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주일성수를 제대로 안하는 사람이 교회의 직분자가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주중에 사회적 약자를 진지한 사랑으로 돌아보는 삶이 부족하다거나 사회에서 들키지 않은 불법적 행위를 한 것이 직분자로서의 결격사유가 되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일 것입니다. 특히 잘 드러나지 않는 후보자의 은밀한 사회생활에 대해서는 검증할 수 있는 덕스러운 수단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삼아 그런 부분에 관련된 질문은 아예 던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보다 정확한 진단일 것입니다.

예컨대 모 초대형교회에서는 장로로 피택된다고 해도 수천만 원 상당의 헌금을 할 수 없는 형편이라면 장로 안수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공개된 사실입니다. 이유인즉 장로가 되려면 그 정도의 물질적 축복을 받을 만한 믿음의 구체적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각한 문제는 이 때 수천만 원이라는 돈이 어떻게 그 후보자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아무도 질문을 던지려고 하지도 않고 그럴 수도 없는 분위기입니다. 수천만 원이 다양한 비리와 불법적 행위의 결과라고 할지라도 그 액수 자체가 소유자의 믿음을 대변해주는 강력한 증거로 둔갑하게 되는 셈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놀라운 일은 이런 현상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별로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는 우리들의 시각이 얼마나 기독교의 본질적인 내용에서 멀어져서 형식적인 껍데기만을 붙들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극명한 예입니다. 이런 모순을 밝히기 위하여 형식주의에 젖어 왜곡된 주일성수 전통에 대하여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하면 오히려 교회와 기독교의 근간을 흔드는 방해꾼으로 몰릴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대체적인 실정인 것입니다.

형식주의의 망령은 어제나 오늘이나 참으로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안식일의 형식적 준수, 십일조 드리기, 금식하기 그리고 식사하기 전 손씻기 등 종교적 형식을 준수하는데 탁월했습니다. 그리고 형식적 차원에서 볼 때 도덕적으로도 흠을 잡기 어려운 삶을 살았습니다. 이러한 종교적·도덕적 형식주의가 매우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형식 자체는 모두 좋은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형식을 열심히 지키는 순간 자기기만이라는 무서운 놈이 작동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이라는 내용이 빠진 형식이 얼마나 무서운 악인지를 모르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이 악을 들추어내기 내기 위하여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치열한 전면전을 펼쳤습니다. 굳이 안식일에 병을 고치지 않으셔도 됐지만 예수님은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의 면전에서 보란 듯이 병자들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형식주의 망령을 쫓아내기 위함입니다. 그러다 예수님은 그들의 덫에 걸려 오히려 십자가에 죽고 마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다시 살리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은 형식주의자들에게 철저하게 패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의 가장 무서운 적은 바로 형식주의의 탈을 쓴 내부세력입니다. 많은 교계 지도자들은 주5일 근무제의 실시와 함께 흔들리고 있는 주일성수의 전통이 더욱 약화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양심적 병역거부가 허락되면 젊은이들이 교회로 오지 않고 여호와 증인으로 몰려갈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이는 기독교가 얼마나 내용적으로 허약해졌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더욱 형식을 강화하려는 것처럼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 없습니다. 사람의 깊은 곳을 움직이는 사랑의 복음이 강력히 증거되고 실천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회현장을 알지 못하는 낭만적 탁상공론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사도행전의 사도들은 낭만적 탁상공론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역사는 그들의 편이었음이 증명되었습니다. 우리가 뭘 두려워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한국교회가 다시 살아나려면 교회 안에 깊숙이 침투해 들어온 형식주의 망령을 몰아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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