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공장에서 단순 포장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다. 한 알바생 언니는 "이런 80년대 공장을 보았나!"라는 말을 남기고 출근 하루 만에 떠나갔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믿을 수 없을 만치 뚱뚱한 반장님이 양푼에 밥을 잔뜩 넣고 반찬을 비벼 드시던 광경이 생각난다. 거의 귀엽기까지 한 모습이었다. 반장님의 역할은 작업자들, 특히 알바생 감시와 질책이었다. 그녀는 한 마리의 야생 동물처럼 돌아다니며 이따금 포효했다. "빨리 안 해? 느리잖아!" 주위의 정직원들은 그녀와 더불어 알바생들의 일하는 방식을 주시하였고 때론 고쳐주었다.

"이건 이렇게 해야 빨리할 것 아냐, 나 하는 것 잘 봐!"

내 방식을 고집하다간 분위기가 험악해질 듯하여 그녀를 잘 보았지만 내 손은 잘 따라 주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두 번째 공장 아르바이트는 자를 포장하는 곳이었다. 이번에도 힘들 것을 각오하고 갔다. 그러나 80년대 공장의 경험을 뛰어넘는 고난은 찾아오지 않았다. 일하는 사람들은 열댓 명뿐이었고 감시하는 사람이 없었다. 한 직원이 시범을 보여준 후엔 자기 일을 하러 갔다. 실수하는 게 있어도 처음엔 서툰 게 당연하다는 분위기였다. 집에서 저녁밥을 기다리는 자녀들의 엄마답게 서로에게 관대하며 친절한 이들이었다. 그러나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신학기를 앞두고 자 생산이 늘어나자 대거 들어온 알바생들이었던 것이다. 대여섯 명의 알바생들과 늦게 합류한 나는 그 사실을 몰랐었다. 그들 중 정직원은 단둘뿐이었다.

분위기가 수평적이었던 이유가 그것으로 밝혀지자 조금 씁쓸했다. 정직원이면서도 알바생들에게 잘 대해 주는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정직원은 알바생보다 오래 일했기에 보다 높은 위치에서 이것저것 질책하기가 쉽다. 물론 권력 남용보다 지저분한 모습은 없지만 현실은 그런 것이다. 정직원이 되고, 리더가 되고, 말발이 되고, 얼굴이 되고…. 하여튼 뭔가가 될 때 겸손해지기란 무척 어려운 법이다. 실력과 직위는 정직원이어도 단기 알바생과 같은 겸손함을 지닌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그런 바람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필터 공장에 가기 전까진. 최근에 필터를 코팅하는 회사에 딸린 공장에서 단순 노동을 하였다. 아르바이트 첫날 난데없이 피자와 통닭이 간식으로 나왔다. 회사 창립일이라며 사장님이 돌리셨다는 것이다. 나는 얼굴도 모르는 사장님께 호감이 갔다. 이곳의 정직원들은 일곱 명 정도였고 분위기가 매우 화기애애했다. 두 명의 남자 리더들은 네댓 명의 알바생들에게 농담도 하고 친절히 대했다. 일을 잘못했을 때도 질책하지 않고 방법을 차근히 설명해주었다.

그런 사람들은 인상적으로 남는다. 영화 <해결사>에서 오달수가 맡은 형사 캐릭터도 그런 의미에서 무척 마음에 들었다. 거친 말투의 등장인물들 사이에서 그의 예의 바르고 부드러운 말투는 종종 웃음을 자아내며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는 리더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조급하거나 강압적인 인상을 풍기지 않았다. 심각한 사건을 다룰 때에도 눈에 보이는 그대로 믿지 않고 한발 물러서서 생각한 후에 지혜로운 결정을 내렸다. 체스를 둘 때 승리하기 위해선 전략을 잘 세워야 한다. 그는 사람과 사건 앞에서 좋은 수를 둘 줄 아는 캐릭터였다.

엄청난 에너지로 세계 기독교화에 한 획을 그었던 사도 바울도 그랬다. 그는 명확한 진리 선포와 타협 없는 논증으로 일했음에도 사람을 대할 때에 겸손과 온화함, 사랑을 강조하였다(강조하면서 그렇게 안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제자 베드로는 또 어떠한가. 예수님과 자신의 친분을 이용해 신도들 위에서 독불장군으로 군림할 수 있었고 원래 성격대로 행동할 수 있었음에도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가 닮기 원했던 예수님이 종의 몸을 입고 고난받은 분이셨기 때문이다.

예수님, 베드로, 바울, 코팅 회사 직원, 그들은 실력과 인격을 둘 다 붙잡았고 그것이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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