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두를 작성하는 방법 중 가장 세련된 것이 인용구를 이용한 방식이다. (중략) 그래서 능숙한 필자일수록 인용구를 적절히 이용한다." (<글쓰기의 전략> 중에서)

솔직히 말해 <글쓰기의 전략> 저자 정희모의 말에 흔쾌히 동의가 안 된다. 인용으로 글의 처음을 장식하는 것은 세련된 것인지도 의문일뿐더러 그리 추천할 만한 테크닉이 아닌 때문이다. 인용으로 글을 여는 것은 쉽지 않다. 물론 그의 말마따나 탁월한 글쟁이라면 인용을 잘 사용할 줄 안다. 이 말은 하나마나한 소리다. 능숙한 필자이니까 인용을 능수능란하게 잘 할 것이고, 인용을 잘 하니까 능숙한 필자일 테니까 말이다.

실은 서론을 인용으로 시작하는 것을 나는 꺼려한다. 잘못 사용하면 세련은커녕 촌스럽고 진부하기 짝이 없는 글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서두의 인용은 쓰려는 내용과 주제, 주장을 암시하거나 본론에서 말하려는 것들로 편안하게, 자연스럽게 이어 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인용은 좋지만 내용과는 거리가 멀거나 연결이 부자연스러운 경우가 많다. 때문에 나는 되도록 인용구로 시작하는 것을 가급적 피하는 게 좋다고 본다. 하지만 서론을 장식하는 방식이므로 기피가 능사는 아니다. 사용할 것이냐, 말 것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잘 이용할 것인가가 초점이다.

글쓰기 학교 수련생들의 글 몇 개를 통해 인용으로 시작하는 방법과 유의할 점을 살펴볼까 한다. 헨리 나우웬의 <상처 입은 치유자>(두란노)에 대한 서평에서 뽑아 보았다. '목회는 환대다'라는 제목의 글 서두이다.

"모든 이들을 위해 존재하고 싶어 하는 목회자들이 더러 그 누구에게도 친밀하지 못하다는 것은 엄청난 역설입니다."

'환대'라는 키워드로 이 책을 읽기로 작정했다면, 환대와 관련된 글로 인용을 해야 한다. 환대에 관해 자신이 가장 공감하면서도, 나우웬의 생각을 가장 잘 담아 내고, 그것을 지렛대로 삼아 서평자의 생각을 잘 표현하고 글을 이어 갈 수 있는 문장을 뽑아야 한다.

그러나 위의 인용문은 환대보다는 목회자의 내적 상처와 역설에 관한 것이다. 나우웬은 바로 우리를 붕괴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에서 시작해서 타인을 도울 수 있다는 혜안을 열어 준다. 자신의 상처를 환대하는 자가 곧 타인의 상처를 받아들여 편안히 쉴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환대를 말했던 것이다. 하여, 위 인용문은 환대와 연결할 수도 있지만, 앞서 말한 대로 보다 직접적인 구절을 골라내야 한다. 또 하나의 예를 보도록 하자.

"우리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사람들이기에 사랑할 수 있으며, 우리의 삶이 선물로 주어진 것이기에 우리도 줄 수 있고, 우리의 마음보다 훨씬 더 큰 마음을 가지신 분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기에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 경험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하 생략)(123쪽)

위의 글의 제목은 '상처보다 깊은 사랑을 너에게'이다. 일단, 인용문의 길이가 너무 길다. 글쓴이가 인용한 것의 절반만 옮겨 적었다. 원고지 10매가 채 안 되는 짧은 글에서 2매가 인용문이다. 전체에서 1/5를 차지하는 셈인데 균형이 맞지 않다. 인용문은 간혹 양을 채우기 위한 방편으로 활용된다. 하지만 그것도 요령껏 해야지 이렇게 많으면 어지간히 할 말이 없는가 보다는 인상을 심어 주기 딱 좋다.

하지만 글의 서두에 알맞은 인용이다. 무엇보다도 주제와 부합한다. <상처 입은 치유자>는 고통을 부정하거나 회피함으로써가 아니라 고통을 통해서만 고통을 이길 수 있으며, 그 고통에서 사명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자신의 고통을 환대하기 즉, 우리 삶에 불가피하지만, 그것을 사랑할 때, 고통은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들까지도 치유하는 원천이 될 수 있다. 하여, 책을 잘 읽어 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잘 표현하는 구절을 선택하여 여는 말을 시작했으니 서두에 알맞다.

이번에는 내 글 차례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세련된 서론의 첫 문장 쓰기 기술을 기피했다. 그간 내가 지은 책을 죽 훑어 보았더니 고작 두 군데 정도다. 각 책에서 적어도 10개에서 20개 이상의 장(chapter)이 있으니 서론은 하다못해 90개에서 많게는 150개가 족히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인용한 것은 그보다 열배나 더 많을 텐데 서두를 인용으로 시작한 것이 겨우 그 정도이다.

그 두 개가 <만찬, 나를 먹으라>의 5장, '만찬은 대접입니다'를 영접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요한복음 1장 12절로 시작한 것이 그 하나이다. 만찬은 식사를 대접한다는 것이 요체인 글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영접, 곧 대접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또한 우리가 그분을 환영하기 이전에 그분이 먼저 우리를 환대해 주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예수님의 식탁이었다는 것이 골자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성경 인용은 주제와 상응한다. 하여, 내 스스로 평가하자면 그럭저럭 무난하다. 그러나 잘했다고 하지 않고 무난하다고 말한 것은 신선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에 무슨 말할지 뻔히 들여다보이는, 패를 다 내보여서 수를 들킨 것과 다를 바 없다.

다른 하나는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의 4장 '항의하라'를 피터 크리프트의 말로 시작한 것이다. "이제 내게 가장 소름끼치는 비밀을 털어 놓을까 한다. 나는 때때로 하나님에게 몹시 화가 난다. 특히 그분이 내가 아프도록 내버려둘 때가 그렇다. 내가 생각하기로, 기독교를 믿는 거의 모든 이들, (중략) 특별히 복음주의자들과 근본주의자들에게는 공공연한 비밀이다.(이하 생략)"

이건 마음에 든다. 그곳에서 말하려는 바와 일치하거니와 크리프트의 문장도 좋고, 기존의 상식을 깨고 허를 찌르는 의의성도 있다. 통상 신앙이란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 우리와 달리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람들, 역사적인 하나님의 증인들은 하나님께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대들고 따지고 시비를 걸기 일쑤다. 불평하고 항의하고 거친 태클은 예삿일이다. 그 자체도 신앙의 모습이거니와 최종 목적지는 포용에 있다. 그러니 꽤나 괜찮은 시작이다.

지금껏 서론을 인용으로 시작하고, 글을 전개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는 것에 관해 설명했다. 그러나 인용에 관해서는 설명할 것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인용하는 방법, 인용하는 이유, 인용의 원칙 등이다. 이는 다음 본문에서 인용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다루겠다. 여하튼, 인용은 세련된 서론 쓰기 방식이지만 그만큼 훈련과 연습이 많이 필요하다.

인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좋은 글귀를 많이 알고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진부하기 짝이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인용구가 되기 십상이다. 훈련과 함께 독서를 많이 하는 것, 그것이 인용으로 글을 시작하는 세련된 서두를 쓰는 지름길이다. 뭘 알아야 인용하지 않겠나. 인용할 거리를 많이 만들라. 그것이 서론을 인용으로 시작하는 방법에 대한 나의 최종적인 말이다.

김기현 / 부산수정로침례교회 목사 · <글쓰는 그리스도인> 저자 (www.logosschoo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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