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 기고는 <뉴스앤조이>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편집자 주 
이 글은 <기독교사상> 766호에 실린 '세계를 구원할 가능성이 담긴 책'을 대폭 보완한 것임을 밝힙니다. - 필자 주
1. 지금의 위기는 기둥이 흔들리는 위기다

기독교에 대한 가장 본질적인 비판은 무엇일까? 마르크스가 헤겔의 법철학을 비판하는 글에 남긴 짧은 문구가 아닐까? 마르크스는 그 글에서 종교, 즉 기독교가 역사의 진보를 가로막고 민중의 계급투쟁 의지를 마비시킨다고 일갈했다. '계급투쟁'이 역사 진보의 원동력이라고 보는 변증법적 유물사관에 대한 동의 여부를 떠나, 기독교에 대한 마르크스의 저 비판은 오늘날에도 적확하다. 불편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계급투쟁 의지' 대신에 '새로운 사회를 형성하고자 하는 의지'을 넣어 보라. 바로 수긍하게 된다. 김회권은 <자비경제학>(PCKBOOKS) 서문에서 '인민의 아편'이 기독교에 대한 가장 대중적인 오해라고 말하고 있지만, A. D. 313년 공인된 이후 기독교는 한 번도 저 비판을 제대로 극복한 적이 없다.

여기서 '인민의 아편'으로 전락한 신앙이 보이는 행태는 다양하다. 우선 '우리는 기도하고 하나님은 일하신다'면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심지어 기도도 안 한다. 해도 두루뭉술하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굳게 믿으면서 불의가 판치고 억울한 사람이 양산되는 상황에서도 팔짱을 끼고 사태를 관망하는 행태 또한 인민의 아편이다. 관망만 하면 그나마 다행이다. 이런 사람들은 '소망'이라는 그럴싸한 용어 뒤에 숨어 있다가 다른 사람(주로 비기독인이다)이 피 흘려 만든 성과를 누리면서 "하나님이 하셨다"라고 말한다. 인민의 아편으로 전락한 신앙은 역사의 희생자에 대한 감사가 없다. 어떤 경우에는 '어차피 이 세상은 썩어 없어진다'는 그릇된 종말론에 기대서 마음의 평안과 자녀의 취직에 신앙을 도구적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물론 인민의 아편으로서의 신앙은 대단한 행함에서도 드러난다. 불의한 권력을 열과 성을 다해 지지하는 게 대표적이다. 유언비어가 가득 담긴 카카오톡 메시지를 공유하는 데 '열심'이고, 성경이 지지하는 차별금지법을 막겠다며 국회의원들에게 전화하는 것은 물론, 광화문에 나가 목소리를 높이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입으로는 평화와 긍휼을 말하나 실제 행동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갈등과 혐오를 증폭하는 것이다. 이렇게 인민의 아편으로서의 기독교의 행태가 누적된 결과, 기독교의 대사회적 신뢰도는 바닥으로 떨어졌고1), 기독교는 이제 우리 사회의 핵심 문제를 파악할 수 있는 눈을 제공하지 못하는, 어두운 역사를 밝히는 동력을 기대할 수 없는 종교가 돼 버렸다.

그렇다. 오늘날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기독교는 위기다. 그렇다면 위기의 원인은 무엇일까? 앞서 말했듯이 행함이 없어서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살펴봐도 그렇다. 구약의 이스라엘도, 신약에 등장하는 1세기 유대인들도 행함은 대단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다. 근본적으로 들어가면 결국 위기의 원인은 성경과 역사에 대한 잘못된 이해 혹은 그릇된 해석일 수밖에 없다. 행위 뒤에는 그것을 정당화해 주는 생각이 있고,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기독인의 행위는 결국 성경과 역사에 대한 일정한 이해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현재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하나님나라신학'이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하나님나라 관점에서 성경과 역사를 해석하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져야 할 시점이 '내생'이 아니라 '금생'이고 장소도 '저세상'이 아니라 '이 세상'이라는 말은 기독인 사이에 두루 공유되는 것이어서 어찌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구할 하나님나라가 무엇이고 어떻게 이룰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허망해진다. 돌아오는 대답은 늘 두루뭉술하다. 모든 걸 말한 것 같지만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더 큰 문제는 지금 여기서 구해야 할 하나님나라가 제각각이라는 점이다. 이런 까닭에 한국교회에서 하나님나라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로 전락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교회를 버젓이 세습하는 목회자도, 북한을 타도해야 할 악마로 규정하는 교회도, 힘 있는 독재자와 미국과 이스라엘을 숭배하는 교인들도 하나님나라를 구하자고 소리를 높인다. 하나님나라를 구하려면 머릿속에 뭔가 떠올라야 하는데, 지금까지 교회는 정작 구해야 할 그것이 무엇인지 묻지도 고민하지도 않았다. 그런 까닭에 제대로 된 이행 전략도 있을 수 없었다.

