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몰이의 허와 실

스피드 시대에 발 빠른 잡지와 기사들은 소망교회 폭행 사건에 대해서 거반 같은 답들로 모아지고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어느 쪽인지, 사건은 바람을 타고 다니다가 잠시 멈추었다. 무엇이 진실이고, 누가 억울한 것인지는 이 사건을 보는 시각에 따라서 각기 다를 것이다.

필자도 어느 누구의 편에서 일방적인 글을 쓰고 싶지 않다. 이 또한 나의 답이 공정한 답이라는 잣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부분 묻는 자가 사건의 각을 어디에 맞추었는가에 따라서 이미 정해진 답을 요구할 수도 있다. 또한 같은 답이 나올 수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인터뷰, 여론조사, 교인들의 반응을 물어 여론을 업고 이미 정해진 답안으로 골인하는 여론몰이도 있다. 이러한 여론몰이는 한마디로, 이미 답을 가르쳐 주고 시험을 보는 것과 같아서 이것은 부정행위다.

십자가는 아방궁이 아니다

며칠 전 온라인을 통해서 김지철 목사가 성도들에게 보낸 서신을 보았다. 그 서신을 통해서 필자는 한국교회 현실과 대형 교회의 문제점들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모든 사건의 전말을 다 접어 두고, 일단 이번 소망교회 폭행 사건으로 인해서 한국교회는 모두가 상처를 받았다.

그동안 거짓의 영들은 십자가를 아방궁 안에서 찾았다. 십자가에 바퀴를 달고 물질과 숫자에 미쳐 달리다 보니 속도위반도 무시한 채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다. 지금껏 교회 내에서 어떠한 비리와 폭행이 일어나도 무조건 은혜가 되지 않는다는 명분 아래 아방궁 비밀 금고 안에 감추기에 급급했다. 그 결과 아방궁 비밀 금고는 더 이상 감출 수 없는 빙산의 일각이 되어 드디어 터지고 말았다. 마치 때는 이때라는 듯이 수많은 교회의 비리는 연일연야 온라인과 오프라인에 탑 기사로 등단했다. 하루아침에 스스로 '타락하는 스타'가 된 사람도 있다.

요즘 고위 공직자들 청문회 과정을 지켜보면, 그들은 무엇을 잘못했는지 식은땀을 흘리며 집안 망신을 당하고 있다. 그들을 보면서 가장 청빈하고 거룩해야 할 종교 지도자들도 청문회를 거쳐 가라 하고 싶다. 저리도 높은 자리에 앉고 싶어 혈투를 벌리면서 왜 사전에 검증은 받지 않는 것인지. 필자가 주장하는 것은 목회자도 책임 있는 자리에 앉으려면 반드시 엄정한 검증이 필요하다 생각한다.

예전에 필자가 다녔던 H교회에서 있었던 사건이다. 담임목사가 1년을 투병하다가 병환으로 별세했다. 그 과정에서 청빙위원회가 사전에 후임자를 기도하며 준비했어야 했는데, 전 교인과 제직들은 담임목사 쾌유만을 위해 어느 누구도 후임자 문제를 거론하지 못했다. 오직 "어서 쾌차하셔서 강대상에 다시 서셔야지요"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담임목사는 다시 건강을 회복할 희망이 컸기에 후임자를 거론하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 몇 주를 남겨 놓고 번개 치기로 브로커 목사를 통해서 벼락같은 후임자가 나타났다. 그 후 교회는 날마다 갈등과 다툼으로 조용할 날이 없었다.

그 후, 기존의 제직들 가운데서 전임 목회자와 가까운 사람들의 비리를 들추며 새로 부임한 목사를 사이에 두고 갈등은 끊이지 않았다. 날마다 당회실은 다툼과 고성으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그 기간 동안 필자가 가장 안타깝게 생각했던 것은, 영적으로 모두가 병들었다는 사실이다. 소경이 길을 안내하니 거짓의 영에 사로잡힌 군중의 무리가 어디로 가겠는가. 서로가 분노하며 상대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려는 난투극은 끊이지 않았다.

