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은 전라남도 신안군 지도읍 금출동(金出洞)이다. 내가 태어난 이래 시골 동네에 금덩어리가 나왔다는 소식은 여태 듣지 못했다. 혹시 금과 같은 특출한 인물이라도 나오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 이름을 짓지는 않았을까.

1971년도에 태어난 나도 그렇지만, 유년 시절을 촌구석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동네 곳곳을 놀이터나 운동장으로 삼았을 것이다. 딱히 놀 곳도 없고 운동장도 하나 없던 우리들은 동네 앞 산소나 논바닥에서 공도 차고 야구도 했다. 어쩌다 동네 앞 산소 주인인 용휘네 엄마가 몽둥이를 들고 좇아오면 다리가 부러지지 않을 정도로 줄행랑을 쳤다.

그때는 책이고 뭐고 눈에 들어온 게 없었다. 종잇장을 보면 죄다 딱지치기로 썼던 까닭이다. 옆집 승권이네 집 너른 마당에서는 오징어 놀이를 즐겨 했고, 동네 중간 지점에 서 있던 전봇대 아래에서는 모두들 나이 먹기 살이에 열을 냈다. 왜 그땐 나이를 먹고 싶어 했을까. 또 시간이 나면 모두들 들판으로 나가 돌과 흙을 짓이겨 집을 지었고, 그 위에 부뚜막을 얹어 쌀과 보리를 구워먹곤 했다. 참 재밌는 추억거리다.

지금도 시골에 가면 밤하늘의 별들이 초롱초롱 맑고 빛난다. 그 시절 한밤중에는 아름다운 별빛을 감상하기보단 죽기 살기로 간첩살이에 열중했다. 쫓는 쪽은 남쪽, 쫓기는 쪽이 늘 북쪽이었다. 언제까지 끝낸다는 것도 없이 제풀에 지치면 다들 알아서 집으로 갔다. 어디 그뿐이랴. 가을철 밤중에는 옆집 윤국이네 담벼락을 넘으며 무화과를 줄기차게 따먹었고, 겨울철 한밤중에는 처마 밑에 잠들어 있는 참새들을 잡아 구워 먹곤 하지 않았던가.

내가 살던 촌구석에 언제쯤 교회가 들어섰을까. 이마도 내 기억 속엔 초등학교 3학년 즈음이지 싶다. 마을 회관을 빌려 교회당으로 쓰고 있던 최인창 전도사님은 우리들에게 맛있는 과자랑 재미난 연극을 보여 줬다. 장작 나무를 때던 난로에 고구마를 구워 먹던 그 맛도 무엇보다 일품이었다.

그때 교회에 나간 것은 단순한 출석이었다. 그저 먹을 것과 재미난 것에 휩쓸려 다닌 때였다. 그런 내가 십자가 진 예수와 부활자 되신 예수를 만난 건 중학교 2학년 무렵이다. 전라남도 영암에 있는 월출산으로 수련회를 갔는데, 그곳에서 그분의 영적 실체를 만난 것이다.

물론 지금 생각해 보면 맹목적인 신비에 매달린 꼴이었다. 신비로운 체험 하나에 온 생애를 걸었기 때문이다. 기도라는 것도 불공을 드리듯 내 욕심만 아뢰는 수준이었고, 그 당시 주로 들은 설교들도 종말론과 재림론이 주를 이뤘다. 당연히 이 땅의 현실 구원보다 저 세상의 영원 구원에만 치중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한 사건이 있다. 그 시절 함께 다니던 교회 사람들이 우리 옆집 명관이네 집을 찾아가 이단 추방 대회를 연 것이다. 명관이는 그때 어딘가 나가고 없었고, 덕룡이 형이랑 그 위에 형도 도시로 나간 지 오래라, 그 집엔 명관이 할아버지랑 할머니가 살 뿐이었다. 우리들은 나이 많은 그분들을 찾아가 연신 두들겨 패듯이 온갖 욕설들을 퍼부어 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짓이었다. 그런데도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교회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하기에 바빴다. 그것이 마치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일인 줄만 알았던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한때 내 몸이 아파 경기도 양평에 있는 구국성지기도원에 갔다. 그곳에서 한 달간 살면서 성경도 읽었고, 사흘 금식도 했다. 성경을 읽는 동안 코끝에서 스며드는 꿀맛도 느꼈고, 육체로부터 내 영혼이 이탈하여 방 천장을 도는 체험도 했다. 천상의 언어라 일컫는 방언을 비롯해 여러 가지 신비로움에 탐닉했다.

