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그런 것 꼭 해야 해요?", "나 이런 것 없이도 그럭저럭 잘 썼는데", "필요성이나 중요성은 느끼지만 잘 안 돼요", "에이, 나는 그런 것 필요 없어요."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하고, 때로는 투정이다. 귀찮기도 하고, 이런 것 왜 시키나 하는 표정, 간혹 불만도 표출한다. 짜증도 묻어난다. 글쓰기 강좌를 진행하면서, 글쓰기 훈련을 하면서, 첫 단계에 내가 가장 많이 언급하는 글쓰기 기술이면서 가장 안 되고, 저항도 심한 것이 개요 작성이다. 다른 것은 순순히 받아들이는데, 유독 개요만은 거부감이 강하다.

쓴 글을 낭독한 후, 글이 뒤죽박죽이고, 앞뒤가 안 맞고, 전개가 매끄럽지 않고, 주제가 불분명하고, 메시지가 잘 잡히지 않고, 논점이 흐리다 싶으면 대번에 묻는다. "개요 작성하셨어요?" 십중팔구에서 구는 개요를 작성 안 했고, 하나 정도가 하기는 했지만 엉성하다. 실은 했다고 하나 말에 힘이 없는 걸로 봐서 대충했다. 하나 마나다.

그럴 때마다 나는 18번처럼 주지시킨다. "글 잘 못 쓰는 사람은 즉시 컴퓨터부터 켜지만, 글 잘 쓰는 사람은 곧 바로 노트를 펼쳐 개요부터 작성합니다." 내가 아는 유일한 예외는 <태백산맥>의 조정래인데, 그 외에는 모든 작가가 개요를 꼼꼼하게 구성한 다음에 글을 쓴다. 나는 조정래 과라서 개요 따위 없어도 글 쓰는 데 하등 지장 없다는 이가 있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당신은 조정래가 아녜요"라고.

다산 정약용도 어떤 글을 쓰더라도 가장 먼저 개요를 세운 연후라야 시작했다. 정약용처럼 한자가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대학자요 대저술가도 무턱대고 글부터 쓰지 않았다. "선정문목"(先定門目). 글쓰기에 앞서 목차를 먼저 정했다. 글 전체의 그림을 그리고, 가닥을 잡고, 정보를 잘 배치하는 얼개를 마련했다. 그는 한 해의 책읽기에도 나름 계획을 세웠고, 어떤 책도 문목 없이 쓴 책이 없다.

개요는 비단 글쓰기뿐 아니라 말하기에도 퍽 중요하다. 말하기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김미경은 자신의 책, <아트 스피치>(21세기북스)에서 콘텐츠와 에피소드와 함께 설계도의 중요성을 상당히 강조한다. 할 말 못하고, 쓸데없는 말만 하는 것은 설계도를 그리지 않은 탓이다. 하여, "스피치는 3분짜리 자기소개든 1시간짜리 강연이든 무조건 설계부터 해야 한다." 여기서 '3분짜리'와 '무조건'을 허투루 읽고 지나가면 안 된다. 그토록 짧은 말에도 개요가 있다면 글은 더 말해 무엇하리. 군말 말고 개요부터 쓰라.

그럼 개요 작성하라고 협박성 발언도 마다하지 않는가? 간단하다. 쓰고 싶은 것 다 쓰고, 쓰지 말아야 할 것 안 쓰고, 했던 말 또 안 하려면 개요를 피할 수 없다. 애초 글쓰기 전 반드시 이러저러한 내용은 쓰리라 마음먹지만, 막상 쓰고 나면 빠진 것이 보인다. 5개를 쓰려고 했는데 고작 3개밖에 못 썼다. 엉뚱한 말만 잔뜩 늘어놓다가 정작 중요한 말을 안 빼먹으려면 개요 작성은 필수다, 필수.

글 쓰면서 숱하게 경험하는 바는 말이 말을 낳는다는 것이다. 본시 하나님이 하나님을 낳고, 사람이 사람을 낳는 것이니, 말이 말을 낳는다고 해서 하등 이상할 바 아니다. 그러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문장은 가만 보니 벗어나도 한참 벗어났다. 그다지 필요하지 않는 말, 앞에서 한 말을 또 쓰는 일이 자주 벌어진다. 시쳇말로 삼천포로 빠지기 일쑤다. 본래 쓰려던 것에서 한참 동떨어진 딴 이야기만 실컷 하고 있다. 글이 조잡해진다. 산만해서 읽기 어렵다.

개요는 중복과 누락, 오락가락을 방지해 주어서 글 전체의 일관성과 체계를 세워 주고, 균형도 잡아 준다. 서론과 본론, 결론은 각각의 고유한 기능이 있을뿐더러 알맞은 분량이 있기 마련이다. 개요 없이 쓰면 우리나라 사람이 흔히, 초보자가 자주 범하는 실수를 연발한다. 분량으로는 서론이 길어지고 늘어지고, 내용으로는 서론이 본론에서 할 말까지 다해 버리고, 그러다가 결론 쓸 시간이나 공간이 부족하기 일쑤다. 이런 잘못 범하지 않으려면 일목요연한 개요는 필수불가결하다.

