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소재 참회와속죄의성당. 뉴스앤조이 김은석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소재 참회와속죄의성당. 뉴스앤조이 김은석

[뉴스앤조이-김은석 간사]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헤이리 예술 마을은 주말이면 적지 않은 인파가 몰리는 관광지입니다. 360번 지방도를 사이에 두고 이 마을 맞은편 언덕 초입에 눈에 띄는 건축물이 서 있습니다. 참회와속죄의성당입니다. 1995년 "통일을 위해 기도하는 성당이 필요하다"는 고 김수환 추기경의 설립 제안으로,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건립을 추진하여 2008년 완공했습니다. 한옥 양식의 지붕이 인상적인 이 성당의 외관은 평안북도 신의주시 진사동성당의 모습을, 내부는 함경남도 덕원군 성베네딕도 수도원의 대성당 모습을 재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누군가에게는 별다를 것 없는 주말 연휴의 시작이었을 6월 24일 오전 10시, 70명가량이 참회와속죄의성당 안에 모였습니다. 한국전쟁 발발 73주년 맞아 사단법인 하나누리(방인성 대표)와 비영리단체 이음새(신한열 대표)가 주관하고 <뉴스앤조이>·<가톨릭뉴스지금여기>·우리신학연구소가 협력한 '경계를 넘어 화해를 걷는 파주 평화 순례'에 참가하려고 온 순례자들입니다. 5세 어린이부터 70세 어르신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가톨릭·개신교 신자들이 모였습니다. 목회자들도 보이고 수녀들도 보입니다.

6월 24일 오전 10시, '경계를 넘어 화해를 걷는 파주 평화 순례'에 참가하기 위해 천주교와 개신교 신자 70명 가량이 참회와속죄의성당에 모였습니다.
6월 24일 오전 10시, '경계를 넘어 화해를 걷는 파주 평화 순례'에 참가하기 위해 가톨릭·개신교 신자 70명가량이 참회와속죄의성당에 모였습니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순례의 이끔이인 신한열 수사는 출발 전 여는 기도회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다양한 나이와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함께 기도하는 것 자체가 화해의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순례자들은 전후좌우 사람들과 "평화를 빕니다"라고 인사를 나눈 뒤 떼제 노래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를 불렀습니다.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나와 함께, 기도를 하라.

신한열 수사의 선창先唱에 덧입혀진 순례자들의 노랫소리가 성당 내부를 고요하지만 깊게 울렸습니다. 에베소서 2장 14~16절을 함께 읽고 나니, 이날 순례자들을 평화와 화해의 기도로 초대하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이 더욱 또렷이 다가왔습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다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 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시고 율법 조문과 규정을 모두 폐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희생하여 유다인과 이방인을 하나의 새 민족으로 만들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고 원수되었던 모든 요소를 없이하셨습니다." (공동번역)

신한열 수사의 선창 뒤에 덧입혀진 순례자들의 노랫소리가 성당 내부를 고요하지만 깊게 울렸습니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신한열 수사(사진 맨 앞 가운데)의 선창에 덧입혀진 순례자들의 노랫소리가 성당 내부를 고요하지만 깊게 울렸습니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기도회를 마친 순례자들의 첫 번째 순례지는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통일촌이었습니다. 참회와속죄의성당에서 버스를 타고 북쪽으로 20분을 달리면, 통일대교가 나옵니다. 통일촌에 들어가려면 이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여기서부터 민간인 출입 통제구역이기 때문에 군인들이 신원 확인을 하고 신분증을 걷어 갑니다.

통일촌은 남북간 체제 경쟁이 심했던 1973년에 정부가 이스라엘 키부츠(kibbutz)를 모델 삼아 조성한 대북 선전용 마을입니다. 군사분계선에서 4km 거리인 이 지역을 개간해 제대 군인과 실향민들이 살도록 했습니다. 쌀과 콩과 인삼을 특용작물로 재배하는데, 특히 콩이 유명해 '장단콩 마을'이 조성돼 있습니다. 순례자들은 사전 예약한 장단콩 마을 식당에서 장단콩 정식으로 이른 점심을 먹었습니다.