그때까지의 내 인생 속에 아쉬움이 남는 건 그것이다. 군대에 가기까지 기억나는 책이 한 권도 없다는 것이다. 진짜로 책 한 권도 읽지 않은 건 아니었을까. 기억나는 건 오로지 성경뿐이니, 무슨 생각이나 사유를 했겠는가. 누군가 김대중 대통령이 내가 살던 섬마을 출신이란 걸 이야기했다면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내 위의 형들이라도 책을 권해 줬다면 훨씬 달라지지 않았을까. 나를 가르친 선생님들 가운데 누구도 김대중 대통령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내 형들도 아버지의 이른 죽음으로 일찌감치 도시로 살 길을 찾아 나갔으니, 내게 책을 권해 줄 리는 만무했다.

▲ <나만의 공간> / 황인숙 지음 / 개마고원 펴냄.
진중권은 <나만의 공간>에서 어린 시절 아버지가 개척 교회 목사였지만 이층 다락방에서 잡다한 책들을 무수히 읽었다고 했다. 주원규도 <황홀하거나 불량하거나>에서 중·고등학생 시절부터 불량 학생들과 어울리며 담배와 술을 벗했지만 책은 그 품을 떠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들이 책과 벗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누구보다도 치열한 신앙생활을 했을 것은 틀림없다. 맹목적인 신비를 좇는 것보다 조금은 합리적인 신앙생활이지 않았을까 싶다. 내게 안타까운 건 그것이다. 스무 살 전까지의 내 기억 속에 떠오르는 책이 한 권도 없다는 것이다.

부러운 것도 당연히 그것이다. 어린 시절에 많은 책을 읽었다는 사람들. 그들을 보면 괜히 질투가 난다. 내 아내 김하형도 그중 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 사람들 모두가 글을 잘 쓴다는 보장은 없는 것 같다. 그만큼 다독은 많이 했겠지만 한 권의 책이라도 곱씹어 보는 정독은 하지 못한 탓이지 싶다. 더욱이 그것을 읽고 생각한 것들을 글로 옮기는 훈련도 하지 못한 까닭은 아닐까.

어찌됐든 내 유년 시절의 모든 공간들은 드넓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책 몇 권이 내 기억의 공간 속에 들어 있지 않았다는 건 너무나 서글픈 일이다. 신앙심의 공간 가운데에도 이성보다 신비에만 몰두한 때였으니, 합리적인 신앙인보다 맹목적인 신앙인으로 살던 그 때가 얼마나 추악했을까.

서른 살 즈음 

나의 합리적인 신앙심과 깊은 사유를 키운 8할은 군대에서다. 경기도 연천군 삼곳리 철책에서 한 달간 근무하다 연대 본부에 운전병으로 파견받았다. 그곳에서 운전을 하면서 처음으로 책을 접했다. 소설책도 그렇게 재미있다는 걸 그때서야 처음 맛보았다. 경요가 쓴 <노을>과 <금잔화>, 이외수의 <벽오금학도>와 <칼>은 지금도 내 기억 속에서 잊혀지지 않는 책이다. 경요는 내게 연금술사의 1인자로, 이외수는 신선 세계의 1인자로 우뚝 서 있다.

책이 주는 맛은 27살 늦깎이 대학 생활에서도 즐겼다. 시간 나는 대로 전주대학교 도서관을 훑고 다녔다. 기독교 학부에 입학했지만 복수 전공으로 영어영문학을 했던 나는, 그야말로 잡다한 책들을 집어삼켰다.

▲ <윤치호와 김교신> / 양현혜 지음 / 한울 펴냄.
그중 기독교 학부는 맹목적인 신앙심보다는 이성의 합리성을 일깨워 주는 데 충분했다. 이신형 교수와 양현혜 교수는 그 중심에 서 있었다. 이신형 교수가 언어와 사유의 지평을 체계적으로 넓혀 주었다면, 양현혜 교수는 기독교 세계관을 구축해 주었다.

