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작하면서

2021년 2월, 미얀마 군부는 2020년 총선이 부정선거였다고 주장하면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미얀마 사태가 2년이 다 되도록 장기화하는 이 시점에, 시민 불복종 운동(CDM) 시위·집회에 참여해 사망한 시민만 2565명에 이른다고 한다(미얀마 정치범지원협회 발표, 2022년 12월 8일 기준). 미얀마 민간전략연구소에서 지난 10월에 발표한 자료를 보면, 미얀마 전역에서 최소 7158명의 민간인이 생명을 잃었다. 군부의 폭압도 점점 수위를 높여 가고 있다. 내가 태국과 미얀마를 오가던 지난 12월 6일경에도 젊은이 6명이 사형을 당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 글은 지난 12월 3일부터 11일까지 태국·미얀마 접경 지역인 '메솟(Mae sot)'과 '폽푸라(Phop Phra)' 등을 GMS 한다윗 선교사와 함께 방문한 이야기다. 미얀마 군부의 폭격과 무자비한 총살을 피해 국경으로 이동한 피난민의 이야기를 통해, 미얀마 사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2. 닫힌 국경

2022년 12월 2일, 인천에서 6시간을 날아 방콕 수완나품공항에 도착한 후 다시 돈므앙공항에서 미얀마 국내선을 타고 12월 3일 메솟공항에 도착했다.

메솟 지역은 특별하다. 지리상 태국에 속해 있지만 군부 쿠데타 이전에도 수백만의 미얀마 피난민이 거주해 왔고, 유엔에서 담당하는 큰 규모의 '멜라 난민 캠프'가 위치해 있다. 뿐만 아니라 태국의 3대 쓰레기 마을 중 하나도 이곳에 있다. 메솟은 난민 지위를 얻지 못한 수많은 사람이 흩어져 살다가 죽어 사라지는 지역이어서, 전 세계 다양한 NGO 단체가 관심을 갖고 있다.

우리는 태국 메솟과 미얀마 미야와디를 잇는 출입국 관리 사무소를 방문했다. 코로나19와 군부 쿠데타로 굳게 닫힌 국경을 보며, 지난날 다리를 건너 미얀마 내지로 들어갔던 기억이 떠올라 무거운 마음을 추스르기가 쉽지 않았다.

국경이 닫혔다는 것은 외부로부터의 미얀마 지원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얘기였다. 우리는 각 관공서의 창고와 불교 사원 마당에 가득히 쌓인 구호품을 볼 수 있었다. 전 세계에서 미얀마 피난민들에게 보낸 이 물품들은 태국 국경에서 멈췄다. 우회로를 통하는 것도 쉽지 않다. 워낙 위험한 데다가 물품을 옮기는 이들이 상당한 비용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후원금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후원금을 미얀마 내지로 옮기는 '포터'들이 후원금을 들고 잠적하거나, 후원금을 옮기는 데 후원금만큼이나 높은 비용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굳게 닫힌 미얀마·태국 국경. 과거에는 활발한 교역이 이뤄지던 곳이었다. 사진 제공 이헌주
굳게 닫힌 미얀마·태국 국경. 과거에는 활발한 교역이 이뤄지던 곳이었다. 사진 제공 이헌주

미얀마의 가장 큰 교회 협의체인 미얀마침례교컨벤션(Myanmar Baptist Convention)이나 다른 컨벤션을 통한 지원도 어렵기는 매한가지라고 한다. 시민 불복종 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가담했던 사람들과 일가친척들이 모두 피난길에 오른 상황에서 그들을 직접 지원하는 건 어렵다고 했다. 이처럼 전 세계에서 각종 지원과 후원금이 오고 있지만, 닫힌 국경 앞에서 좌절할 때가 많으며, 결과적으로 미얀마 내부의 필요를 만족시키기는 쉽지는 않다고 한다.

3. 북적이는 국경 마을

메솟에는 출입국 관리 사무소를 정상적으로 통과한 사람들보다도, 군인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 강을 건너 태국으로 넘어온 사람이 많다. 특히, 군부의 폭압이 심해진 지난 1년 여간 메솟 지역 마을에 숨어 들어온 미얀마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태국 군인과 경찰도 인력의 한계로 이미 밀려온 사람들을 가두거나 돌려보내기보다, 피난민들이 태국 사람들이 사는 지역으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감시를 강화하는 정도에 머무르고 있다.

우리는 몇 개월 전부터 축사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을 방문했다. 소와 돼지를 키우는 축사 한쪽에 자리를 잡고 비와 바람을 피하는 사람들, 그곳에서 방치된 아이들을 만났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끼 식사 정도 되는 음식을 나누는 것뿐이었다.

임시 거처인 축사에 피난민들의 빨래가 널려 있다. 사진 제공 이헌주
임시 거처인 축사에 피난민들의 빨래가 널려 있다. 사진 제공 이헌주

다음 목적지는 메솟 쓰레기 마을이다. 메솟 쓰레기 마을에는 매일 수백 톤의 쓰레기가 모인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산처럼 쌓인 쓰레기를 뒤져서, 재활용할 수 있을 만한 것을 모아다 파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 간다. 어린아이들도 예외는 아니다. 손발이 움직일 수 있다면 누구든 쓰레기를 뒤져 돈 될 만한 것을 찾는다. 이 마을에도 1년 전부터는 미얀마 사람들이 몰려들어 살게 됐다. 모두 군부의 폭격을 피해 국경을 넘은 사람들이다. 전에는 교사·약사·의사였던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국경을 넘었고, 쓰레기 마을에 들어와 살고 있는 것이다.

