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창한 기도나 능력 없어도, 신실한 삶이 그리스도인 됨을 증명

지난 화요일(25일) 신세철 집사님의 어머님 장례식이 있었지요. 78세의 일기로 이 세상을 별세하신 신 집사님의 어머니는 23일인 주일 오전 10시에 돌아가셨고, 화요일 3일장으로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그날 화장하는 날까지 모든 절차를 주님의 은혜 가운데 마칠 수 있었습니다. 월요일 11시경에 임종 예배를 드리는 날부터, 마지막 화장하고 유골을 납골당에 넣고 하관 예배를 드리는 그 모든 시간마다, 신 집사님의 가족들이 함께 찬양을 드렸는데, 마치 천상의 찬양단이 내려와서 함께 찬양을 부르는 듯했습니다. 그 정도로 온 가족의 신앙심이 아름다웠음을 알 수 있었지요.

그때 들은 이야기들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그날이 있기까지 신 집사님의 삶을 누구 하나 인정해 주지 않는 게 사실이지요. 이전에 방탕한 삶을 살아 왔기 때문이지요. 그 때문에 15년 만에 만난 가족들에게는 예전처럼 신 집사님을 위한 염려와 불안이 잔뜩 깔려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언제 가시게 되었습니까? 신 집사님의 장례식장에 찾은 교회 교우들을 본 이후 아닙니까? 아무리 신 집사님이 주님을 만난 간증을 입으로 했다 할지라도, 입 속에서 나온 말은 공기의 진동과 함께 사라지기 쉬운 일이지요. 하지만 집사님의 변화되고 있는 모습은 집사님의 말에서 입증된 게 아니라, 함께 그 예배에 참여한 교우들을 통해서 가능했던 것이지요. 그런 뜻에서 김현한 집사님과 이경재 집사님이 각자의 일을 마치고 밤 9시가 넘는 시각에 그곳 주안 사랑의병원을 찾아 신 집사님과 그 가족들을 위로한 것은, 정말로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렇듯 한 사람이 참된 거듭남의 삶을 사는 것, 참된 믿음의 삶을 사는 것, 그것은 입술의 말로 그치는 일이 아니라, 그 삶으로 입증되는 것이지요.

이는 엊그제 28일 점심때 만난 남광엽 성도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처음 오셨는데, 사실 남광엽 성도님은 신세철 집사님이 허랑방탕한 삶을 살 때 먹여 주고 입혀 준 분입니다. 어떠한 바람도 없이, 자기 주머니를 털어 신 집사님을 먹이고 입혀 준 사랑 많은 분이지요.

그날 신 집사님이 전화를 걸어, 좋은 사람을 소개시켜 줄 테니, 마천동 사거리 GS마트 뒷골목에 있는 서주미용실로 오라고 해서, 남광엽 성도님과 만나게 되었지요. 그때 저는 2008년 서울시 인구 1,045만 6,034명 가운데, 그것도 61만 명이 넘게 사는 송파구 내에, 더욱이 4만 3,000여 명이 사는 마천동 하늘 아래에, 전라남도 신안군 지도의 옆 동네인 임자면 대기리가 고향인 남광엽 누님 같은 분을 만나게 될 줄이야, 꿈엔들 생각했겠습니까?

놀라운 것은 남광엽 성도님의 삶이 사람들에게 온정을 베풀고, 따뜻한 사랑을 베푸는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걸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그날 서주 미용실 앞에 꽃이 하나 있었는데, 그 길을 지나가는 분이 그 꽃을 보고 자기 집 꽃이 죽어 가는데,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는지 묻는 과정에서 알 수 있었고, 길거리에서 방황하던 신 집사님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베풀고 나누어 준 그 삶을 통해 알게 되었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또 요구르트와 우유를 선물하는 것을 통해 확실히 알 수 있었지요. 그것이 남광엽 성도님의 신실한 삶의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그렇기에 우리가 유창한 기도는 못한다 할지라도, 뜨거운 천상의 언어 방언 기도는 못한다 할지라도, 병을 고치거나 갖가지 능력은 없다 하더라도, 제 있는 자리에서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그리고 자식으로서, 또 일터의 사장과 종업원으로서, 각자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바로 자기 삶으로 보여 주는 신실한 사람임에 틀림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삶에 충실하다면, 우리는 이 시대의 바나바들이 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 그리고 우리 성결교단이 원하는 교회와 교우들이란 바로 그와 같은 신앙인들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크리스천 됨의 참된 가치는 바로 거기에서부터 드러나지요.