바야흐로 지금은 성경과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등장해야 할 때다. 즉, 기독교의 양대 기둥을 다시 세울 때다. 점점 심해지는 경제 불평등으로 인한 민중의 아우성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는 성경 해석, 우리와 후세대가 함께 누려야 할 생태 환경의 파괴에서 비롯한 피조물의 신음을 들을 수 있는 성경 해석, 파편화한 세계의 현실을 하나의 전체 문맥 속에서 파악하도록 도울 수 있는 성경과 역사 해석, 지금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작은 순종이 이 세계를 구할 수 있다는 역사 해석, 그러면서 회개가 의미 있는 실천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구원론을 담은 성경 해석이 등장해야 한다. 우린 기억해야 한다. 16세기 종교개혁을 촉발시킨 것이 성경에 대한 루터의 새로운 해석이었다는 것을.

이런 문제의식으로 필자는 두 권의 책에 대한 비교 서평을 썼다. 김회권 교수의 신간 <자비경제학>과 이미 2008년에 발간된 강인태 목사의 <하비루의 길>(케노시스영성원)이 그것인데, 필자는 이 책들과 저자들의 사상에서 올바른 역사 해석과 성경 해석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어찌 보면 신학자가 아닌 필자가 주제넘게 이런 글을 썼다는 얘기가 나올 것 같아 글의 동기를 밝히고자 한다. 지금의 기독교는 기둥이 흔들릴 정도로 위급한 상황인데, 필자의 눈에는 아무도 그런 말을 안 하는 것처럼 보인다. 건물로 치면 지금의 위기는 지붕이 낡아서가 아니다. 그렇다고 페인트칠이 벗겨져서도 아니다. 지금의 위기는 성경 해석과 역사 해석이라는 양대 기둥에 금이 쩍 가고 흔들리는 근본적인 문제다. 그렇다고 필자가 양대 기둥을 새로 세울 역량이 있는 것은 아니다. 기독인으로서 이 문제를 피할 수 없었기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그런 해석이 등장하길 고대하고 있었다. 이러던 차에 지금 소개할 두 권의 책을 만나 숙독해 가면서, 이 책에 들어 있는 재료로 성경 해석과 역사 해석의 기둥을 새롭게 세우자고 제안하고 싶은 열망이 생겼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비교 서평으로 들어가 보자.

2. 김회권: 구약 전체를 새롭게 조망·해석하다

통섭의 신학자 김회권

김회권은 요즘 말로 하면 통섭의 신학자다. 왜 그런지는 지금 소개하는 <자비경제학>을 읽어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성경학을 바탕으로 역사학·철학·경제학·정치학뿐만 아니라 생물학·물리학 등 자연과학의 연구 성과들을 자유롭게 활용해 자신의 논리를 구성한다. 일찍이 이런 신학자를 본 일이 없다. 김회권은 성경학자이면서 기독교 문명 비평가 혹은 역사철학자로도 불릴 만하다.

