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기도는 대화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기도를 가르치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 말이 어디서 누구를 통해 나온 말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냥 "기도는 대화라더라"는 말만 전해질 뿐입니다. 어떻게 보면 참 아름다운 말입니다. 내가 말하고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하나님 오랜만이네요."
"그래 정말 오랜만이다. 난 네가 참 보고 싶었단다."
"하나님 저 너무 힘들어요."
"그래, 내가 네 맘 다 안다. 많이 힘들지?"

기도가 대화라는 말은 대충 이런 상황을 상상하며 사람들 사이에 전해집니다. 머릿속으로 그려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아름다운 교제의 시간이 바로 기도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믿는 신앙인 중에 정말 대화처럼 기도하시는 분이 얼마나 계실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들리지 않는 음성 앞에서 자신의 믿음 없음을 탓하고 있거나, 자기 문제의 해답을 찾으려 성경을 뒤적거릴 뿐입니다. 조금 더 심한 경우는 마치 그 음성이 들리는 것처럼 머릿속에 있는 자신과 가상의 대화를 만들어 내며 기도를 이어 나갑니다. 기도가 대화라는 말은 "정말 그런가"라는 물음을 가지고 볼 때 "글쎄…"라는 답을 남길 뿐입니다.

사실 기도가 대화라는 근거는 성경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기도가 대화라는 설명을 위해서 인용되는 근거 구절들은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약속하는 구절이지 대화적인 기도를 지지하는 본문은 아닙니다. 대화 같은 기도의 예시처럼 사용되는 성경에 존재하는 신과의 대화 장면 역시 기도라기보다는 하나님의 계시의 형태에 가깝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나눈 대화나 사무엘을 부르시는 장면, 예언자들의 언어 역시 신과의 만남이나 예언에 가까운 것이지 기도라고 보긴 어렵습니다. 특히나 그 모든 상황들은 하나님이 말을 걸어오시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기도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 어디에도 사람들 사이에 나누는 대화와 같은 기도의 시간을 갖는 예를 찾아보기는 힘듭니다.

그렇다면 왜 기도는 대화라는 말이 나왔을까요. 이 말이 주로 인용되는 상황은 굉장히 간단합니다. 기도할 때 우리가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할 때 쓰는 말입니다. 우리의 삶의 걱정, 욕심 등으로 인해서 기도의 시간이 온통 내 기도 제목만 줄줄 이야기하다 끝나는 것 같은 상황에 대한 비판으로 '기도는 대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도 말씀하시게 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이 말이 사용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여기에는 그 의도를 왜곡시키는, 포기되지 못한 전제가 하나 깔려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셔야 하지만 그럼에도 기도는 우리의 필요를 말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애석하게도 이런 전제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잘 맞아떨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 6:30~32)

이런 불일치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께 우리의 필요를 아뢰는 것이 중요하다며 갖가지 해석을 해 가며 스스로를 설득시키려고 합니다. 그중의 하나가 아버지는 자녀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지만 자녀가 직접 달라고 말하길 바란다는 것입니다. 글쎄. 그런 아버지가 이상적인 아버지인가요. 아니면 보통 부모님들의 마음이 그러신가요?

이처럼 검증되지 않은 비유들을 통해서 '기원'이라는 모티브를 정당화하려는 노력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기도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그럴싸하게 꾸미는 자기 세뇌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전제는 예수의 기도가 어떤 기도였는지를 살펴본다면 그 개념부터가 잘못된 것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모범이 되는 기도의 예시인 그리스도의 기도의 예를 보면 기도가 대화라는 것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 주시는 기도는 대화가 아닌 복종이며 침묵입니다. 물론 예수님도 이 잔을 지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도 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 기도는 내 것을 주장하거나 아뢰는 기도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들을 꿇어 엎드리는 과정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솔직히 꺼내 놓습니다. 이 고통의 시간으로부터 벗어나길 원하는 인간으로서의 마음, 굳이 내가 아니어도 될지 모른다는 유혹. 하지만 그것은 이루어지기 위해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포기하고 쳐서 복종시키기 위해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 26:39)

말하는 자가 아뢰는 것들은 곧 하나님 앞에서 갱신되어야 할 대상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할 때 우리는 말을 하면 할수록 우리 안에 있는 더러운 것들과 마주하게 되고, 곧 그것은 하나님의 뜻 앞에 포기해야 할 것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곧 내가 하나님의 뜻 앞에 무릎 꿇게 해야 할 어떤 것이지 하나님이 들어주시고 받아 주셔야 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십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예수님을 통해 보이고 있는 기도는 대화이기보다는 침묵이며 소원이기보다는 믿음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기도는 우리의 말뿐 아니라 대화의 또 다른 한편에 서 계신 하나님의 침묵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의 기도에 하나님은 말로 대답하지 않으시고 그것을 역사로 이루어 내십니다. 즉, 그리스도의 기도는 철저히 침묵하시는 하나님 부재의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재의 상황은 예수를 십자가로 이끌어 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고 그 기도에 응답하시는 방법입니다.

검증되지 않은 채 출처도 알지 못하고 '그저 그랬으면,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그렇다니까'라고 여겨진 말들이 시간이 지나서 전통이 되고 교리가 되면 또 다른 누군가의 신앙을 재단하는 틀이 됩니다. 하지만 원래 교리라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설명하기 위한 말이지 우리의 신앙을 규격화하기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신앙에서 이야기되지 않는 교리와 환상은 하나님 아닌 것으로 하나님의 자리를 대체하는 신화일 뿐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나요?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