빗물을 받아 식수로 사용하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곳. 그나마 교회가 후원해 준 태양광 전지가 설치된 가정이 하나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쓰레기 마을 사람들과 함께 성찬을 나눴다. 집과 직업을 잃고 쫓겨난, 일상을 잃은 사람들과 나누는 성찬이었다. 삶의 모습이 어떠하든 그리스도의 몸과 보혈을 통해 하나의 교회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고향에 돌아갈 날을 꿈꾸고 있었다. 헤어진 가족과 다시 만나고 고향에서의 일상을 회복하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메솟의 쓰레기 마을을 거닐고 있는 어린이. 사진 제공 이헌주
메솟의 쓰레기 마을을 거닐고 있는 어린이. 사진 제공 이헌주

이곳에 있는 메따오교회는 30~40명이었던 아이들이 2022년 한 해 동안 120명으로 늘었다. 그러나 이것이 부흥이라고 할 수 있을까? 모두 부모와 함께 피난 온 아이들이다. 부모의 요청으로 교회에 떠맡겨진 아이들이 70명이나 된다. 이 아이들은 교회 곳곳에 흩어져 먹고 잔다. 교회인지 피난민 수용소인지 구분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끼 식사가 전부였다. 여기까지가 나의 힘이 닿는 곳이다. 미안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지만, 딱히 그 이상을 할 수 없는 무력감이 차올랐다. 나는 계속 되뇌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딱 '손과 발이 닿는 곳'까지구나,라고.

4. 강을 넘다

한국의 몇몇 지인들이 후원해 마련된 기금으로 구호품을 사서 미얀마 내지의 피난민에게 넘겨 주기로 했다. 차량 한 대 정도의 적은 분량이었지만 이마저도 미얀마로 넘기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12월 5일은 태국 푸미폰 국왕 라마 9세의 생일이라 메솟 국경은 더욱 삼엄했다.

우리는 쌀 200포, 기름 10박스, 라면 20박스, 미원 20kg 등을 준비해 메솟에서 차량으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폽푸라'로 가기로 했다. 메솟과 폽푸라 건너편의 미얀마 카렌주는 카렌족이 담당하는 곳이어서, 카렌족 출신 목사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우리는 미얀마 내지 피난민이 모인 곳을 물색하고, 가장 접근하기 용이한 곳에 있는 피난민들에게 가기로 결정했다.

태국과 미얀마를 잇는 다리를 건너는 시간은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은 다리를 건넜어도 물건을 그리로 옮기는 것은 불가했다. 구호품은 군인들의 눈을 피해 다른 루트로 강을 건넜다. 강 건너 미얀마 피난민들이 모인 곳은 국경에서 멀지 않았다. 걸어서 10여 분을 이동하자, 급조된 집들이 곳곳에 보였다. 마을에 들어서자 보이는 현황판. 이곳에는 655명의 피난민이 모여 있었다.

미얀마 내지로 전달한 구호품(사진 위)과 미얀마 피난민 마을(사진 아래). 사진 제공 이헌주
미얀마 내지로 전달한 구호품(사진 위)과 미얀마 피난민 마을(사진 아래). 사진 제공 이헌주

군부의 폭격을 피해 국경으로 몰려온 사람들에게 거주할 곳이 있을 리가 없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한 분의 후원으로 이곳에 마을이 만들어졌다. 그렇게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게 됐지만, 당장 경제활동이 불가한 이들에게 먹고 마시는 문제는 또 다른 어려움이었다. 이들에게는 카렌족 교회를 통해 받는 구호품이 지원의 전부다. 마을 한 곳에 구호품을 모아 놓고 공동으로 식사를 준비해 함께 나눈다.

마을 사람들은 한국에서 온 우리를 환대했다. 자신들의 전통 춤을 보여 줬고 아이들도 노래를 불렀다. 피난길에서 만난 하나님에 대한 간증까지 이어졌다. 지난 1년 사이에 태어난 아기도 만났다. 이들 모두가 고향에 돌아갈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하루를 살고 있었다. 우리는 한국 찬양을 듣고 싶다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한국어와 미얀마어로 함께 찬양을 불렀다.

"주 품에 품으소서. 능력의 팔로 덮으소서. 거친 파도 날 향해 와도 주와 함께 날아오르리. 폭풍 가운데 나의 영혼 잠잠하게 주를 보리라."

피난민 마을에 모인 미얀마 사람들과 함께 한국어·미얀마어로 찬양을 불렀다. 사진 제공 이헌주
피난민 마을에 모인 미얀마 사람들과 함께 한국어·미얀마어로 찬양을 불렀다. 사진 제공 이헌주

마을 촌장이 나에게 "언제 다시 오느냐"고 물었다. "See you soon…" 나의 대답은 두루뭉술한 어느 때만을 약속했다. 그는 "꼭 다시 오라"는 말을 반복했다. 나는 그 말을 뒤로하고 감시자들의 눈을 피해 다시 태국으로 돌아가는 강을 건너야 했다.

이헌주 / 교회개혁실천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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