양현혜 교수의 <윤치호와 김교신>을 통해서는 윤치호가 '서구 문명=강자=도덕적인 선, 비서구 문명국=약자=도덕적인 악'이라는 제국주의 기독교를 접수할 때, 김교신은 조선산 기독교에 충실했음을 대비해 주었다. 한국에 들어온 외래 선교사들이 단순히 복음만 전한 게 아니라 제국주의적인 문화까지 강제했음을 알게 됐다. 그때 비로소 어릴 적 시골 동네에서 이단 추방 대회를 하던 그 일들이 잘못된 것임을 절감했다. 그것은 아리 폴먼의 <바시르와 왈츠를>에서도 선명하게 그려 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영문학을 가르치던 김승수 교수님과 함께 원전으로 읽었던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는 정말로 깊이가 있었다. <칼의 노래>로 유명해진 김훈도 헤밍웨이로부터 그 깊이를 익히지 않았나 싶다. 헤밍웨이는 그 누구보다도 단문을 통해 깊은 사유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을 통해서는 그런 지침도 정립했다. 'High thinking, Plain living.' (생각은 고상하게 삶은 평범하게) 곱씹어 볼수록 의미심장한 경구였다. 촘스키와 관련된 언어학 원서를 하나 배워 나갈 무렵에는, 그 책에 쓰여 있는 중국 속담도 내 인생에 귀한 모토가 되어 있다. "The palest ink is better than the sharpest memory." (명확한 기억력보다 흐릿한 잉크가 더 낫다. 전병욱 목사는 <낙타무릎>에서 이 경구를 자기만의 문장으로 재활용한 적도 있다. 

▲ <함석헌과 한국 지성들> / 조순명 지음 / 홍익제 펴냄.
그 시절 누군가 책 천 권을 읽으면 대학 하나를 나온 것과 같다는 말을 했다. 그 때문에 졸업할 때까지 천 권을 읽는 목표를 세웠지만 그 꿈은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그 때문이라도 더 많은 책을 읽었다. 아직도 내 기억 속에 큰 울림과 감명으로 남아 있는 책은 그것이다. 김진경의 <삼십 년에 삼백 년을 산 사람은 어떻게 자기 자신일 수 있을까>와 김민웅의 <콜럼버스의 달걀에 대한 문명사적 반론>을 통해서는 초고속 압축 성장에는 반드시 폭압과 신음이 내재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순명의 <함석헌과 한국 지성들 上,下>에서는 함석헌의 속살과 같은 과오를 들여다볼 수 있었으니, 가히 역사적 사명자들도 치명타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양현혜 교수는 함석헌의 과오보다도 그의 시대적 요청을 더 높이 사야 하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한 바 있다. 그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뭔가 개운치 않는 게 남았다. 

얼마 전 그 해답을 후배 최규성과의 대화를 통해서 찾을 수 있었다. 역사가 정반합에 의해 나선형으로 돌아가고, 그 시대마다 시대적인 위업을 완성한 혁명가와 목사가 있겠지만, 그들이 잘못 저지른 과오들은 훗날 역사 앞에 사죄해야만 그의 진정성이 인정받는다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박정희 대통령도, 내가 소속한 한국성결교회의 대부(大父) 이명직 목사도 예외이지 않다.

그것이 서른 살에 접어든 내 이성과 신앙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이전의 맹목적인 신비 세계에서 합리적인 신앙 세계로 발돋움한 시기였다. 책은 그만큼 내 신앙과 사유의 폭을 넓혀주는 데 지대한 주춧돌이었다.

물론 이성의 깨달음이 이전의 신(神) 체험을 앞서지는 않았다. 누군가 그랬던가. 삶이 불안하고 앞이 보이지 않을 땐 과거로 회귀한다고. 그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그보다는 신 체험의 밑바탕에 이성을 건축해 가는 과정이라 해야 옳을 것 같다. 서른 살 즈음은 내게 신앙생활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절대적인 시기였지 않나 싶다.

마흔 살 즈음

1971년생이니 2010년인 올해로 나는 마흔이 된 셈이다. 딸과 아들 둘을 두고, 서울 송파구 마천동 남한산성 아래에 교회를 세웠다. 전혀 뜻밖에 불어닥친 일이라 가족들과 함께 맨땅에 헤딩한 꼴이었다. 서른 중반을 거쳐 마흔이 되기까지, 여태껏 담임 목회자들을 돕는 보조 목사로 살아왔는데, 이제는 내가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이다.