점심을 먹고 다시 통일대교를 건너기 위해 돌아가는 길에 사단법인 하나누리 전이슬 간사가 "하늘 위에는 휴전선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자"며 함께 성 프란체스코의 기도문을 묵상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주여, 나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후략)"

장산전망대는 날이 좋으면 탁 트인 전방으로 임진강과 초평도, 저 멀리 개성과 송악산까지 선명하게 보이는 곳입니다. 이 날은 구름이 낀 탓에 북한 지역이 뿌옇게 아른거렸습니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장산전망대는 날이 좋으면 탁 트인 전방으로 임진강과 초평도, 저 멀리 개성과 송악산까지 선명하게 보이는 곳입니다. 이 날은 구름이 낀 탓에 북한 지역이 뿌옇게 아른거렸습니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두 번째 순례지는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장산전망대였습니다. 날이 좋으면 탁 트인 전방에 임진강과 초평도, 저 멀리 개성과 송악산까지 선명하게 보이는 곳입니다. 구름 낀 날씨 탓에 뿌옇게 아른거리는 북녘땅을 바라보며 순례자들은 노래했습니다.

"주님 정의가 꽃피는 세상, 평화 가득한 생명 나라. 주님 정의가 꽃피는 세상, 이 땅 위에 이루어 주소서."
 

"주님 나라는 의와 평화, 성령 안에 있는 기쁨. 주님 열어 주소서. 그 문 우리 안에."

신한열 수사는 전쟁으로 인해 고통받아 온 남과 북의 사람들, 분단 체제가 만들어 낸 이념과 폭력에 희생된 사람들, 그리고 우리가 살아오면서 상처를 주고받은 이들을 떠올리며 화해의 제스처를 해 보자고 제안했습니다. 순례자들은 돌아다니면서 눈이 마주친 동료 순례자들과 서로의 손바닥에 용서와 화해의 십자가를 그으며, 때로는 속으로, 때로는 소리 내어 말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용서하십니다."

순례자들은 돌아다니며 눈이 마주친 동료 순례자들과 서로의 손바닥에 용서와 화해의 십자가를 긋고 때로는 속으로, 때로는 소리내어 말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용서하십니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순례자들은 서로의 손바닥에 용서와 화해의 십자가를 그으며 용서를 구하고 용서했습니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순례자 중에는 이산가족의 후손들도 있었고, 한국에 온 지 몇 년 되지 않은 탈북민도 있었습니다. 장산전망대 앞에서 탈북민 순례자가 북에 두고 온 어머니와 동생들을 생각하며 '사향가思鄕歌'를 부를 때는 또 다른 이산가족인 저들의 해후를 구하는 기도가 절로 흘러나왔습니다.

"내 고향을 떠나올 때 / 나의 어머니 문 앞에서 눈물 흘리며 / 잘 다녀오라 하시던 말씀 / 아 귀에 쟁쟁해
 

우리 집에서 멀지 않게 조금 나가면 / 작은 시내 돌돌 흐르고 / 어린 동생들 뛰노는 모양 / 아 눈에 삼삼해"

이 노래를 들으며 고향인 북한 땅을 가지 못하고 평생을 그리워만 하신 선친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는 순례자도 있었습니다. 그 순간 자신 역시 통일을 간절히 바라고 있음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북에 두고 온 어머니와 동생들을 그리워하며 '사향가'라는 노래를 부른 탈북민 순례자도 있었습니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북에 두고 온 어머니와 동생들을 그리워하며 '사향가'를 부른 탈북민 순례자도 있었습니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순례자들은 장산전망대에서 두 갈래로 흩어졌습니다. 한 무리는 율곡습지공원까지 평화누리길 8코스를 따라 걸었습니다. 무더위 속에서 한 걸음씩 내디디며 전쟁의 시간을 떠올리고, 화해의 그림을 그려 봤습니다. 때로는 침묵하고 때로는 대화하며 평화를 기원했습니다. 나무 그늘에서 간식으로 싸 온 오이 조각을 나눠 먹던 순례자들의 모습이 잊히지 않습니다. 화석정에서 쉬어 갈 때 아이들을 함박웃음 짓게 한 신한열 수사의 퀴즈 게임, 침묵할 때 들려온 물소리와 새소리는 우리의 더위를 식히고, 걸음을 가볍게 해 줬습니다.

다른 한 무리는 6·25납북자기념관으로 이동해 분단이 남긴 또 다른 상처를 응시했습니다. 통일 교육과 탈북민 가족 지원 사업을 펼치는 비영리단체 더하다의 정혁구 대표도 중학생 아들과 이번 순례에 함께했는데요. 오래전 납북된 외할아버지의 기록을 함께 찾아보면서 분단이 남긴 가족사의 아픔을 아들과 나눌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다음 세대에는 평화와 통일이 찾아오기를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게 됐다고도 했습니다.