바나바는 올곧은 사람, 말씀이 충만한 사람, 그 말과 삶에 일치를 보인 자

주님의 손은 안디옥에서 생명의 통로가 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방인들을 품고 사랑하는 소수 무리들에게 임했습니다.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왔는데, 그것이 예루살렘 교회까지 전해졌고, 그를 위해 바나바를 안디옥 교회에 파견했습니다.

왜 바나바였습니까? 바나바는 초대 교회에서 청지기 삶을 잘 보여 준 사람이었습니다. 이른바 자기 땅이 있는 바나바였지만 그 땅을 주님을 위해, 헐벗고 굶주린 이웃을 위해 쓰라며 주님께 드린 자였습니다.

바나바는 또 위로자요 격려자였습니다. 사울이 예루살렘 교회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위협을 받을 때에 수많은 제자들 앞에서 사울의 그리스도인 됨을 변호하고 지지해 준 자가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그리고 바나바는 자기의 생질인 요한 마가가 1차 전도 여행 때 다른 일로 인해 팀을 이탈했음에도 불구하고, 2차 전도 여행 때에는 함께 선교 여행에 데리고 가자고 바울에게 이야기할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한 사람의 실수와 허물을 단번에 잘라 버린 사람이 아니라 성경적인 관점으로 용서하고 품은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바나바를 일컬어 본문 24절에서는 '착한 사람,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칭하고 있지요. 여기에서 착하다는 것은 자기에게 잘하는 사람에게는 기울고, 또 자기에게 못하는 사람과는 등을 지는 사람이 아니라, 어느 한쪽에 치우침 없이 균형감을 가지고 올곧게 살아가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리고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란 기도가 똑소리 나거나, 방언을 잘하거나, 앞날에 점을 치는 듯한 능력이 대단한 사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말씀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바나바가 성령이 충만하여 누구의 병을 고쳤다거나, 방언을 유창하게 했다거나, 신비한 능력을 행했다는 성경 구절은 그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바나바는 성령이 충만하여 자기 땅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것으로 여기는 겸손한 삶을 살았고, 사람이 위기에 빠졌을 때 그의 진정성을 알아보고 권면할 줄 알았고, 그리고 실패한 사람을 품을 줄 아는 온유한 사람이었지요. 그것은 모두 자기 주관으로 한 게 아니라 오직 성경의 말씀에 근거한 삶을 살았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성령 충만이란 그렇기에 말씀에 충실한 사람임을 알 수 있고, 바나바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또 바나바는 믿음이 충만한 사람으로 소개돼 있습니다. 믿음이 충만하다는 게 뭘까요? 그 누구보다도 교회당에 열심히 나오는 사람을 뜻할까요? 그 누구보다도 기도 시간을 많이 갖는 사람을 칭할까요? 그 누구보다도 예배를 많이 드리는 사람을 뜻할까요? 물론 그것도 배제할 수 없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믿음이란 곧 신실을 뜻하기에, 말과 행실에 일치를 보이는 사람, 그가 믿음이 충만한 자입니다. 초대 교회에서 바나바의 위로와 격려의 삶이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그가 말과 행실에 일치를 받았기에, 신뢰를 받았던 것이지요.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이번 수요일이면 선거가 치러지는데, 서울시장이든, 시 의원이든 누구를 지지하겠습니까? 한 곳에 오래도록 몸담고, 그 지역을 위해 말과 행실에 일치를 보이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헛공약만 남발하는 사람보다는 그 지역을 위해 애쓰고 힘써 온 후보자 아니겠습니까? 그만큼 그가 말만 앞세우는 자가 아니라 그 삶으로 그의 말을 입증해 왔기 때문이지요.

