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질문.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의 첫 출간 당시 책 제목은?

아니, 그게 원래 제목이 아니었나? 땡! 그렇지 않다. 영어로는 "Whale Done!"이다. '고래가 해냈다'는 뜻인데, 칭찬했더니 고래 같은 동물도 해낼 수 있다면 칭찬의 위력은 얼마나 대단하냐는 말이다. 그걸 번역하면서 출판사는 <You Excellent : 칭찬의 힘>으로 정했다. '당신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그런 칭찬이 실제로 그를 대단하게 만든다는 뜻이리라. 설령 그가 고래 같은 사람이라도 말이다.

그 제목으로 출판사가 예상하고 기대했던 만큼 판매가 신통치 않았던 모양이다. 좀 밋밋하긴 하다. 버리기 아까워 고심하던 끝에 문패를 바꿔 달아 시장에 내놓았다. 완전 대박이었다. 시쳇말로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그 이후로 이 제목을 본뜬 아류 도서들도 줄을 이었다. 칭찬의 파워와 함께 책 제목의 중요성을 출판사와 작가들에게 충분히 각인시킨 일화이다.

제목이 차지하는 비중이 중차대함에도 불구하고 글쓰기 수련생들이 서평과 칼럼을 제출할 때, 제목 없이 내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때마다 내가 후렴처럼 반복해서 읊는 구절이 있다. "제목이 소설의 절반을 결정짓고, 첫 문장이 나머지 절반을 결정짓고, 끝 문장이 그 나머지 절반을 결정짓는다." (<황홀한 글 감옥>, 334) 소설을 글로 교체해도 된다. 문학 동네에서 떠도는 말을 조정래 선생이 전달한 것인데, 이보다 더 제목의 중요성을 말하기 어려우리라.

중요한 만큼 제목 잡기란 녹록하지 않다. 그 어려움을 잘 보여 주는 실화가 있다. 고 장영희 선생은 그의 유작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의 프롤로그에서 제목 짓기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그가 제목에 유달리 관심이 많은 까닭은 제목이야말로 한편으로 가장 짧은 형태로 내용을 요약해 주고, 순전히 제목 때문에 책을 고르는 일이 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번 책만큼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멋들어진 제목을 뽑고 싶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이야기이다.

나도 제목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다. 하나는 처녀작인 <공격적 책읽기>다. 본시 <복음과상황>에 연재할 당시의 제목 그대로 하기로 했다. 하지만 여러 이유로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제목이 너무 공격적이라는 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조금은 감성적이고 감각적으로 정하고 싶었다. 마음은 <바벨론 강가에서>로 하고 싶었다. 뭔가 있어 보이고 참 고상하다. 더군다나 책 읽기의 관점과 정신은 유배된 바벨론 강가의 이스라엘 백성의 세계관이기에 제목으로 어울린다 싶었다.

편집자와 의논하면서 연재와 연속성을 고려하고, 그렇게 독자들이 인식하고 있는 터에 구태여 다른 제목을 달아서 혼선을 일으킬 하등 이유가 없다는 점을 감안했다. 그래서 <공격적 책읽기> 그대로 가기로 했다. 여기서 한 가지 팁을 알려줄까 한다. 책 제목은 저자가 정하는 것으로 흔히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출판사가 결정한다. 단, 편집자와 저자 둘 사이의 관계와 누가 더 파워가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글쓰는 그리스도인>은 편집 회의에 참여해서 책의 차별화한 콘셉트, 대상 독자, 홍보와 판매 전략 등에 대해 토론했다. 애초 출판사에서는 독자층을 20~30대로 보았다. 제목, 표지, 홍보 등을 젊은 층에 맞추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들 못지않게 주 독자는 40대 이상이라고 보았다. 실제로 글을 써야 한다는 외적 압박에 시달리고, 내적 충동에 빠지는 것은 빨라야 30대 후반이다. 직장 생활 적어도 10년차가 되고, 가정에서는 아이들을 어느 정도 키워 놓고, 숨 좀 돌릴 여유가 있는 나이는 40대가 지나야 가능하다. 특히나 내 이름으로 된 책 한 권을 갖고 싶어 하는 연령대는 50대이다.

실제로 청어람아카데미에서 책 한 권 쓰라고, 그러자면 글을 써야 하고, 어떻게 쓰는지를 열강했는데, 20대 후반의 자매의 질문, "왜 자꾸 책 쓰라고 해요?" 내가 부탁받은 강의 제목이 '글쓰기에서 책 쓰기까지'라 그랬다. 책 쓰라는 강의에 반응하는 대다수 청중은 40~50대다. 전라남도 순천에서 열린 출간 기념세미나의 청중은 50대 이상의 주부, 그러니까 여자 집사님과 권사님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반응했다. 그것도 뜨겁게. 명동에 모인 20대가 아니었다.

