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이클 샌델 지음 / 이창신 옮김 / 김영사 펴냄 / 404면 / 1만 5,000원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노숙자들이 지하도에 앉아 허공을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 특정인이 노력 없이 필요 이상의 돈을 계속 버는 이유, 학생들이 입시 경쟁을 하며 피 터지게 공부하는 이유, 서민들이 명품 가방과 비싼 자동차에 열광하는 이유, 하지만 저마다 자신이 생각한 바른 인생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일까? <정의란 무엇인가>는 정의롭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언지 고민하게 해 준다.

저자 마이클 샌델은 하버드대학에서 30년간 정치철학을 가르친 저명한 교수이다. 그의 정의 수업은 하버드대에서 지금까지 20년간 명강의로 손꼽히고 있다. 그 수업을 바탕으로 한 <정의란 무엇인가>는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칸트, 매킨타이어까지 여러 정치철학자들의 이론을 우리 주변의 예화들을 통해 검증하고 반박, 대결시킨다.

샌델은 인류가 정의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행복하게 하느냐, 자유롭게 하느냐, 미덕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첫 번째는 공리주의 시각이다. 사회 전체의 행복을 극대화하는 방법이 정의에 이르는 길이다. 두 번째는 자유 지상주의 시각이다. 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 그것이다. 세 번째는 목적론적 시각이다. 목적에 따라 미덕을 포상하고 장려하는 방법이 그것이다.

그러나 최대 행복 원칙인 공리주의는 만족의 총합이 큰 곳에 관심이 있기에 개개인의 권리는 무시하기가 쉽다. 모든 가치를 쾌락이라는 하나의 저울로 측정해서 무게를 재는 것도 단점이다. 모든 사람의 기호는 다르며 저울에 달 수 없는 도덕적 가치가 존재하기도 한다는 반박을 들을 수 있다. 또한 공리주의는 당위에 호소하지 않고 이익에 호소하기에 우리가 이익과 상관없이 어떤 부당함을 지적해야 할 때 도움을 주지 못한다.

자유 지상주의는 타인의 권리도 똑같이 존중한다면 자유를 제한받지 않고 소유물을 마음껏 쓸 수 있다는 이 시대에 만연한 주장이다(자기 능력으로 번 돈을 자기가 쓴다는 데에 아무도 반박하지 않는 사회인 것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돈은, 몸은, 능력은, 성격은, 환경은 과연 자신의 소유인가? 재능, 가정환경 등의 행운 유무에 따라 어떤 이들은 선택할 여지없는 궁지에 몰리게 된다(가령 매우 궁핍한 나라에 사는 소녀가 매춘으로 돈을 버는 것이 자유로운 직업 선택의 결과인가?). 자유 시장에서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하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유라는 이름하에 타인의 자유를 구속한다면 진정한 자유라 할 수가 없다.

칸트와 롤스는 이러한 자유 지상주의를 이으면서 문제는 극복하려고 시도하였다. 임마누엘 칸트는 이성을 지닌 인간은 모두 자율적인 존엄한 존재이기에 수단으로 전락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존 롤스는 원초적으로 모든 사람이 평등한 상태라 가정하고 그때 선택되는 원칙은 이상적이라고 보았다. 그의 평등주의 정의론은 재능 있는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으면서도 재능의 불공정한 분배를 바로잡는 차등 원칙을 대안으로 제시했다(재능을 개발하게 하되, 그 재능으로 시장에서 거둬들인 대가는 공동체에 돌아가게 하는 것, 218쪽).

그러나 독립된 자아의 선택에만 무게를 두는 자유주의적 사상가들이 설명할 수 없는 도덕적 개념이 있다. 가족, 국가, 민족의 구성원으로서 행해야 할 충직과 책임이다. 오늘날의 독일인이 과거 선조가 지은 잘못을 사죄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개인은 잘못이 없지만 그를 형성한 사회와 그곳에 포함된 그의 정체성이 사죄를 요구하는 것이다. 매킨타이어의 말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우리가 선택(칸트)하지 않은, 사회계약(롤스)의 결과도 아닌 도덕적 의무가 있다. 그것은 내 삶의 이야기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포함되어 있다는 인식, '연대 의식'이다. 내가 어디에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지 않고 나 혼자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없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삶을 살기 위해 미덕을 실천하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미덕은 습관을 통해 형성되기에 책이 아니라 폴리스에서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이란 본성상 함께 정치 참여를 하여야 언어를 잘 사용하고 무엇이 선인지를 고민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상에 공평하고 싶은 현대인들에게 무엇이 선인지, 좋은 삶인지 하는 문제는 조심스럽다. 샌델은 그렇다고 분명히 존재하는 인간의 도덕적, 영적 지향을 무시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저자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들으며 C. S. 루이스가 떠올랐다. <순전한 기독교>에서 루이스는 도덕률(인간이 무엇이 옳고 그른지 따로 배우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아는 법칙)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거로 도덕률을 심어 준 신도 존재한다고 논증한다. 샌델과 루이스는 인간의 본성을 파헤쳐 왜 그렇게 느끼는지를 해명하고 주장의 증거로 삼는다(우리는 독일인이 조상의 죄를 자기가 사죄하지 않겠다고 하면 부당하게 느낄 것이며 그래서 매킨타이어의 주장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것이 다른 의견을 가진 독자들도 책을 읽으며 공감하게 되는 이유다.

하나님은 우리 내부에 선이 무언지, 정의가 무언지 감각을 심어 놓지 않으셨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러면 혼자 힘으로 선해질 수 없다는 걸 깨달을 수가 있다. 혼자서 선해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정말 선한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주위 사람들, 공동체와 떨어져서 고고하고 정의롭게 살 수 없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그렇게 살 수가 없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