순례자들은 장산전망대에서 두 갈래로 흩어졌습니다. 한 무리는 평화누리길 8코스를 따라 율곡습지공원까지 걸었습니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순례자들은 장산전망대에서 두 갈래로 흩어졌습니다. 한 무리는 평화누리길 8코스를 따라 율곡습지공원까지 걸었습니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순례자들은 무더위 속에서 한 걸음씩 내디디며 전쟁의 시간을 떠올리고, 화해의 그림을 그려 보았습니다. 때로는 침묵하고 때로는 대화하며 평화를 기원했습니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순례자들은 무더위 속에서 한 걸음씩 내디디며 전쟁의 시간을 떠올리고, 화해의 그림을 그려 봤습니다. 때로는 침묵하고 때로는 대화하며 평화를 기원했습니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마지막 순례 장소는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북한군 묘지였습니다.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는 37번 국도 문산 방향 바로 오른쪽에 위치한 이 묘역은, 정부가 제네바협약과 인도주의 정신을 따라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던 북한군과 중국군의 유해를 1996년 6월 한 곳에 모아 안장하기 위해 조성했다고 합니다. 한때 '적군 묘지' 혹은 '북한국·중국군 묘지'라고 불리기도 했으나, 2014~2016년 중국군 유해가 본국으로 송환되면서 '북한군 묘지'로 불리고 있습니다. 한국전쟁 때 사망한 북한군뿐 아니라 휴전 후 대남 침투 작전을 벌이다 사살된 북한군들의 유해도 묻혀 있습니다.

잘 관리되지 않은 평지 위에 낮게 세워진 묘비들이 오와 열을 맞추고 있어 휑하게 느껴졌던 묘역인데, 순례자들이 다 같이 들어서니 온기가 드리워진 느낌이었습니다. 순례자들은 묘역을 돌아다니며 이름이 새겨진 북한군의 묘비와 이름조차 알 수 없어 "무명인"으로 새겨진 북한군의 묘비를 찬찬히 내려다봤습니다. 그리고 함께 구상 시인의 '적군 묘지 앞에서'를 읽었습니다.

"오호, 여기 줄지어 누웠는 넋들은

눈도 감지 못하였겠고나

 

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썩어 문드러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

그래도 양지바른 드메를 골라

고이 파묻어 떼마저 입혔거니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 사랑보다도

더 너그러운 것이로다. (후략)"

잘 관리되지 않은 평지 위에 낮게 세워진 묘비들이 오와 열을 맞추고 있어 휑하게 느껴졌던 묘역인데, 순례자들이 다 같이 들어서니 온기가 드리워진 느낌이었습니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잘 관리되지 않은 평지 위에 낮게 세워진 묘비들이 오와 열을 맞추고 있어 휑하게 느껴졌던 묘역인데, 순례자들이 다 같이 들어서니 온기가 드리워진 느낌이었습니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적군의 묘역 위에 둘러 선 순례자들이 한 목소리로 기도를 올렸습니다.

"주여, 주 예수여, 저를 기억해 주소서. 주여, 주 예수여, 당신 나라 임하실 때."

신한열 수사는 마지막 순례지를 뒤로하고 다시 집결지로 돌아갈 순례자들에게 완곡하게 한 가지 결심을 하자고 권했습니다. 바로 '용서할 결심'입니다.

"여러분, 꼭 북한이나 공산당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우리 마음속에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화해는 다른 게 아닙니다. 원수가 형제 되고, 친구 되는 게 화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원수라고 여겼던 북한군이 우리의 동포요 형제였듯이, 우리 마음속에 원수처럼 용서하지 못한 누군가도 우리의 형제이고 친구이며 이웃입니다. 정말 내 마음을 괴롭히고 무겁게 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적군 묘지를 떠나면서 마음속으로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 돌아가면 좋겠습니다."

누구 한 명이 떠오르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를 위한 기도가 선뜻, 자연스럽게 흘러나오지는 않았습니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대화를 나눈 서범석 님(대한성공회 수원교회)은 과거의 자신을 용서하기 위한 기도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제가 싫어하는 제 모습과도 화해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다시 참회와속죄의성당으로 돌아온 순례자들은 다시 목소리를 모아 노래했습니다.

"두려워 말라. 걱정을 말라. 주님 계시니 아쉬움 없네. 두려워 말라. 걱정을 말라. 주님 안에서."

성당 내부를 깊게 울리는 노랫소리는, 용서가 삶에 일으킬 불편한 파동을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제 마음을 다독이는 듯했습니다. 마치는 기도회에서 함께 읽은 마태복음 5장 43~45절을 마음 밭에 더 깊이 새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말씀을 좇아, 나 자신이 그어 놓은 경계선을 넘어 일상 가운데 화해의 걸음 내딛기를 멈추지 말아야겠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새번역)

이제 경계를 넘어 화해를 걷는 일상의 순례가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이제 경계를 넘어 화해를 걷는 일상의 순례가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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