그처럼 바나바는 초대 교회에서 신실한 삶을 살았던 장본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착한 사람이라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 없이 올곧아야 될 것이고, 우리가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면 그 누구보다도 성경에 충실한 사람이어야 할 것이고, 우리가 진정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면 말과 행실에 일치를 보이는 사람이라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시중드는 자세는 교회에서만 아니라 가정과 일터에서도

그와 같은 바나바가 안디옥에 왔을 때 주님의 손길에 붙잡혀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권면하였습니까? 바나바는 그 모든 사람들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행 11:23)고 권면했습니다. 굳건한 마음이란 안디옥의 화려함과 세련됨에 주눅 들지 말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중심을 잡고 나아가란 것입니다. 주와 함께 머물러 있다는 것은 '머물다'는 뜻이 '시중들다'는 뜻으로서, 인간 바나바의 뜻을 시중드는 게 아니라 오직 주님의 뜻을 시중들고 나아가야 함을 일깨워 주는 말씀입니다.

사실 그 당시 바나바의 주가는 그 누구보다도 높았습니다. 바나바는 지주의 아들이었고, 위로와 권면에 능숙했고, 또 요한 마가뿐만 아니라 실패한 바울에게까지 기회를 줄 정도였으니,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명성이 자자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그 당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에 왕림하게 되었으니, 그를 알고 그에 대해서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그의 곁에 몰려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나바는 안디옥에 있는 사람들의 모임, 곧 안디옥 교회를 자기 뜻에 따라 머무는 교회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뜻을 받들고 시중드는 교회가 되길 원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교회를 사조직화하려거나, 자기 마음대로 교회를 주무르려 하는 목사나 장로와는 다른 차이점이지요.

왜 그 당시 칭찬과 명성이 자자한 바나바가 교회를 앞세워 자기 뜻을 펼칠 수 없었겠습니까? 왜 자기의 주가를 정략적으로 이용할 수 없었겠습니까? 충분한 인지도를 받고 있던 바나바였기에, 그 모든 일들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나바는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 아님을 알았기에, 자기 뜻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뜻을 시중드는 교회여야 함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예전에는 교회가 목사 한 사람에 의해서 좌지우지되곤 했습니다. 이른바 구약의 제사장 개념을 신약 시대에까지 가지고 와서, 그것을 토대로 목사 한 사람의 기도와 설교와 모든 예식을 집례하곤 했지요. 더욱이 그런 제사장 개념과 맞물려 교회 안에서만 하는 것들이 신성하고, 교회 밖에서 하는 일들은 모두가 더럽고 추한 일들로 간주해 왔지요.

하지만 베드로전서 2장 9절의 말씀에 근거한 만인 제사장직을 생각한다면, 또 갈릴리의 무식한 어부들이 예수님의 열두 제자로 선택받아 사도가 된 일을 놓고 본다면, 교회 내 모든 교우들이 실은 만인 제사장이 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아울러 교회에서만 하는 일들이 신성하고, 선교지에 나가 선교하는 일만이 거룩하다는 의식도, 이제는 바꾸어서 내 일터가 주님께서 보내신 선교지로 여기고, 내가 속한 가정과 일터와 사업장 그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한 터전으로 가꾸어 가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영은 교회 안에만 임재하는 게 아니라, 내 일터에도 임하시는 무소부재하시는 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뜻을 시중드는 자세는 비단 교회에서만 가능한 게 아닙니다. 주님의 뜻은 내 가정 속에서도, 내 사업장에서도, 내 일터 속에서도 얼마든지 실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 남광엽 성도님께서 자신의 미용실에 들어오는 손님들뿐만 아니라,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 그리고 이웃 주민들에게 한없이 베풀고 사랑하고 섬기는 그 삶 자체가 주님께서 기뻐하실 일이요, 주님의 뜻을 시중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그 모든 행위들이 나를 향한 종착역으로 그친다면, 그것이 나의 자선 행사, 기부 행사로 그칠 일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초점을 주님을 위한 뜻,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맞춘다면,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에 안디옥에 있는 교우들처럼, 주님 뜻을 시중드는 삶이 될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 교우들은 자기 주관보다 상대방의 뜻을 존중하는 제사장들