<자비경제학 - 구약성경과 하나님나라 경제학> / 김회권 지음 / PCKBOOKS 펴냄 / 456쪽 / 2만 2000원 
<자비경제학 - 구약성경과 하나님나라 경제학> / 김회권 지음 / PCKBOOKS 펴냄 / 456쪽 / 2만 2000원 

그의 책 2장에서 집중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오늘날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도 수준급이다. 불평등과 고용 없는 성장이라는 특징을 보여 주고 있는 오늘날 금융자본주의의 현실을 유려한 필체와 논리로 전개한다. 주장의 근거로 사용한 논문들과 책의 목록을 보면, 성경 연구를 하면서 언제 이런 문헌들을 읽었는지 놀랍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사회과학 연구 논문들과 저명한 정치경제학자인 토마 피케티나 칼 폴라니, 헨리 조지 등이 쓴 저작의 핵심 내용을 자유자재로 활용한다. 거기에다 시장경제의 우수성을 규명한 학자로, 혹은 경제학의 창시자로 알려진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시장 만능주의를 주창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국부론>보다 한참 전에 쓴 <도덕감정론>을 통해서 밝혀낸 부분을 읽으며 감탄이 절로 나왔다. <도덕감정론>을 직접 읽고 정리하면서 스미스가 구상한 경제체제가 정의 도덕과 자비 도덕에 바탕을 두었다는 점을 논증하니 말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지적 호기심의 발로일까? 그럴 수도 있겠으나 필자는 하나님의 관심과 그의 관심이 일치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하나님의 관심은 좁은 의미의 교회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관심 대상은 인류 역사, 창조 세계 전체다.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포함한 피조물 전체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실 뿐 아니라 탄식하시고 그 고통에 동참하시는 분이다. 이런 까닭에 김회권의 관심도 세계 역사 전체가 되는 게 자연스럽고 거기에서 나오는 고통의 소리를 모든 학문을 통해서 들으려고 한 것이라고 필자는 이해한다.

대천덕보다 더 대천덕에 가까운 김회권의 성경 해석

이제 <자비경제학>의 핵심 내용으로 들어가 보자. 김회권은 이 책에서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나라의 경제학을 전개한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전개한 하나님나라 경제학의 기본 아이디어가 예수원 설립자인 고 대천덕 신부에게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대천덕 신부는 일찍이 북이스라엘의 오므리-아합 왕가가 소수가 땅을 독차지하는 바알의 토지법을 들여왔고, 그때부터 시내산 율법의 핵심인 토지 정의가 훼손됐으며, 그 결과로 나타난 자유농민의 소작인화가 이스라엘 멸망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기본 인식을 바탕으로, 김회권은 저서에서 토지 정의가 모세오경은 물론, 이사야·아모스·미가·호세아·예레미야의 중심 주제임을 치열하게 밝힌다. 그냥 읽으면 토지 정의와 무관하게 보이는 성경의 본문도 역사적 맥락과 단어의 본뜻 풀이를 통하면 성경이 말하려고 하는 바를 '마침내' 드러낸다. 이런 까닭에 그는 구약의 예언자를 정치경제학자로 명명하고, 정치경제학적 상상력을 동원해 당시 이스라엘 붕괴의 전모를 파헤친다. 마치 대천덕 신부의 '위대한' 통찰을 입증하려고 글을 쓴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필자가 봤을 때 그의 글은 대천덕보다 더 대천덕에 가깝다.

바로 여기서 그가 신학이 아닌 기타 학문 중 유독 정치경제학에 집중한 까닭을 발견하게 된다. 인문학에 조예가 깊은 신학자들은 많다. 가난하고 힘든 사람을 주된 대상으로 하는 사회복지학에 관심 있는 신학자들도 제법 있다. 그런데 희한하게 정치경제학에 관심을 두는 신학자는 소수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정치경제학적 해석을 하지 않으면 불의의 핵심 원인, 복지 수혜자들이 폭증하는 원인, 즉 성경이 말하는 가난한 자, 눈먼 자, 고아와 과부 등이 폭증하는 원인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정치경제학적 해석을 하지 않으면 성경에 무수히 등장하는 '죄'와 '우상숭배'의 본질을 드러내기 어렵다. 정치경제학적 분석을 통과하지 못하면 죄와 우상숭배를 좁은 의미의 종교적인 영역 안에 가두는 우를 범하게 되고, 결국에는 기독인들이 구약을 멀리하게 되는 결과까지 초래하게 되는데, 김회권은 이런 한계를 너끈히 극복한다. 구약 예언자들의 정치경제학으로 들어간 것이다. 