하여간에 일차 독자가 40대 이상, 그리고 목회자 그룹으로 설정되자 책의 제목은 자연스럽게 보수적인 방향으로 흘렀다. 그래서 좀 밋밋하다 싶게 <글 '잘' 쓰는 그리스도인>으로 정했다. 표지도 덩달아 안정적인 이미지를 선택했다. 그러다가 모든 그리스도인이 글을 써야 한다는 뜻에서 '잘'을 빼고 현재의 제목이 되었다.

책이나 글의 제목은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글의 핵심을 잘 전달하는 정보 전달형이다. 이런 유형의 제목은 내용을 함축적으로 전달하는 것에 초점이 있다. 내 책과 글의 전부가 그렇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감적 책읽기>,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 <가룟 유다 딜레마>, <예배, 인생 최고의 가치>, <만찬, 나를 먹어라>에 이르기까지 모두 책의 핵심 내용을 제목에 담았다. 제목만 보고 얼추 어떤 내용인지, 어떤 관점인지를 가늠할 수 있다.

200여 개의 칼럼을 썼는데 전달형 제목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몇 가지만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기도를 잘 하는 사람이 공부도 잘한다', '일기로 글쓰기를 시작하자', '주보에 칼럼을 쓰자', '묵상가는 독서가다', '공부하려면 선생을 만나라', '기도의 두 극단을 피합시다', '시편으로 기도하자'. 이런 유는 글쓴이가 말하려는 바의 의도와 목적을 정확하게 전달한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진부하고, 흥미가 반감된다. 제목과 내용이 맞아떨어지지 않는 경우를 숱하게 보았다. 그런 점에서 본디 제목은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 일차 목적이므로 무난하다.

이걸 조금 탈피하려고 한 것이 질문으로 제목을 정한 경우다. '신자가 부자여도 되나요?', '신자가 술을 마셔도 되나요?', '언제까지 이미지 타령인가?', '만인 제사장인가, 전 신자 제사장인가?', '제사 때 절해도 되나요?', '담배는 괜찮지 않나요?', '목사님은 유물론자인가요?', '666은 사탄의 숫자인가?', '왜 세상이 변하지 않는가'. 질문형은 충분히 암시하면서도 얼마의 호기심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전달형 제목이면서도 약간 감성적 측면도 담고 있다.

다른 하나는 호기심을 유발하는 감성 자극형 제목이다. 감각적이고 자극적이라는 뜻이다. 내가 지금껏 쓴 글 중에 고작 몇 개가 여기에 해당된다. '아직(yet)인가? 결코(never)인가?', '더 나쁜 기도, 덜 나쁜 기도' 등이다. 앞의 제목은 <마시멜로 이야기>의 서평인데, 몸에 해로운 마시멜로를 참았다가 먹을 것이 아니라 결코 먹어서는 안 된다는 요지의 글이다. 뒤의 제목은 브루스 윌킨슨의 <야베스의 기도>와 전병욱의 <히스기야 기도>를 리처드 포스터의 <기도>에 비추어 읽은 것으로, 앞의 책은 더 나쁜 기도이고 뒤의 것은 그나마 덜 나쁘다는 뜻에서 그렇게 제목을 붙였다. 그러니까 앞의 제목이 감각적이라면, 뒤의 것은 뭔가 도발하는 자극적인 제목이다.

'불륜으로 주문하세요'라는 글은 로고스서원에서 대박 난 글이었다. 제목 자체가 이보다 더 선정적일 수 없다. 내용인즉슨, 식당에서 부부인지 불륜인지 알아볼 수 있는 징후가 몇 가지 있는데 부부와 달리 상당히 친밀하면 불륜 관계라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어느 목사님이 부부끼리도 마치 불륜처럼 친밀하라는 뜻에서 식당에서 이 말을 했다고 했다. 제목을 이렇게 지으면 절반 이상을 먹고 들어간다. 안 읽으려야 안 읽을 수 없이 궁금하다. 독자의 흥미를 유발해서 읽게끔 만드는 것이 좋은 제목의 요건이다.

제목을 잘 잡기 위해서는 글의 핵심을 본인 스스로 잘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다. 지금 내 서재에 있는 책의 8할에서 9할이 핵심을 제목으로 정한 것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영희의 푸념마따나 눈에 번쩍 뜨일 만한 멋진 제목을 글의 문패로 달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장영희의 선택에서 보듯 정보 전달형이 우선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먼저 제목을 내용 전달형 방식으로 하는 훈련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러자면 자신의 글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것을 제목으로 삼는다.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 선명한 이해가 있다면, 글의 흐름이 자연스럽고 구조가 탄탄하고 요지가 분명하다. 동시에 소통과 전달도 별다른 문제가 없을 것이다. 글의 제목에 글에 쏟는 에너지 절반 이상을 쏟아라. 자신이 말하려는 바를 한 문장으로 표현하는 훈련을 하라. 글의 제목이 글의 절반이라는 것을 결코 잊지 마라. 그러니 제목에 목숨을 걸어라.

김기현 / 부산수정로침례교회 목사 · <글쓰는 그리스도인> 저자 (www.logosschoo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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