그 이후의 말씀이 본문 25-26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안디옥에 도착한 바나바는 그곳의 교우들에게 주님의 뜻을 받들어 시중들 것을 권면했고, 그런 권면에 힘입어 큰 무리가 주님께 더해졌습니다. 이를테면 교회가 올곧은 바나바, 말씀에 충실한 바나바, 그리고 말과 행실에 일치를 보이는 바나바의 신실한 삶으로 인해, 그리고 자기 뜻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뜻을 받들고 시중들 것을 권면한 바나바의 권면으로 인해, 안디옥 교회가 점점 부흥이 되었던 것이지요.

그때 바나바는 그 많은 교우들을 홀로는 이끌어 갈 수 없음을 알았고, 함께 동역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그를 위해 사울을 찾으러 다소로 떠났던 것입니다. 안디옥에서 다소까지는 거리상으로 250km 정도인데, 오늘날 버스로 약 3시간 30분가량 걸리는 거리라고 합니다. 2000년 당시에 버스로 3시간 걸리는 거리는 걸어서 하루 이상은 충분히 걸리는 거리였겠지요.

바나바가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간 이유는 오직 사울과 함께 안디옥 교회를 이끌어 가기 위함이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큰 무리를 주님의 진리로 이끌고 가르치는 데에는 제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이요, 오직 바울과 같은 동역자가 필요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1년 동안 사울과 함께 안디옥 교회를 이끌어 갈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한국교회처럼 한 수장 밑에 중간 수장이 있는 격이 아니라, 바나바와 사울 두 사람이 함께 교회 무리들을 이끌고 가르치는 격이 되지요. 그렇다면 바나바와 사울의 관점이 다를 수 있고, 의견이 일치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만난 주님이 다르고, 바나바와 바울이 배운 성경의 관점도 다른 점들이 분명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도 그들 두 사람이 함께 교회를 이끌고, 다른 많은 교회 무리들이 그들의 뜻을 준중하고 받들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은 서로서로의 의견이 달라도 주님의 뜻에 위배되지 않는다면 기꺼이 받아 준 것이고, 교회를 함께 세워 가는 안디옥 교회의 교우들도 그들이 주님의 뜻을 받드는 데에 지나치지 않다면 기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었기 때문이지요.

만약 그들 두 사람이 주님의 뜻이 아닌 자기 뜻을 주장하고 높게 세우려 했다면, 그들은 결코 1년 동안 함께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겠지요. 그들이 다른 교우들의 뜻을 무시하고 제 주장만 펼쳤다면, 그 역시 1년 동안 공동 목회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만큼 바나바도 바울도, 그리고 안디옥교회의 모든 교우들도 자기 뜻을 내세우고 주장하고 관철시키려 한 게 아니라, 안디옥 교회 모든 사람들은 서로 주님의 뜻을 세우는 데에 모든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교우들을 향한 세상의 평가, 그리스도인

그것이 어떤 평가로 귀결됩니까? 바로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는 그 평가로 귀결되지요.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이란 헬라어로 '크리스티아노스'(christianos)로서, 그 뜻은 '크리스천'(christian), 곧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일컫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는 자,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사는 자들, 예수님이 가신 발자취를 따르는 참된 제자를 일컫는 말입니다.

