만 병원에 있어 통화가 곤란하다 했다. 역시 이 자리도 하늘만큼 높다는 증거다.

흔히 대기업 총수나 CEO와 국가 고위 공직자, 그리고 머리 큰 자들의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비리가 세상에 알려지면 하나같이 특급 병원에 입원부터 한다. 그리고 변명하는 이유도 같다. '지병이 갑자기 심해졌다'는 것이다. 기발한 코미디 소재감 아닌가.

필자는 한기총을 '한국교회사에서 기필코 사라져야 할 총대'라 칭하고 싶다. 수시로 모여 조직을 만들고 권세를 탐하니, 사역 현장은 취미 생활이나 생활 대책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권세가 높다 보니 온 세계를 날아다니며 자신을 알려야 한다. 또한 밥그릇을 잘 챙겨 주어야 뒤탈도 없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배반하면 막을 길이 없지 않은가.

그래서 권력이 있고 공사가 있는 곳에는 '기생충'과 비슷한 '지도충'이 떼를 지어 다닌다. 이 사건의 진상을 감당한 비대위(비상대책위원회)활동을 지켜보겠지만,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지겨운 나물밥은 만들지 않기를 바란다.

이렇게 자리 높은 자들은 입는 옷도 제각기 다르다. 특히 이들이 입는 설교 가운을 한번 살펴보자. 한국 개신교 목사들 설교 가운처럼 화려하고 이상한 가운도 없다. 얼마나 학벌에 목이 말랐으면 옷에 박사 표시 세 줄을 달아야 하는 것인지. 강대상은 학벌이나 직위를 나타내는 곳이 아닐 텐데, 이러한 정체성 없는 옷은 한국교회밖에 없다.

십자가 앞에서 스스로 '니골라' 당임을 보여 주며 각 교단마다 총회장과 감독들은 이상한 옷을 입고 내 자리를 찾아다닌다. 그리고 명예욕에 치우친 과시와 교권을 쟁탈하기 위한 교단들의 치열한 싸움은 마치,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았던 로마 병정들을 보는 것 같다.

이들이 화장으로 덧칠하며 자리싸움에 연연할 때, 우리 사회 약자들은 곳곳에서 처절하게 죽어 가고 있었다. 며칠 전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 씨가 다세대주택 지하 단칸방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그녀의 현관문에는 '그동안 너무 도움 많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 주세요'라는 처절한 쪽지의 내용이 모두의 가슴을 시리게 했다.

그녀는 젊은이들이 선망하는 영화 엘리트의 산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과를 졸업한 참신한 엘리트다. 그런데 한참 꿈을 향해 날개를 펴야 할 나이에 이렇게 생을 마감했다. 참으로 비정한 현실 앞에서 할 말을 잊었다. 복음이 난무한 이 땅에서, G20을 개최한 나라에서, 선진 사회를 외치는 대한민국에서 한 생명은 행정의 사각지대에서 밀려난 채 싸늘하게 생을 마감했다.

그동안 밤마다 붉은 십자가 기둥은 동네를 붉게 물들이며 무엇을 감당했는가. 전도폭발, 심령대부흥회, 수험생100일기도회, 제자훈련, 여리고성기도회 등 수많은 기도회로 모여 그 자리에서 무엇을 깨닫고 어떤 복을 받았으며 얼마큼 행했는가.

외치는 말씀과 각 교단의 자릿수는 넘쳐 나지만 홍수에 마실 물은 한 방울도 없었다. 진정 무릎을 꿇고 빌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종교를 빙자해 자리를 사고파는 사리사욕자들, 교회가 내 집인양 자리 잡고 주저앉은 맹신·맹목자들, 모두가 자리만 탐하고 있었기에 살려야 할 생명들은 꺼져 가고 있다.

삶의 한가운데서 복음이 부끄러워 설 자리가 없다. 여론마다 들끓는 지탄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한국교회는 속히 교회 건물 안에서, 거대 조직 안에서 자리를 떠나 우리 사회 약자가 기댈 수 있는 한 알의 성미(聖米)로 거듭나야 한다.

이단 위에 교단, 교단 위에 돈을 믿고 사는 자들은 저 높은 바벨탑에서 속히 떠나는 것만이 믿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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