하지만 아무리 개요를 작성하고 쓰려고 해도 잘 안 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훈련 부족이다. 이것은 말 그대로 연습하는 수밖에 없다. 몸에 익을 때까지, 그래서 포스트잇에 키워드 몇 자만 메모하고서도 A4 3장 정도의 글은 뚝딱 쓸 수 있을 때까지 갈고 닦아야 한다. 이런 경우는 고상하게 말해서 영감 받은 것에 비견할 수 있을 텐데, 필(feel)은 계시처럼 다가오고, 벼락처럼 내리치는 극히 드문 경험이지 일상적이거나 통상적이지 않다. 그것 기다려 글 쓰려고 한다면, 장담하건대 당신은 평생 글 하나 쓰지 못할 것이다. 당신이 글쓰기를 하는 한, 개요는 반, 드, 시 작성해야 한다.

다른 하나는 콘텐츠 부족이다. 쓸거리가 없으니 개요를 구성하기 어려운 거다. 하고픈 말이 많으면, 수집한 자료나 정보가 넘치면, 챙겨 둔 메모가 쌓이면 개요는 절로 만들어진다. 여기서 콘텐츠는 관점과 정보이다. 관점은 정보를 조직하는 기준이고, 정보는 관점을 강화하는 내용이다. 개요란 본시 그 관점과 정보를 전달하고 소통하기 위한 방편이다. 그런데 콘텐츠가 부족하면 당연히 개요 짜기도 버겁고, 글도 부실해지는 것은 당연지사다. 이런 경우는 아예 글쓰기를 포기하거나, 그럴 수 없다면 당장은 글의 분량을 줄이거나, 장기적으로는 콘텐츠를 빵빵하게 채우는 것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다. 오직 독서다!

한번은 어떤 목사님이 대놓고 싫다 한다. 개요를 작성하지 않겠다 한다. 오히려 내가 하라는 대로 하려고 몇 번 시도했지만 잘 안 되고, 개요에 신경 쓰느라 글이 더 꼬이더란다. 그분에게 물었다.

"목사님, 혹 이웃교회 목사님이 교회를 설계도도 없이 건축한다면 뭐라고 하시겠어요?”
"그런 바보가 어디 있어요."
"그럼 아니, 목사님이 교회를 건축할 때 어떻게 할 건가요?"
"당연히 설계도를 갖고 건축하겠지요."

건축 자체가 불가능할뿐더러 설령 세우더라도 건물이 온전할 리 없다고 답한다. 사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바보이거나, 그가 짓고자 하는 집은 개집이거나 둘 중 하나일 거다.

"글도 마찬가지예요. 예로부터 글짓기라고 했잖아요. 그건 글을 집이라고 본 거지요. 집을 짓듯이 글도 짓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건축에서 설계도의 역할이 글에서는 개요예요."

개요는 마치 여행자에게 지도와 나침반과 같다. 설계도 없이 건축하는 것처럼 어리석다. 그제서야 수긍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크게 복창해 보자. 설계도 없이 집짓기 없다! 개요 없이 글짓기 없다! 개요 없이 글 쓰는 나는 바보다! 개요를 작성하는 나는 글쓰기의 달인의 가능성이 보인다!

글은 집이다. 글짓기는 집짓기다. 개요는 설계도다. 글은 개요, 곧 구성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집이 탄생한다. 글의 성패는 개요에 달려 있다. 해서, 어떤 이는 책을 읽은 시간만큼 생각하라고 했다지만, 나는 말한다. 글을 쓰는 시간만큼 개요 작성에 공을 들이라. 2시간 글을 쓴다면 절반은 뚝딱 잘라서 개요를 완성하는 데 힘을 다하라. 그래야 튼튼하고도 멋진 집을 지을 수 있다. 그리하여 개요는 반석 위에 집을 짓게 한다.

그러므로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다 집을 세우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문장이 부실하고, 정보가 빈약하고, 통찰은 미미해도 무너지지 않는다. 그 글을 개요 위에 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말을 듣고서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문장이 부실하고, 정보가 빈약하고, 통찰이 미미한데다 개요조차 만들지 않았으니 무너지고 만다. 그리고 그 무너짐은 엄청날 것이다.

"글쓰기 사부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니, 무리가 그의 가르침에 놀랐다. 이전에 이토록 개요를 강조한 말을 들어 본 적도 없을뿐더러, 그가 가르친 대로 해 보니 글쓰기가 한결 수월해졌기 때문이다. 무리가 모두 일어나 함께 노래 부른다. '잘 짓고 잘 쓰세 우리 글 잘 쓰세 만세 개요 위에다 우리 글 잘 쓰세'(찬송가 204장 / 379장 후렴)."

김기현 / 부산수정로침례교회 목사·<글쓰는 그리스도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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