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위한 심판 예언은 하지 않는다

이단들의 특색은 성경을 자기 입맛에 맞게 짜 맞추는 데 있지요. 이는 여호와의 증인들도 그렇고, 요즘 활개 치고 있는 신천지도 그렇지요. 우리는 이단에 대비하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나 자신이 깨어 있는 신앙인으로 살기 위해서라도 성경을 종합적으로 살필 이유가 있습니다.

이른바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빌립보서 4장 13절 말씀을 굳게 신봉하지요. 또 "내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하는 욥기서 8장 7절의 말씀을 부여잡고 살아가지요. 그렇지만 그 한 구절만을 신주 단지처럼 믿고 살아갈 게 아니라, 언제나 그 전체의 내용을 꿰뚫고 사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에만 어려움 앞에 봉착해도 능히 이겨 낼 수 있는 까닭이지요.

바울은 빌립보서 4장 13절 말씀 앞에서,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모든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하여,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는 인생의 모든 비결을 배웠노라고 고백합니다. 비로소 그때에라야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다고 고백한 것이지요. 아울러 욥도 욥기서 8장 7절의 고백이 있기 전에, 자식들이 죽고 가정이 풍비박산 나는 상황을 겪지 않습니까? 그런 여건과 상황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참된 신앙인으로 우뚝 설 수 있는 것이지요.

심판이나 재앙, 그리고 종말론에 관한 말씀도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심판과 재앙과 종말에 대해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위한 심판의 예언을 하거나, 재앙을 위한 재앙의 예언을 말씀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죽이고 파멸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심판과 재앙을 이야기한 게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을 바로 세우시려고, 겸손한 인간으로 살게 하시려고 그 같은 예언과 재앙을 말씀한 것이지요.

그런 전체적인 이해를 갖고 있을 때에라야 종말론자들이 이야기하는 예언에 현혹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늘 기근과 지진을 이야기하고,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이야기하며, 종말을 선동하고 공포를 조장하지요. 그럴 때일수록 성경의 종합적인 예언의 관점을 지니고 있을 때에야, 우리는 흔들리지 않고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바르고 지혜롭게 대비하며 살 수가 있지요.

안디옥 교회와 바나바

안디옥 교회는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누가 나서거나 누군가 주도해서 세운 게 아니었지요. 예루살렘 성전 관계자들이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고, 그 일로 촉발된 초대 교회의 박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과 유대 땅을 넘어 안디옥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누군지, 그들의 직업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지만, 그들은 한 마음으로 유대인은 물론이고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로 인해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하였고, 주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그 일로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바나바를 파송하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전부터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났지만, 바나바의 파송으로 인해 그 교회가 폭발적으로 부흥하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파송받은 바나바를 중심으로 모든 교우들이 주님의 뜻을 받드는 데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바나바는 어느 한쪽에 치우침이 없는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층만 좋아하는 게 아니었고,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또 내친 바나바가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자기를 이롭게 하는 일에만 신경을 곤두세운 바나바가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바나바는 유대인만을 향한 바나바가 아니라 이방인들도 품고 나아갔던 바나바였습니다. 그것이 중심을 지키고 나아갔던 바나바의 참모습이자, 착한 사람의 모습이지요.

바나바는 또 성령이 충만한 자였습니다. 물론 바나바가 성령이 충만하다고 하여, 그가 무슨 병자를 고치거나, 능력을 행하거나, 천하에 큰 난리가 있을 것이란 예언 같은 것도 한 적이 없습니다. 그저 바나바는 자기 땅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께 내어 놓았던 겸손한 청지기였습니다. 더욱이 그는 모두가 바울을 내치려 할 때 자신이 나서서 바울을 인정해 주고 격려해 줬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선교 여행에서 다른 핑계를 대며 떠나 버린 요한 마가에게 다시금 기회를 줬던 사람입니다. 그것이 성령 충만한 바나바의 참모습입니다.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그렇듯 무슨 능력을 행하고, 방언을 말하고, 신비로운 역사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자기 본분을 지키며, 언제나 겸손하며, 누군가의 연약함을 도우며, 실의에 빠진 자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사람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자기 신앙의 관점으로 누군가를 판단하고 정죄하며 심판하는 입장의 사람이 아니라 언제나 낮은 자리에서 누군가를 섬기며 사랑하는 자임을 알 수 있지요.

