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니스와 심현지씨. 심현지씨의 조카 데니스는 2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네 살의 순수한 영혼을 가진 '아이'다. 5년째 데니스와 살면서 이모인 심현지씨는 비로소 희망에 눈뜬다.

데니스, 스물다섯 살의 청년, 그럼에도 네댓 살의 정신 연령으로 살아가는 아이(?), 그 아이를 보면서 나는 깨달았다. 내가 매우 정상적인(?) 사람이며, 정상적인(?) 교육을 받아, 정상적인(?) 세상에서 불편 없이 살아 왔다는 사실을.

그러나 내게, 유리공예가로 자존심을 키워 온 내게 이것은 도리어 역설이어야 했다. 정상적이어서 평범한 사람들, 그들의 평범하고도 정상적인 삶에 도전하는, 그래서 그 정상적인 사람들에게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존재하는 게 마땅한 나의 모습이었다. 사람들도 으레 나를 그렇게 평가했고, 나 또한 나를 그렇게 여겨왔다.

그런데 나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었다. 내가 사는 이 정상적인(?) 세상은 우리들에게 편리한 정상적인(?) 시스템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사람들, 즉 돌출이나 돌발적 행동을 일삼는 데니스와 같은 장애인들에 대해 언제나 편견의 시각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불편한 존재였고, 그들은 처음부터 우리와 달라야 했다.

두 살 때 앓은 뇌막염 후유증으로 장애인 돼

그들에게는 매우 불평등한 세상인 셈이다. 태어난 지 2년도 안 되어 뇌막염을 앓고, 그 후유증으로 더 이상 자라지 않는 정신을 지닌 아이, 데니스와 같은 사람들, 그러니까 우리들 편에서 '정상적이지' 않은 사람들, 그들이 장애인이든 아니면 또 다른 모습이든 그들은 마이너리티(소수자)라는 이유로 언제나 '비정상'의 범주에다 내팽개쳐 왔음을 본 것이다. 데니스를 통해, 그리고 그와의 동거를 통해서.

5년째다. 이모인 내가 조카 데니스와 어색한 '가족'이 되어, 이제 더 이상 데니스와 떨어져 산다는 걸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완전한 '가족'이 되어버린 지금에 이르기까지는.

▲데니스의 그림은 복잡하지만 단순하다. 똑같은 색깔의 사람과 동물이 등장
하고 그들은 모두 같은 방향을 응시한다. 그런데도 그의 그림에는 진한 감동이
살아 있다.

처음엔 데니스 엄마이자 내가 무척 아끼는 동생에게 파리에 사는 언니로서 그저 이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에 데니스와의 파리 여행을 제안했다. 꼭 한 달만 데리고 있기로 하고, 그 한 달 동안 동생이 데니스와 떨어져 마치 휴가라도 즐기라는 양으로 던진 제안이었다.

파리에서 데니스와 보낸 한 달은 그리 힘들지 않은 시간이었다. 아니 힘들었어도 '한 달인데 뭐?'라는 식의 희망(?)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세상일이란 게 그렇듯 그저 그 일 하나로만 떨어져 존재하지 않았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또 다른 진행을 해 간다. 데니스와의 만남 역시 그랬다. 한 달이 지나 데니스를 동생이 사는 미국으로 다시 돌려보냈는데, 그러고 나서 며칠이 지나지 않아 또 전화가 왔다. 데니스가 미국으로 돌아와 적응을 못한 채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했다. 파리에서 나와 함께 생활했던 한 달 사이에 긴장이 풀려버린 모양이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겠지, 했는데 더욱 심각해졌다. 나는 다시 미국으로 갔다. 단순히 긴장이 풀린 게 아니란 걸 알아챘다. 이번에는 동생이 좀 심각한 제안을 해왔다. 데니스가 나를 너무 좋아한다며 당분간 데리고 있어 줄 수 없겠냐는 게다. '당분간'이란 시간은 얼마든지 치즈꼬리처럼 늘어날 수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데니스는 아예 나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뒤죽박죽이었지만 결코 데니스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파리에 함께 올 수 없었던 건 내게도 데니스를 향한 또 다른 정이 느껴졌기 때문인지 모른다. 남편과 헤어지고, 아이들도 제각기 독립해서 사는데 뒤늦게 원치 않게 '아들' 하나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꼴이었다.

데니스에게 나는 이모이자 엄마였고, 동시에 미술교사였다. 그렇게 우리를 규정하고 나니 데니스는 파리에 미술공부를 하기 위해 온 셈이었고, 또 하나의 새로운 가족을 갖기 위해 온 셈이었다. 생각했던 만큼 힘겨운 시간들이 흐르고 있었다.

데니스 같은 장애인들이 그렇듯 자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쓰러지곤 했다. 여행을 하다가도 길거리에서 데니스가 쓰러지면 나는 앰뷸런스를 불러야 했고, 그렇게 허둥지둥 병원을 오가면 어느새 등줄기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려 내렸다. 데니스는 자기의 격한 감정을 표현할 때도 팔꿈치로 누군가를 퍽 가격하는 식이었다. 몸은 이미 다 큰 데니스에게 그렇게 가격을 당하고 나면 한참을 통증에 시달렸다.

나를 변화시킨 '데니스의 힘'

▲데니스는 조금도 불편함을 참지 못하는 나에게 햇살이고 이슬이고 눈물이고 화창한
희망으로 걸어왔다. 심현지씨 ⓒ뉴스앤조이 김승범

지금 데니스는 5년 전의 데니스가 아니다. 외모로는 건강한 이들과 조금도 다름없다. 이제는 제 감정을 누그러뜨릴 줄도 안다. 내가 살아온 이 정상적인(?)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을 깨우친 걸까? 너무 떠들어서 조용한 곳엔 도저히 데리고 갈 수 없었던 데니스, 그는 지금 조용하고 점잖게 앉아 콘서트도 관람할 수 있다. 아무도 모른다. 이런 데니스를 곁에서 보는 나는 마치 꿈을 꾸는 듯한데, 그래서 어느새 눈물까지 어리는데….

