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리 비둘기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오리처럼 살이 찐 비둘기가 버스를 골라 타려는지 종종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비둘기는 시야가 흔들릴 텐데도 꿋꿋이 목을 앞뒤로 흔들며 걸었다. 나는 버스를 기다리며 쭈그려 앉아 도널드 밀러의 <천년 동안 백만 마일>을 읽었다. 이윽고 버스가 도착하자 비둘기는 멀리 날아갔다. 비둘기도 나도 어딘가로 가야만 했다. 나는 좌석에 앉고서도 책 읽기를 멈추지 않았다.

도널드 밀러는 자신의 삶을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좋은 이야기의 요소가 좋은 삶의 요소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 책을 썼다. 좋은 이야기의 요소는 '한 인물이 뭔가를 원하여 갈등을 극복하고 그것을 얻어내는 것'이었고 삶이 더 나아지기 위해서는 실제 갈등을 극복해야 했다. 도널드 밀러는 자신의 삶에서 가장 어그러진 관계의 문제, 아버지의 부재를 떠올리는 데까지 나아간다. 페이지가 더 넘어가면 그가 아버지를 찾으러 나갈지도 몰랐다.

이야기의 핵심, 인생의 핵심은 인물의 변화라는 부분을 읽을 무렵 버스가 밀양 터미널에 도착했다. 좋은 이야기에서 이야기의 인물은 어김없이 변화한다. 겁이 많은 사람이 끝에 가면 용감해진다. 그렇다면 좋은 삶에서도 인물은 변화해야 한다. 나는 내 삶을 잠시 돌아보았고 앞으로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어림잡아 보았다.

터미널 근처에서 책을 한 권 사고 싶어져서 저번에 눈으로 위치를 확인해 둔 기독 서점에 찾아갔다. 일반 서점과 다르게 중앙에 큰 탁자 세 개와 의자들이 있었고 책꽂이들은 벽면에 위치했다. 한쪽 벽은 책을 한 권씩 진열하는 진열대였다. 전화를 받고 있던 주인아저씨는 받고 있던 전화를 부랴부랴 끊고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가 "어디에서 오셨나요?"라고 물을 때만 해도 오늘 내 하루의 엑스트라인 줄만 알았다.

아저씨는 성도들과 교제하고 신앙 상담을 하는 목적으로 올해 초에 서점을 열었다. 그는 이신 칭의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고 내가 의문 사항이 생겨 질문을 하면 그것으로 인해 이야기가 길어졌다. 내 옆엔 의자가 있었지만 앉으면 대화 시간이 지나치게 길어질 것 같아 앉지 않았다. 우리가 서 있으면서 장장 2시간 동안 이야기를 할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그중 하나님나라(천국)에 대한 이야기는 어렴풋이 아는 내용이었지만 낯선 환경에서 들으니 새로웠다. 성경에 등장한 하나님나라는 죽어서 가는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통치의 개념이라는 것이다. 장소의 개념으로도 쓰이게 되면서 통치의 개념이 가르쳐지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예를 들면, 성도들의 몸도 교회이지만 성도들이 모인 건물이 교회로 불리면서 후자의 의미가 흔하게 인식된 것과 같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뤄지면 천국이 임한 것이다. 이 땅에 살면서도 천국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의 삶, 성화는 중요한 문제이다. (성화되지 않으면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에 참여하게 되는 것과 같다)  아저씨는 <성화의 신비>라는 책을 추천하셨다. 같은 제목의 책이 두 권이었는데, 월터 마샬의 책은 두꺼워서 질겁했지만 박영선 목사의 책은 두껍지 않아서 읽어 보고 싶었다.

점점 더 거룩해지기 위해, 즉 성화를 위해 노력해야겠구나 생각하는데 아저씨는 우리의 노력으로 성화가 이뤄지는 게 아니라고 하신다. 우리 안의 성령님이 우리의 본성을 천국 시민답게 바꾸시기 때문이다. 성령님의 열매들이 자란다. 나는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한다. 바울이 "나의 나 된 것은 오로지 주의 은혜라"라고 한 이유다. 그러므로 성화는 신비하고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서점 밖으로 나오자 주위는 깜깜했다. 7시 20분. 막차일지도 모를 시내버스를 타고 더 깊은 어둠과 달의 시, 풀벌레의 음악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도널드 밀러는 공항의 투명 육교에 눈발이 앉는 장면을 보며 천국의 공항을 상상했었다. 천사들이 마중 나와선 밀러와 그의 일행을 차에 싣고 천년 동안 백만 마일을 달려 천국으로 갈 것이라고.

그것은 언젠가 훗날에 있을 일이다. 아직 다 읽지 못한 책처럼 내 인생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겨우 절반을 넘어갔거나 채 절반도 넘어가지 않았다. 그래도 바로 이 순간 내 안에 계신 성령님, 내가 지닌 천국 국적이 나에게 기쁨을 준다. 작가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함께 써 나갈 이 땅에서의 이야기들이 있다. 이야기 속 주인공처럼 갈등을 극복하며 변화할 내 모습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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