그리고 바나바는 믿음이 충만한 자였습니다. 믿음이란 곧 신실, 정직으로서, 하나님을 믿는 그 자세 그대로 세상 속에 신실한 삶으로, 정직한 삶으로 드러내는 것을 뜻합니다. 믿음이 있다면서, 세상 속의 거짓과 불의를 탐하는 자라면 결코 믿음 있는 사람이 아니겠지요. 우리의 믿음은 결코 교회 안에서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바나바는 그만큼 세상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인정받는 삶을 사는 자였습니다.

안디옥 교회 교우들이 크리스천으로 불린 까닭

안디옥 교회가 그렇게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세워졌고, 또 올곧고 성령이 충만하고 믿음이 충만한 바나바의 주도록 주님의 뜻을 받들 때에 더 많은 무리들이 주님께로 나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으로 바나바가 한계를 느꼈는지, 그 많은 무리들을 주님께로 더 바르게 인도하려며 한 사람의 지도자가 필요하다 싶어서, 다소에 있는 사울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와 함께 안디옥 교회를 함께 이끌고, 가르치고, 또 주도해 나갔는데, 그들 두 사람은 다른 교우들과 함께 주님의 생명과 진리의 뜻을 펼쳐 나갔습니다.

그 당시에도 물론 세상의 흐름과 방식이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의 성공이라는 화두, 세상의 경제 법칙이라는 화두, 세상의 조직이라는 화두가 그것이지요. 이를테면 성공한 사람들과 가진 자들이 이 세상의 조직을 이끌어 가듯이, 교회도 그래야 한다는 생각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바나바와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진리의 논리로 세상의 흐름을 차단했습니다. 이른바 안디옥 교회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두가 주님 뜻을 받드는 교회로 세워 나갔고,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가릴 것 없이 모두가 사랑하고 품는 교회로 발돋움했던 것입니다.

그런 역할에 충실했을 때에, 그 교회는 그리스도인이란 칭함, 크리스천이란 칭함을, 세상 사람들로부터 받게 되었지요. 모름지기 크리스천이란 예수의 뜻을 따르는 자들을 일컫습니다. 그때 당시 예수의 뜻이 무엇이었습니까? 세상의 정치나 경제 논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과 진리의 논리를 추구하는 삶이었지요. 그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3년 동안 데리고 다녔던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급기야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을 살리고,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부어 주기 위해, 당신 생명을 십자가에 내놓았던 것이지요.

안디옥 교회 교우들이 크리스천으로 불렸던 까닭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가치 논리로 교회를 이끌어 가지 않았습니다. 가진 자들과 가지지 못한 자들로 편 가르기 한 게 아닙니다. 혈연과 학연과 지연에 따라 교회 교우들을 분리시키지 않았습니다. 식자층과 무식자층으로,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따로 구분한 것도 없었습니다. 세상의 중심부에 위치한 사람들에게 교회의 중심부를 맡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바나바나 바울의 뜻만을 하나님의 뜻으로 고집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 모두는 각자 각자가 참된 제사장이 되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진리를 받드는 교회를 일구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그 모습을 교회 안에서만 행한 게 아니라 안디옥이라는 그 주변 일터와 동네와 삶의 터전 위에 펼쳤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크리스천으로 불리게 한 이유입니다.

그것은 오늘을 사는 한국교회도, 한국 성결교회도, 그리고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는 어떠한 경우에도 세상의 정치나 경제 논리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생명과 진리를 받들고 세우는 교회여야 합니다. 혈연이나 학연이나 지연에 따라 나누는 일도 없이,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두를 품고 사랑하는 교회여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 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 세상으로 확대되어야 합니다. 그때에만 우리들도 각자각자 세상 속에서 제사장으로, 참된 크리스천으로 불리게 될 것입니다.