교회를 세우면서 다짐한 게 있다. 교회가 땅을 투기하거나 건물을 짓는 데 혈안이 되지는 않겠다는 것. 장로나 권사와 같은 교회 직분을 돈으로 사지는 않겠다는 것. 가진 자들을 위한 교회가 아니라 남녀노소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두를 위한 교회를 세워 나가야 하겠다는 것 등이 큰 골자였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고 보니 교회에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것조차 쉽지 않음을 절감했다. 예전엔 개척 교회에도 사람들이 모여들었지만, 지금은 아예 처다보지도 않는 상황인 듯했다.

▲ <메가처치 논박> / 신광응 지음 / 정연사 펴냄.
왜 일까? <메가처치>를 쓴 신광은의 말에 따르면, 교회가 일반 대형 마켓처럼 신도들을 고객 모시듯 해 왔기 때문이고, 도심 속의 교회들이 대부분 기업화가 되어 있기 때문이란다. 그야말로 교회가 시장 경제 체제로 운영되고 있는 상황이니, 어느 누구도 개척 교회에 들어와서 고생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것은 이때를 두고도 타당한 말 같다.

그렇지만 주역(周易)에서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窮即變, 變即通, 通即久)라 하지 않았던가. 교회가 세속의 흐름과는 달리 예수의 참된 생명과 가치를 추구하다 보면, 비록 시간은 더디 걸리겠지만, 언젠가 통하지 않으랴 싶다. 김대중 대통령도 "10년 동안 한 우물을 파라"고 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요즘인데, 누가 한 가지 일을 10년 동안 붙들고 있으려 하겠는가. 그렇지만 장인 정신은 바로 그런 데서 비롯되지 않을까 싶다. 예수의 생명과 가치를 장인 정신으로 빚어 낸다면, 시간은 더기 걸리겠지만 분명코 통할 것이라 믿는다.

올 6월이면 이제 교회를 세운 지 2년째에 접어든다. 주일 예배 모임에 여섯 명 정도 모인다. 물론 숫자는 중요치 않게 생각한다. 다수의 종교 생활자보다 소수의 진실한 크리스천이 훨씬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신념 때문이다. 성경에 나온 바 있듯이, 교회 역사를 자랑하는 예루살렘 교회보다 이제 갓 신생된 안디옥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더 높은 가치와 지지를 받지 않았던가. 

우리 교회 교우들은 사실 루저다. 가정 기반이나 사회 기반이나 다들 금이 가 있는 상태다. 중심부에서 한참이나 밀려난 밑바닥 주변인들이다. 나도 이분들이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중환자처럼 예수를 통해 기적처럼 회복되길 바란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얼마나 나의 이기적인 욕망인지 뒤늦게나마 깨달았다.

지금은 마천동 지역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예전에는 서울 중심부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마천동에 들어왔지만, 이제는 돈 없는 자들이 또다시 밀려날 상황이다. 뉴타운 개발이 그 중심에 있는 까닭이다. 머잖아 어디로 또 이사를 가야 할지, 잠 못 이루는 사람들이 많다. 그만큼 정신적인 공황을 겪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 / 김두식 지음 / 홍성사 펴냄.
그런 상황 속에서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 법학자 김두식은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에서 그런 것들을 밝힌 바 있다. 교회가 집이 없는 자들에게 집을 제공해 주고, 돈이 없는 대학생들에게 학자금을 무상으로 대출해 주고, 일자리가 없는 자들에게 일거리를 주고, 사회적인 성적 소수자들에게도 문을 여는 교회가 돼야 한다고. 가히 개혁적이고 실험적인 교회다. 그 교회에는 참된 예수의 생명과 사랑이 가득함이 분명하다.

우리 교회도 그런 바람을 품고 있다. 그것이 이 땅에 예수의 생명과 가치를 품고 뿌리내리게 하는 일이지 싶기 때문이다. 그것을 추구하는 길이라면 누구든지 함께 연대하려 한다. 그것이 마흔 살 즈음에 추구하고 있는 내 삶이자 잔잔한 목표인 까닭이다.

아무쪼록 스무 살 즈음에는 신비와 개인 구원에만 파묻혀 있었지만, 서른 살 즈음에는 여러 가지 책들과 사유를 통해 그 신앙과 이성의 지평을 넓혔고, 이제는 초보 개척 목회자이지만, 하늘 뜻을 이 땅에 이루길 위해 애쓰고 있으니, 그나마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신앙인의 길을 걷고 있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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