흔히 목사 청빙 과정에서 교회는 분파되기 싶다. 전임자의 사람과, 새로 부임한 목사의 사람들로 나누어진다. 전임자로부터 소외당한 사람들이 새롭게 완장을 차고 소리 없는 총을 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들은 새로 부임한 목사를 무조건 싸고돌며 무슨 짓을 해도 무죄로 덮어 주며 교회 실권을 송두리째 넘겨준다.

다행히 후임자가 영적으로 깨어 있다면, 이러한 분쟁들은 말씀의 능력과 은혜로 다시 화합하는 교회도 있다. 그러나 후임자가 이들 편에서 한 무리가 되었을 때, 그때부터 교회는 분쟁과 다툼이 시작된다. 결국 교회는 전임자와 후임자 사이에서 교인들은 방향을 잃고 군중의 무리가 된다.

필자의 입장은 그 당시에 후임자를 향해 "지금은 모두를 다 안아야 한다"는 조언을 했다. 그러나 후임자가 교회 건축 문제까지 들고 나오면서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필자는 교회 건축을 강력하게 반대했던 사람이다. H교회는 전임목사와 성도들의 기도와 눈물이 담긴 아름다운 교회였다.

전임목사가 별세하기 직전까지 교회 화장실을 거액을 들여 고칠 정도로, 교회 시설은 어느 곳 하나 하자 없는 완벽한 교회였다. 수십억을 들여 전체를 리모델링한 교회를 다시 건축하자는 안건에, 나는 당당하게 맞설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정든 교회를 떠났지만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필자가 20년을 섬기며 동고동락(同苦同樂)했던 영적인 동산이었기에.

십자가는 자기 부인이다

지금껏 한국교회 내의 내분과 갈등은 담임목사 책임이 크다고 볼 수 있다. 교회는 교역자와 성도 모두가 하나님의 사람이기에 말씀을 먹고 사는 영적인 사람들이다. 말씀을 전하는 자가 영적인 양식을 신실한 마음으로 전했다면, 기필코 교회는 다툼과 갈등이 일어날 수 없다.

능력의 말씀에는 반드시 하나가 되는 역사가 있다. 그러나 하늘의 만나가 아닌 불량 식품을 먹이고, 또한 믿음의 사람들이 가야 할 방향을 목회자가 잘못 제시했기에 다툼은 끝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강대상에서 목회자가 개인의 감정에 치우쳐 말씀이 어느 한쪽에 치우치다 보면, 말씀을 먹는 자는 상처를 받기 마련이다. 탐욕으로 먹은 음식은 배탈이 나서 응급실 신세를 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동안 수많은 미혹의 영, 거짓의 영, 음란의 영을 누가 주었는가. 이러한 사탄의 영들을 키워 온 온상은 어디인가. 바로 강대상에서 외치는 자들이 지금껏 더러운 영들을 만발했다는 것을 진정 모른단 말인가. 성직자의 탐욕과 야망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았다면, 김지철 목사도 시급하게 다시 강대상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초심으로 돌아가 잃어버린 초심을 먼저 찾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더불어 부목사들은 사람의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의 사람은 자신이 먼저 비겁해진다. "아골 골짝 빈들에도 어디든지 가오리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은 어디든지 가라면 가야 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주저앉은 순간 자기 부인은 사라지고 탐심을 채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사람은 분쟁과 탐욕으로 스스로 멸망의 길을 재촉하는 것이다.