사실 한국교회의 크리스천 수가 옛날에는 1,200만 명이지 않았습니까? 국민의 4분의 1이 크리스천으로 불렸지요. 하지만 최근 통계에 의하면 650만 정도로 추산됩니다. 그런데 더 심층적으로 분류해 봤을 때, 그 가운데 누가 참된 크리스천으로 불릴 수 있겠습니까? 그 가운데 안디옥 교회 교우들처럼 세상의 논리가 아니라, 예수의 생명과 진리의 논리를 받들고 세워 나가는 크리스천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그렇기에 아무리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교회라 할지라도, 아무리 큰 수를 자랑하는 대형 교회라 할지라도, 그것이 중요한 아니라 그 속에 예수의 생명과 진리가 담겨 있는가 하는 게 중요하지요. 비록 예루살렘 교회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교회였지만, 안디옥 교회는 비록 신생된 1년의 교회였습니다. 그렇지만 세상의 칭송과 평가는 안디옥 교회를 향해 있었지요. 안디옥 교회의 교우들이야말로 참된 크리스천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우리들 역시 그런 교회를 지향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성령님의 흉년 예언은 공포나 선동을 조장하는 게 아니다

오늘 본문은 안디옥 교회가 행한 또 다른 아름다운 일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이른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예루살렘 교회에 안디옥 교회가 부조를 보낸 일입니다. 그런데 그 전에 우리가 본문 27-28절을 통해 눈여겨봐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그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여기에서 아가보라 하는 사람은 그 이름이 히브리식으로 되어 있어서, 유대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를 일컬어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칭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구약의 두루마리 성경만 있던 때요, 그 당시의 선지자들을 보통 예언자로 칭했지요. 아가보도 그러한 선지자 곧 예언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성령에 의해 전 세계적으로 큰 흉년, 곧 기근이 있을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런데 언제인지는 밝히 말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가 한 예언이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성취되었다고 밝혀 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녀가 글라우디오 때에 세계적인 흉년이 들 것이라 이야기 한 게 아니라, 언젠가 세계적으로 큰 흉년이 들 것이라 예언했고, 그것이 글라우디오의 어느 재임 기간에 맞아 떨어지게 된 것이지요.

무엇을 생각토록 해 줍니까? 그때도 신약 성경이 쓰여 있지 않는 때임을 감안한다면, 구약 성경의 예언자 시대를 연상케 해 줍니다. 구약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은 어느 특정한 사건을 제외한 대부분의 예언을 예방과 대책을 세우라는 뜻으로 예언을 했습니다. 노아의 홍수나, 남유다의 분열이나, 바벨론 포로와 같은 대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분명 하나님께서 어느 특정한 날에 그것을 이루시겠다고 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다는 것을 경고하신 차원입니다. 그들을 심판하기 위해 선동하거나 공포를 조장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회개할 시간과 기간을 주신 것이지요. 그런데도 말을 듣지 않았기에 그들을 쓸어 러버리고 나라를 찢고 포로가 되게 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그 날들은 인간의 예언으로 정해진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날에 이루어진 것이구요.

아가보의 흉년 예언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가보가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 세계적인 흉년이 들 것이란 예언을 했다고 해서, 아가보를 떠받들 이유는 없지요. 더욱이 그날이 언제일까 하는 것에 촉각을 세우기보다, 왜 그 같은 예언이 성령님으로부터 임했는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왜 성령님께서는 아가보의 입술을 빌려, 그 같은 세계적인 흉년을 이야기하셨던 것일까요? 그리고 그 흉년 예언은 왜 글라우디오 때에 이루어졌을까요? 그것은 로마의 황제 글라우디오의 통치 시대를 알면 답을 얻을 수 있겠지요.

글라우디오는 A.D. 41년경에 로마 황제에 등극한 '클라우디우스'를 일컫습니다. 그가 황제의 반열에 오른 것은 뜻밖의 일이었지요. 그 선왕인 칼라굴라 황제가 암살을 당하자 졸지에 그가 왕위에 오른 것입니다. 그때로부터 A.D. 54년까지 13년 동안 로마를 이끈 그는 놀랍게도 뇌성마비, 절름발이, 간질환자 증세가 있는 황제로 전해집니다. 도저히 한 나라와 세계 역사를 주도면밀하게 이끌 황제는 아니었던 것이죠.

그런데도 그는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고 집안 대리인들을 시켜서 제국의 기틀을 다졌고, 로마 출신들이 아닌 노예 계급의 사람들도 해방시켜서 정치에 참여토록 했고, 도로와 수로를 건설하는 사회 인프라로 많이 확충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지요. 그래서 대외적으로는 브리타니아 남부와 트리키아 왕국을 병합했고, 유대를 속국으로 만들어 동방 교역로를 장악했던, 그야말로 위대한 업적을 남긴 황제로 평가받습니다. 자신의 연약한 질병과 난관들을 뚫고 인생사에 승리를 가져온 클라우디우스였던 것이지요.