그러나 정작 데니스보다 더 많이 변해버린 건 내가 아닐까? 데니스와의 생활을 일상이란 공간으로 녹여낼 수 있는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5년 전의 내 모습은 아니다. 내게 일상이란, 그러니까 사람들이 사는 단순한 삶의 공간이 있긴 했을까.

욕심, 그래 어쩌면 작품에 대한 욕심으로 골몰해버린 내게서 일상이란 이미 작품세계로부터 벗어난 다른 어떤 것도 끼어들 여지가 없었을 테니까. 데니스? 내가 손 내밀지 않고, 내가 관심 기울이지 않고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데니스가 내게 온 것은, 하여 기적이고 아이러니였다.

데니스는 나에게, 그러니까 그 정상적인(?) 사람들보다 어쩌면 더욱 정상적인(?), 그래서 조금도 불편함을 참지 못하는 나에게, 햇살이고 이슬이고 영롱한 눈물이고 화창한 희망이 됐다. 5년이 흐른 지금, 다시 돌아보며 나는 그런 데니스를 발견한다.

나는 지금 데니스가 좋아하는 요리를 하기 위해 언제나 요리를 배운다. 쪽지에다 필기하고 집에 돌아와 부엌에서 데니스를 위한 요리를 만든다. 청결한 걸 유난히 좋아하는 데니스를 위해 청소기를 들었다. 우리 집은, 데니스와 함께 있는 우리 집은 늘 청결하다. TV 속 영화를 보며 밤을 새던 나는 TV가 데니스에게 해롭다는 의사의 충고 한마디에 꺼버린 지 오래다. 나도 데니스도 우리 집에 오는 손님도 TV를 보지 않는다.

데니스와 있으면 나는 늘 기도하는 엄마가 된다. 데니스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나, 그러니까 데니스를 위해 인내하고 여유 있어야 할 나를 위해 기도하는 엄마가 된다. 짧은 내 신앙연륜은 뒤늦게 사랑을 배우고 은혜를 느낀다.

사람들은 내 얼굴을 보면서 말한다. 달라졌다, 변했다, 이제 여자가 된 것 같다, 심지어 네가 그 심현지니 라고 묻기도 할 정도로. 그러면 무엇일까? 이 늦은 나이에 가지런하고 웃음과 여유를 지닌 나를 찾게 만든 데니스의 힘, 그게 도대체 뭘까?

수많은 '데니스'를 보듬는 세상이 '선진사회'

▲데니스의 그림
순수한 영혼이다. 데니스의 힘은 늙지 않는 맑은 영혼이다. 영원히 그 순수함을 지닌 채 살아가는 데니스는 희망의 출구가 어디 놓였는지 이야기한다. 어쩌면 그런 순수한 영혼이 데니스가 존재하는 방식인지 모른다.

데니스는 그렇게 정상적인(?) 세상에 대해 비정상(?)의 대안을 말한다. 내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란 결국 언제나 순수한 영혼을 소유한 데니스를 볼 수 있게 하신 일이다.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나듯 어쩌면 데니스를 만남에 있어서 무엇보다 처음의 마음은 깨끗한 마음이 아닐 수 없다.

세상의 수많은 '데니스들', 나는 그들을 보는 마음을 지닌 사람들의 세상이야말로 비로소 '정상적인' 세상이며, 그런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야말로 '선진사회'라 믿는다. 그 사회를 측정하고 평가하는 첫 잣대가 있다면 그것은 마이너리티로 존재하는 수많은 '데니스들' 그들을 볼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보면 될 것이다. 경제, 인구, 군사력, 또 다른 무엇, 그 어떤 것도 이런 마음을 대신할 수 없다.

데니스의 땀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데니스의 첫 전시회 '위드(WITH)'...복잡하지만 단순한 영감으로 진한 감동

데니스의 그림은 복잡하지만 매우 단순하다. 똑 같은 색깔의 사람과 동물들이 등장하고 그들은 모두 같은 방향을 응시한다. 언제나 완전한 문장보다 단어 몇 개로 대화하는 데니스를 쉽게 그림에서 연상할 수 있다. 단순하고 서툴다. 그럼에도 데니스의 그림을 보면서 사람들은 감동한다. 이모는 그 까닭을 이렇게 말한다.

"데니스는 가슴의 시를 그대로 쏟아낸다. 어떤 거름장치도 없으며, 데니스의 가슴이 담고 있는 영감을 방해하지 않는다. 거기 데니스의 순수함이 촉촉이 젖어있다. 그런 그림이기에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속도 또한 빠른 것이 아닐까."

데니스의 그림은 서울에서 한 점도 남김없이 모두 팔렸다. 1500만원이 그림 값으로 입금됐다. 이모는 그 돈이 무엇보다 소중하게 느껴졌다. 보통 돈이 아니라고 했다. 데니스가 처음 번 돈이고, 데니스로선 어쩌면 너무나 힘들게 공부해서 얻은 결실이었다.

이모는 이 돈을 어떻게 쓸지 궁리하다 어렴풋한 결론을 내렸다. '씨', 무엇이 열리는 씨인지 모르지만 씨를 만들어 보자는 생각이었다. 돈이 씨가 될 수 있다면, 데니스의 땀이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씨가 될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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