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마다 각자에게 행복한 삶이 다르다면, 나에게 행복은 지극히 사소한 어떤 순간들인지 모른다. 지나간 순간은 모두 그리워진다. 기억은 마치 사진처럼 강렬한 장면으로 남는다. 그 장면을 바라보며 했던 나의 생각도 함께 남는다. 어린 시절, 자의식이 강해서 말보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이 순간은 지나.' 처음 이것을 예감했던 때는 예닐곱 살 무렵이었다. 주황색 티셔츠를 입은 나는 막내 이모와 외가댁 뒷산에 올랐다. 해가 지는 중이었던가. 막내 이모가 카메라로 나를 찍어 준다고 했다. 나는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려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순간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내 앨범에 꽂힌 막내 이모의 사진을 볼 때마다 예감이 맞았음을 깨닫는다.

어느 날 밤, 다대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갔다가 또 과거의 나를 만났다. 반납할 책은 레비나스의 <탈출에 관하여>였다. 이 주일간 들고 다녔지만 한 장도 못 읽고 그대로 돌려주어야 했다. 제목으로 독서한 셈이었다. 나는 어디에서 탈출한 건지, 어디에 있는 건지, 혹은 어디로 탈출하고 싶은 건지 자문해 보았다. 왜 이 제목에 끌렸던 걸까.

도서관 옆엔 사춘기 시절에 살던 아파트가 있었다. 아파트 뒤의 놀이터가 보여서 가 보았다. 동생과 자주 놀던 곳이라 친근했다. 비가 내린 뒤라서 풀 내음이 싱그러웠다. 내친 김에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어느덧 10여 년이 지난 후여서 그만큼 낯설었다. 내부 벽이 허전했고 스산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가 살았던 21층까지 올라갔다.

21층 복도에 난 창으로 놀이터를 내려다보니 아찔했다. 비정상적으로 높은 곳에서 살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집에 놀러왔던 친구들은 베란다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길 무서워했다. 나는 무섭지 않았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다시 놀이터를 내려다보았다. 비로소 예전 시각이 돌아왔다. 나는 임대 아파트의 고층에 사는 가난한 소녀가 아니었다. 21층은 비정상적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아늑했다.

고개를 들면 눈앞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다대포 바다가 펼쳐졌다. 적요한 밤바다는 모든 것을 삼키는 죽음과 아름다운 고독을 가르쳐 주었다. 세계가 거기 있었다. 세계의 원초적 얼굴이 그러할까. 바다는 태초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듯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 1:2) 빛이 생기기 이전의 세상은 과연 그런 모습이었으리라.

고층에 사는 소녀는 세계와 맞닿았다. 세계는 하나였고 소녀도 하나였다. 바다는 미묘하게 매일매일 달랐지만 눈으로 찍은 모든 풍경이 마음속 사진으로 남았다. 레비나스의 책을 반납하고 반납 영수증을 받아 집으로 돌아가며 생각했다. 그 시절의 나는 책처럼 반납되었는지 모른다고. 이 주일이 지나면 책을 정상적으로 반납해야 한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시간도 반납되어 돌아오지 않았다. 영수증은 남지 않았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 3:11)

어떤 교수님은 말씀하셨다. 영원히 살 수 없고 영원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인간은 영원한 것을 동경하게 되었다고. 나도 하나님을 몰랐다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존재한다. 그러니 지나가는 것들도 어찌나 아름다운지. 그렇게 한 토막의 역사가 되고 한 줌의 바람이 되는 시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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