바로 그런 상황 때에 하나님께서 세계적인 흉년을 실행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자기 능력으로 모든 세계를 장악하고, 엄청난 사회 인프라를 구축하고, 동방 교역로를 주도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천재지변 앞에 인간은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음을 일깨워 주기 위함입니다. 그만큼 인간은 모든 인간 위에 군림한다 할지라도, 늘 하늘 아래의 인간임을 잊지 말도록 해 주기 위해서, 그 같은 흉년을 허락하신 것이지요.

놀라운 것은 그다음에 있습니다. 아가보의 흉년 예언이 글라우디오 때에 성취되어 유대 땅에 흉년이 임했을 때, 안디옥 교회가 어떻게 대처하는지 말이지요. 본문 29-30절입니다.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안디옥 교회는 유대 땅에 흉년이 임했을 때, 그들 각자가 힘을 모아 유대에 있는 주님의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냈다고 밝혀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부조'를 표준새번역 성경에서는 '구제 헌금'이라고 기록해 주고 있는데, 부조 앞에 쓰여 있는 각주를 보면 그것을 '봉사'로 도 읽을 수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지요.

더욱이 '부조'로 번역된 헬라어 '디아코니아'(diakonia)는 '봉사'와 '섬김'을 뜻하기도 하지요. 그런 점에서 볼 때 안디옥 교회는 흉년을 맞이한 예루살렘 교회에 각자의 뜻을 모아 구제헌금을 보냈는데, 그것을 주를 향한 봉사와 섬김으로 여기고 보냈던 것이지요.

성령의 심판 예언 앞에 인간의 지혜로운 대비

이상과 같은 사건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 어떤 사람이 성령으로 무서운 흉년과 심판과 멸망을 예언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인간을 죽이고 파멸케 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더 바른 인간, 더 겸손한 인간으로 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속뜻이 있습니다.

로마가 세계를 다스리던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에 하나님께서 흉년을 일으킨 것은 인간이 모든 역사를 주관하는 게 아니라,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계심을 일깨워 주기 위함입니다. 인간은 또 다른 인간 위에 군림하고 다스릴 존재가 아니라 하늘 아래 겸손하게 살아야 할 존재임을 바르게 세워 주기 위함입니다.

아울러 그 누가 위대한 예언을 한다 할지라도, 그 날짜와 시간까지 예언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군가 나서서 성령님의 음성이라며 예수님의 재림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한 성경에 이미 기록돼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누군가 나서서 성령님의 음성이라며 그 날짜와 시간까지 밝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이단이거나, 거짓 영에 잡힌 사람으로 단정하면 됩니다. 오직 그 날이 있음을 믿고 깨어 있는 신앙인으로 살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마 24:36-42)

또 하나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성령님의 예언 앞에 인간이 행한 대처에 있습니다. 흉년이라는 예언이 유대 땅에 성취되었을 때에, 안디옥 교회가 행한 것은 그들을 향한 봉사와 섬김이었습니다.

물론 로마의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유대인들에게 당근 정책을 펼쳤을 것이 분명합니다. 흉년을 맞이한 유대 백성들에게 세금도 감해 주고, 돈을 저리로 빌려 주기도 하고, 여러 좋은 정책들을 펼쳤을 것입니다. 그래야만 오래도록 식민지 백성으로 유대인들을 묶어 둘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그것이 유대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초대 교회 교우들은 유대인들로부터 지탄과 멸시를 받는 대상이었기 때문이지요. 누가 감히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그런 호의적인 정책을 펼쳤겠습니까? 당연히 유대 교우들은 더 심한 기근과 굶주림에 처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바로 그때 안디옥 교회가 나서서 각자 힘을 모아, 그들에게 구제 헌금을 보냈던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각자가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았지만, 그들은 그 일을 사람을 돕고 구제하는 일로 여기기보다, 오직 주님을 향한 봉사와 섬김으로 여겼습니다.

그렇기에 누군가 대재앙을 예언한다 할지라도, 누군가 천하의 흉년 같은 예언을 한다 할지라도 거기에 현혹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들을 두려워하거나 그들을 떠받들 필요가 없습니다. 이스라엘과 붙어 있는 중동에서 3차 전쟁이 일어나고, 그것이 설령 아마겟돈 전쟁과 연관돼 있다 해도, 우리는 두려워할 게 없습니다.