놀라운 것은 크리스천이란 말이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는 것입니다. 그 전에 예루살렘을 중심한 초대 교회에서도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뜻을 받들어 살았지요. 그런데도 왜 안디옥에서, 비로소 제자들이 크리스천이란 소리를 듣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야말로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는 자였고, 그들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참된 삶을 사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만약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이라 하면서도, 그 당시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안디옥 도시의 화려함을 뒤좇는 자들이었다면, 안디옥의 성공과 출세를 지향하는 자들이었다면, 그들은 결코 '크리스티아노스', '크리스천'으로 불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만약 예루살렘 교회의 제자들처럼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까지 품고 사랑하는 관대한 신앙인들이 되지 못했다면, 결코 그들은 '크리스티아노스', '크리스천'으로 불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는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스도, 곧 구원자요 메시아로 고백하며 따르겠다던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은 모습이지요. 마태복음 16장에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에 이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자신을 가리켜 누구라 말하는지 물었지요. 그때 제자들은 사람들이 주님을 세례 요한이라고 하기도 하고, 엘리야라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도 한다고 대답했지요. 그때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었고, 그때 제자들을 대표한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하고 대답했지요.

그 대답이 주는 진정성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곳 가이샤라 빌립보는 그 당시 로마의 황제 카이사르, 다시 말해 시저를 위한 황제의 도시였습니다. 황제의 도시인 그곳에는 황제를 위한 신전이 우뚝 서 있었고, 황제를 위한 정치력과 군사력과 화려함이 자리 잡고 있었지요. 다시 말해 그곳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황제가 취한 권력의 품속에 들어가기 위해 성공과 출세만을 바라보며 살았던 것이죠. 그러니 거짓과 사기와 매춘이 난무할 수밖에 없었지요.

바로 그곳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었습니다. 그 물음의 의미가 단순히 내가 누구인지 알아주라는 뜻이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지요.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오직 당신이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제자들이 당신의 뜻을 받들어 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제자들은 "주님은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하고 대답했지요. 그것은 주님이 크리스토스, 곧 구원자 메시아일 뿐만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심을 아는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구원자요 메시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신 주님을 좇아 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 자신을 아는 것으로 그칠 게 아니라, 당신을 좇아 살기를 원했던 것일까요? 사람은 늘 지향하던 목표를 좇지 않으면, 한 순간 다른 것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지요.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살 동안에는 예수님께서 가르친 가르침과, 병든 자들을 치료한 것과, 또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신 것들로 인해, 늘 주님께 시선을 두며 살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는 엄마 품을 떠날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지요.

그렇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과 함께 부활하셔서 하늘로 승천하신 이후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들의 눈앞에 예수님이 보이지 않게 되면, 자연히 세상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지요. 아이들이 엄마 품에 있다가 크게 되면 엄마 품을 떠나 이성 친구든지, 또 다른 세상의 것들을 좇아 사는 것도 마찬가지지요. 문제는 세상의 그 같은 것들을 잠시 잠깐씩 바라보면 좋을 텐데, 거기에 흠뻑 젖어 드는 것이 문제지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이 누구인지 묻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당신 자신이 원하는 제자도를 추구하도록 원하셨던 것은 바로 그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너희들이 아무리 내가 메시아이고,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안다고 해도, 세상의 유혹과 세상의 성공 신화가 너희들 눈앞을 가리고서 사망의 늪으로 끌고 갈 수 있기에, 너희들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 속에서도 생명과 진리인 나를 뒤좇는 자들이 되라고, 그 같은 물음을 던진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 있는 '크리스티안', 곧 '크리스천'이 걸어가야 할 참 사명이지요. 우리가 참된 크리스천으로 살아갈 때에만 세상의 유혹이나 세상의 성공에 집착하는 삶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 속에서도 생명과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살아갈 수 있는 것이지요.

참된 크리스천이란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 자인가?

