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마를 아는가? 이들은 사람의 손에 길들여지고, 가축된 적이 없는 말들이다. 때문에 이들은 힘이 있고, 열정이 넘치고, 매우 거칠다는 것이 특징이다. 필자가 서두에 야생마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이렇다. 작금의 한국교회는 야생마 같은 본능을 상실했다고 본다. 더 이상 한국교회에서는 초대 교회에서 보여졌던 거칠고, 역동적이며, 길들여지지 않은 듯한 강인함을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필자가 이런 표현을 사용하면 간혹 어떤 이들은 이와 같은 의미를 기독교인의 몰상식과 상식 이하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의도로 채용하려는 이들이 있는 것 같다. 마치 기독교인이란 세상과의 타협이란 있을 수 없는 극단적 근본주의자들처럼 정의하려고 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근본 의도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작금의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지역 교회들은 중세시대를 거치게 되면서 제도화와 구조화에 갇혀 버린 한 마리의 길들여진 가축과도 같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더 이상 그 안에서는 변화도, 부흥도, 개혁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치 그저 그 상황 속에 안주하려고 하는 본능이 커질 대로 커졌다는 것이다. 동시에 이와 같은 모습은 우리 안에 갇혀서 그저 주인이 주는 여물만을 받아먹는 한 마리의 가축과도 같아 보인다. 한마디로 한국교회는 길들여 질대로 길들여졌다. 성도들은 목회자들에 의해 길들여졌고, 목회자들은 자기 성공과 명예, 그리고 물질과 욕심에 길들여졌다.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이미 길들여진 짐승은 더 이상 야생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 야생의 본능을 이미 상실했기 때문이다. 필자가 한국교회를 바라볼 때에 한국교회의 모습이 바로 이와 같다. 오늘날 현 시대의 성도들은 더 이상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지녔던 야생마적인 본능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현 시대의 교회 구조 속에서는 더 이상 야생마적인 성도들을 양산해 내기란 불가능하다고 필자는 본다. 더 이상 이와 같은 교회 구조를 가지고서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역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논지다.

필자가 한국교회를 바라볼 때에 무엇보다도 가장 시급한 과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교회 구조 개혁일 것이다. 물론 필자는 이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이들이 이제는 한목소리를 내야할 때라고 필자는 생각 한다.

이제는 '길들여짐을 받는 식'의 교회 구조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만의 야생마적인 본능을 발휘할 수 있는 교회 구조를 만들어 내야 할 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회는 '오라는 식의 목회 구조'가 아닌 도리어 '가 주는 식의 목회 구조'를 도입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교회는 오라는 식의 목회 구조였다. 다시 말해서 건물 안으로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건물 안에 모여 있는 이들이 세상 속으로 들어가 주어야 하는 식의 구조로 목회 구조를 바꾸어야 할 때이다. 비그리스도인들을 오라고만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오지 않는다면 이제는 우리들이 그들에게 가야 함이 옳다. 사실 이와 같은 목회 방식은 예수님의 목회 방식이었음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작금의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지역 교회들이 이와 같은 예수님의 목회 방법을 잃어버린 근본적인 원인은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를 시작으로 중세 시대를 거치게 되면서 계속적으로 교회를 제도화하고, 건물화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와 같은 '의도적인 실수'가 현 시대에 이르러 교회의 크고 작은 문제들을 야기시켰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작금의 한국교회 내에 필요한 이들이 있다면 집주인에게 길들여져 있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그들의 야생마적인 본능을 일깨워 줄 수 있는 그러한 선구자적인 거룩한 이들이 많이 나와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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