다만 그런 예언은 성경의 흐름 속에 있는 것이기에, 그런 예언을 한다 할지라도 언제나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겸손한 피조물로, 늘 정직하고 바른 인간으로 살아가면 됩니다. 아울러 그 피해의 진원지가 우리에게 일어난다면, 그 일로 인해 나와 가족들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그땐 그날을 천국으로 입성하는 날로 여기면 될 것입니다.

그 피해가 나와 가까운 지역에 일어났다면, 우리는 안디옥 교회처럼 그들을 향해 긍휼어린 마음으로 품고 뜻을 모아 부조를 보내면 될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께 향한 참된 봉사와 섬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보다 아름답고 지혜롭게 대비하는 길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 25:34-40)

언제 어떤 상황 속에서도 겸손하고 지혜로운 신앙인으로 살자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시대는 예수의 부활과 하늘 승천 이후의 성령님의 시대입니다. 성령님이 역사하는 시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2천 년 전 역사하신 성령의 바람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유럽과 미국을 거쳐, 한국에 왔고, 이제는 다시금 백투더 예루살렘으로 몰아갈 것이라 예견합니다.

그리고 3차 전쟁이 중동의 화약고에서 일어날 것이라 예견합니다. 그것이 곧이어 아마겟돈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고, 곡과 마곡의 전쟁으로 치닫게 될 것이라고 예견합니다. 또한 짐승의 표가 예전에는 컴퓨터에 찍히는 바코드라 예언했고, 이제는 그것이 머잖아 사람의 이마에 넣는 칩이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러나 그런 예언들은 이미 성경에 다 나와 있는 예언들입니다. 다만 앞으로의 시대에 맞게 재해석될 뿐인데, 문제는 그것들이 다 맞지 않다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2천 년 전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에도 세계적인 흉년이 임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종말론자들은 주님의 재림이 가까우면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고, 난리와 난리의 소문이 있을 것이며, 주님의 재림이 금방이라도 일어날 듯, 선동하고 공포를 조장하지요.

그러나 여러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님의 예언은 성경에 다 기록돼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역사적인 대사건이든 사소한 사건이든, 오늘날의 시대에 맞게 재변형되어 나타날 뿐입니다. 그 같은 예언 앞에 주눅 들거나, 기죽거나, 그 예언을 하는 사람들을 떠받들고 맹신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슨 교주로 삼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 같은 일들은 어느 시대에든 일어나는 일들일 수 있기에, 오늘 우리가 사는 내 코앞의 현장에 닥쳐 올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뜻에서 우리는 늘 생명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 내가 내 생명을 점하고 좌지우지하는 교만한 인간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어떤 사람들 앞에서도 겸손하게 사는 크리스천으로 사는 것 말이지요.

아울러 그런 지진과 기근과 난리가 내 코앞에 일어났다면, 그때 우리는 그날을 천국으로 입성하는 날로 삼으면 될 일입니다.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여하시는 구원의 확신을 갖고 살아야 하겠지요. 다만 그 지진과 기근과 난리가 우리 옆이나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다면, 우리는 그들을 향한 아낌없는 지원과 원조를 보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을 돕고 부조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실은 주님을 향한 봉사와 섬김이요, 하늘 하나님께 행하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그것보다 지혜롭게 살아가는 신앙인이 어디에 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하나님

천하를 호령하는 황제라도 코앞에 닥쳐오는 재앙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능력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죽음을 비껴 갈 수는 없습니다.
어떤 직책,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라도 늘 겸손한 피조물로 살게 하시옵소서.
성령께서 주도하시는 이 역사 속에서 많은 크리스천들과 이단들이
성령님을 빙자하여 예언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깨우친 바 있듯이,
성령님의 심판과 저주의 예언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었습니다.
성령님은 무서운 공포를 조장하는 분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교만하고 패악한 인간들을 바로 세우시려는 게 참된 본심이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앞에 겸손한 신앙인으로 살기 원합니다.
설령 하나님 아버지께서 정하신 심판과 멸망의 때가 내게 임한다면,
우리는 그날을 천국으로 입성하는 날로 삼기 원합니다.
그 재앙과 심판이 내가 아는 사람들과 가까운 이국땅에 일어난다면,
그들을 향한 봉사와 섬김의 부조를 보내게 하시옵소서.
그것이 하나님을 향해 바르게 섬기는 삶이요,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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