이상과 같은 말씀을 통해, 우리는 참된 크리스천이란 어떤 삶을 추구하는 자인지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참된 크리스천은 한 교회를 이루고 있는 구성원들 모두가 만인 제사장직을 감당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사만 제사장이 아니라, 장로든 권사든 집사든, 평신도든, 그것을 교회의 직급이 아니라 교회 내 직함으로만 여길 뿐 오직 그 가치는 세상 속에서 참된 제사장으로 살아갈 때에 되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 내에서 주름잡는 목사요, 장로요, 권사라 할지라도, 그 삶이 동네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삶이라 한다면, 어찌 그가 참된 제사장이 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그가 교회에 충성하고 교회에서 선하게 보인다 할지라도, 세상 일터에서 악한 자들보다 더 악하고 거짓되게 살아간다면, 어찌 그를 향해 크리스천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울러 안디옥 교회에 바나바만 리더가 아니라 바울도 리더였고, 그들의 각자 의견이 다르고 또 그 교회를 구성하는 교우들의 의견이 다를 수 있었지만, 그들 모두는 주님의 뜻이라면 서로 합일점을 찾아 나아갔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자기 주장만 주님의 뜻이 아니라, 상대방의 주장도 주님의 뜻으로 받아 줄 줄 알았던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우리가 함께 모여 공동체를 이루는 이 공동체에서 가족 식구들처럼 사랑하고 섬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은 더없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크리스천 됨의 가치는 이 교회당 안에서나, 우리의 모임 가운데 드러나지 않습니다. 참된 크리스천의 가치는 세상에 맡은 일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동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는 안디옥 교회의 교우들처럼 이 시대에 각자가 속한 곳곳에서 참된 제사장직을 수행하는 크리스천들이 되도록 하십시다. 그것은 각자가 처한 곳곳에서 교회에서 하는 것처럼 상대방의 의견과 뜻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참된 크리스천으로 살 때에 가능할 것입니다.

둘째로, 참된 크리스천은 이방인들을 품고 사랑하는 삶 속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에 비해 예루살렘 교회는 더 일찍이 태동된 교회요, 갖가지 능력과 기사와 표적이 더 월등했던 교회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서 들려오는 것은 단순한 교회였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그 교회보다 더 늦게 태동된 안디옥 교회가 크리스천으로 불릴 수 있었던 비결은 그들이야말로 유대인을 뛰어넘어 이방인들까지도 사랑하고 품었던 까닭입니다. 다시 말해 안디옥 교회 교우들은 예루살렘 교회 교우들과는 달리 자기 혈족과 친족과 계급과 신분을 뛰어넘어 이방 사람들까지도 품고 사랑했던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안디옥 교회 교우들이 크리스천으로 불렸던 두 번째 이유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들도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우리의 밖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기꺼이 품고 그들을 존중하는 것은 더없이 중요한 일입니다. 그들이 설령 부처를 믿는 자거나, 다른 종교를 신봉하는 자라 할지라도,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품고 사랑할 때에, 그들의 의견을 존중할 때에 우리는 참된 크리스천으로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없이 내 일방적인 신앙심만을 강조한다면, 아무리 뜨거운 신앙심을 자랑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나를 참된 크리스천으로 인정해 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 밖에 있는 사람들을 그 누구보다도 품고 수용하고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와는 다른 종교인이라 할지라도, 내 일터 속에서 내 삶 속에서는 그들과 함께 하는 훈련을 키워 나가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들을 존중하고, 그들을 배려할 수 있을지, 그 삶의 훈련 속에서 참된 크리스천 됨의 가치는 더욱더 돋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참된 크리스천은 세상의 성공과 화려함에 끌려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생명과 진리에 집중하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크리스천이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 아닙니까?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진리를 따르겠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어떤 상황속에서도, 어떤 형편 속에서도, 오직 주님의 생명과 진리를 바라보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내 상황이 좋을 때는 물론이고, 내 형편이 힘들 때에도 오직 내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만, 내 인생길의 진리 되신 주님만 바라보며 사는 자들이 참된 크리스천입니다. 때때로 크리스천 가운데에는 어려운 형편 속에 있다가 그 형편이 나아지면 가차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형편이 좋아지고 부요케 될 때에는 예수님을 찬양하고 높이다가도, 그 삶이 추락해질 대로 추락하여 도저히 올라설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그 마음속에서 지워 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될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내 삶의 형편을 보시고서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분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의 내 형편과 처지가 아니라 오직 당신 나라의 영원한 생명과 진리를 내게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의 형벌을 맞이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르겠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밟겠다는 것도, 사실 그것이지 않습니까?