십자가 사랑은 절제함이다

따라서 직분자와 성도들도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제발 목회자를 분에 넘치게 받들지 말라. 목회자를 잘 섬겨 주는 것은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러나 목회자를 무조건 받들어 세워 주는 것은 독약과 같다. 목사는 거친 비바람과 모진 풍파도 직접 맞아 보아야 한다. 왜 거친 풍파를 성도들이 모두 막아 주려 하는가. 특히 큰 교회 목회자는 더 유약해질 수밖에 없다. 문제마다 성도들이 바람막이가 되고, 해결사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성도들의 무분별한 사랑이 목회자를 시험 들게 한 가장 가까운 범인이다. 그래서 성도들에게도 책임이 반드시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목회자가 무엇이든지 다 이룰 수 있는 아방궁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는가. 어찌 고난과 아픔 없이 예수님의 처절한 절규 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목회자가 거센 풍파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해야 하고, 낭떠러지 끝에서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다시 일어서게 해야 한다. 그것이 절제된 진정한 사랑이다.

십자가 사랑은 절제할 줄 알아야 하고, 인내할 줄 알아야 한다. 자녀도 사랑과 보살핌이 지나치면 자칫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로 남의 눈총만 받지 않은가. 자식이 귀하면 더 강하게 모진 세파를 견딜 줄 알게 키우는 것이 부모의 절제된 사랑 아닌가.

무조건 담임목사는 받들어야 하고, 무조건 담임목사는 죄가 없다는, 맹신·맹목을 즉시 버려야 한다. 진심으로 자신들의 목회자를 아낀다면 무조건 용서보다 냉정한 절제된 사랑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시간을 주어야 할 것이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달콤한 위로와 사랑만 받는다면 응석받이, 버릇없는 무분별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결국 영적인 손실은 당연히 성도들에게 돌아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성도는 개교회주의에서 벗어날 줄 아는 것도 비움이다. 필자도 그러한 마음에서 지난날 정든 교회를 떠났다. 긴 시간 교회 깊숙이 들어와 자신이 마치 주인인양 행세했던 것도 하나님을 무시했던 행위였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흠향하고 계신다. 예배는 아벨의 제단을 쌓는 마음으로 드려야 하는데, 어느 사이 자신은 가인의 제단을 쌓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신앙을 위해 영적인 피폐함을 내려놓고 예배할 곳을 찾아 떠났다. 그곳에 남아 비판의 소리를 내는 것보다, 긍정의 마음으로 자유할 수 있는 곳에 안착했다. 한바탕 소용돌이 속에서 떠날 사람은 떠나야 했다. 그러나 여전히 남아 있는 자는 더 이상 분쟁의 소리를 높여서는 안 될 것이다.

불가에서도 '중이 절이 싫으면 절을 떠나면 된다'는 말처럼 교인들도 목회자가 싫으면 자신이 은혜 받을 곳을 찾아 떠나는 것이 영적으로 유익하다. 마냥 주인 행세를 하며 주저앉아 분쟁의 불씨를 일으키는 것보다, 자신을 위해서 떠나는 자가 지혜로운 자라 생각한다. 하나님의 긍휼은 큰 교회, 숫자가 많은 군중 안에 거하시기보다 지극히 작은 마구간에 더 가까이 함께하고 계신다.

십자가는 학문이 아니다

그리고 더 이상 예수님을 신학이나 전문 서적에서 찾으려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예수님은 신학과 학문 안에 거하신 것이 아니라, 비운 자들의 가슴 속에서 살아 계신다. 신학과 학문으로 머리를 채우기 전에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 가는 것이 신앙인이 평생 동안 가야 할 길 아닌가. 잠시 길을 가다 넘어졌으면, 다시 일어나 낮은 곳을 향해 내려가야 한다. 정상은 잠시 머무는 곳이기에 내려가는 길에서만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또한 전임자 K 목사는 이제 그만 자신의 그림자도 거두어야 한다. 제 아무리 설교를 달변으로 외친다 해도 자신을 비우지 않는 설교는 울리는 꽹과리다. 성도는 명설교를 달변으로 잘하는 설교자보다, 자신을 비울 줄 아는 사람을 존경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거짓 선지자처럼 보인다.

사람의 사람을 만드는 곳은 이윤 추구가 목적인 자본 시장이다. 그러나 교회는 손익분기점을 맞추는 곳이 아니요, 또한 교회는 어느 누구의 교회, 어느 사람의 교회도 아니다.

그렇다면, 다 내려놓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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