그렇기에 우리는 어떤 상황이나 여건에 따라 흔들리는 신앙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세상의 것들에 치우치는 자들이 아니라 오직 영원하신 생명과 진리만을 보고 전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사람들로부터 참된 크리스천으로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4중 복음(四重福音)의 토대 위에, 참된 크리스천으로 사십시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교회는 건물이나 제도가 아니라 사람들의 모임이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의 모임이 상가든, 집이든, 높은 첨탑이 있는 예배당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몇 십 년 혹은 몇 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느냐 하는 것도 결코 중요한 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아무리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교회라 할지라도, 이제 곧 신생된 교회라 할지라도, 교회를 이루고 있는 구성원들이 크리스천으로 인정받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그 명함이 엇갈리기 때문입니다. 그때의 명함은 세상 기준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교회는 분명코 안디옥 교회의 교우들이 그리스도인으로, 크리스천으로 인정받는 교회 구성원들이 되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것은 내가 속한 교회 공동체뿐만 아니라 세상 일터 속에서도 내가 그 분야에 전문가가 될 뿐만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함께 일하는 동료와 상사들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제사장이 될 때에만 가능할 것입니다. 아울러 그것은 나와 다른 종교를 지닌 사람들, 나와 다른 성향의 사람들까지도 주님의 사랑으로 품고 인정해 줄 때에만 가능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형편과 여건 속에서도 오직 주님의 생명과 진리를 바라보는 자라야 가능할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 교우들은 그 당시의 세상의 화려함과 성공에 휩쓸린 게 아니라, 오직 영원하신 주님의 생명과 진리를 붙잡고 쫓는 참된 크리스천들이었기 때문이죠.

오늘은 특별히 우리 교단인 성결교회에서는 성결교회가 태동된 성결교회 주간으로 삼고 있습니다. 1907년 정빈과 김상준 두 사람에 의해 시작된 전도관이 이제는 2008년 12월 말 현재 2,663개 교회에 이르렀고, 최초 두 사람에 의해 시작된 교인 수도 2008년 말 54만 8,026명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더 많은 교회, 더 많은 교우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야 하겠지요.

중요한 것은 104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3,000여 개에 달하는 교회가 있고, 60만에 달하는 교인이 된다 할지라도, 거기에 안디옥 교회처럼 참된 크리스천이 극히 드물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진정으로 성결교회 교인임을 자랑한다면, 중생 곧 거듭남의 사실이 확실해야 하며, 성결 곧 세상의 더럽고 추한 것보다 오직 깨끗한 신앙인으로 살아야 하며, 신유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 속에서 내 몸이 건강하고 뿐만 아니라 내 몸이 아픈 것 속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것을 기대하면서 살고, 그리고 재림 곧 부활하여 하늘로 승천하신 주님께서 성경의 말씀대로 다시금 재림할 것에 소망을 갖고 사는, 그 4중 복음의 토대 위에서, 진정으로 안디옥 교회 교우들처럼 참된 크리스천으로 살도록 하십시다.

그것이 104년 차를 맞이한 한국 성결교회, 곧 우리 주님의교회 교우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진리를 부어 주심 감사드립니다.
우리들의 모임이 진정 안디옥 교회를 닮아 가길 원합니다.
그들 각자가 제사장으로서 상대방을 배려하고 존중하며 살았던 것처럼,
그들 각자가 다른 이방인들 다른 종교인들을 품고 사랑하며 살았던 것처럼,
그들 각자가 세상의 성공보다도 오직 주님의 생명과 진리만을 바라보았던 것처럼,
우리 각자가 그 뜻을 이어 받길 원합니다.
그때 비로소 안디옥 교회 교우들이 그리스도인으로,
크리스천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자들로 인정받았듯이,
우리 각자도 참된 크리스천으로 인정받으며 살게 하시옵소서.
104년 차를 맞이한 한국 성결교회, 3,000개 교회 60만 성도를 목표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
아무리 많은 교회,
아무리 많은 교인 수를 자랑하면 무엇하겠습니까?
한국에 있는 크리스천들, 우리 각자가 온전한 크리스천이 되지 못하면,
그 교회 수가, 그 교인 수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성결교회에 소속된 우리 교우들이라도 먼저
참된 크리스천으로 살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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