가슴 뛰게 하는 십계명 해석

<자비경제학>에서 가장 흥분되는 장은 6장 '십계명 제1계명의 사회경제적 함의'다. 필자는 6장을 탐독하고 흥분돼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밖을 한참이나 서성거려야 했다. 기독인/비기독인을 떠나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라는 십계명의 제1계명을 접하면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단어가 '배타성'이다. 기독교가 배타적인 종교라는 이미지의 절반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김회권은 십계명이 결코 배타적인 종교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힘주어 강조한다. 그 계명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법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신들에 대한 숭배 금지가 십계명의 첫 계명으로 자리 잡은 이유는 왕실과 상류층의 토지 수탈과 착취를 정당화하는 신들인 '바알-아세라'가 이스라엘의 자유농민의 땅을 빼앗고 사회를 해체하고 멸망을 불러온 근본 원인이라는 깊은 신학적 성찰의 결과였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에 이르려면 "십계명을 포함한 구약성경의 율법들을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일방적으로 선포해 제정해 준 신성한 법"(323쪽)이라는 성경관을 극복해야 한다. 상식적으로 곰곰이 생각해 보면, 십계명을 광야 생활 당시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불러 주신 것으로 생각하는 전통적 성경관은 한계를 지닌다. 김회권이 말하듯이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 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라는 제4계명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제10계명은 이스라엘 사회가 종, 객 등으로 계층화한 이후에야 의미 있게 들리는 계명이다. 하지만 광야 생활 당시에는 땅 혹은 전토 자체가 없었으며, 종과 노예, 문 안에 머무는 객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이 두 계명을 포함한 십계명은 사회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유력한 지배층 사람들의 탐욕과 죄악을 경계하고 억제하는 법, 즉 땅을 빼앗겨서 착취당하는 민중들의 아우성이 반영된 법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다.

십계명이 상정한 사회는 확실히 바알-아세라와 같은 '다른 신들'을 경험한 이후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다른 신을 섬기는 것, 즉 제1계명을 어기는 일은 자유농민의 땅을 강탈하는 것이 되고, 그것은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제10계명을 어기는 일, 요약하면 거룩한 나라의 경제 질서를 붕괴시키는 사건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 이렇게 십계명에서 우상숭배가 엄격히 배격된 이유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에게서는 지배층의 탐욕과 권력 남용을 제지할 권위가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는커녕 '다른 신들'은 특권층의 탐욕과 권력 남용을 정당화해 준다. 이렇게 정리하면서 김회권은 구약의 율법들은 고통당하는 백성(민중)의 아우성이 하나님께 상달돼 각 시대에 맞게 조율된 신-인 합의의 산물이라고 결론 맺는다.

십계명에 대한 이런 해석은 대천덕 신부에게서는 기대하기 어렵다. 왜냐면 대천덕 신부의 성경관은 십계명은 광야 생활 당대에 하나님이 불러 주신 것이라는 관점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위와 같은 김회권의 성경관과 해석이 대천덕 신부의 주장을 더 든든히 지지해 주고 있다. 필자는 김회권의 성경관이 사실에 가깝다고 본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권위가 훼손되는 것도 아니다. 김회권이 말하듯 십계명을 비롯한 성문 율법들은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참사를 겪은 후에 완성됐다고 보는 것이 성경을 성경답게 해 주고, 하나님을 더 하나님 되게 해 준다고 본다. 십계명에 대한 이와 같은 해석은 십계명을 단순히 관념적으로, 좁은 의미의 종교적 언어로 이해하고 있는 필자와 같은 신앙인들을 흔들어 깨우는 데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두 번째로 흥미로운 점은 안식일·안식년·희년을 핵심으로 하는 모세 율법 체계의 역사적 기원을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찾는다는 점이다. 특히 B. C. 40세기에서 B. C. 20세기까지 존속했던 고대 수메르문명권의 경우 왕과 평민 모두 천혜 자원을 공유한 경험이 있었다는 점을 들어, 이 문명에서는 신들의 초월적 통치에 대한 두려움과 땅을 경작하는 농민들에 대한 존중이 내재돼 있다고 주장한다. 또 땅을 잃고 나라에 대한 소속감을 상실해 표류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나라 경영에 어려움이 생기기 때문에, 함무라비의 법들은 노예해방이나 채무 변제 칙령들을 발표했다는 점도 밝히고 있다. 이런 역사적 기원이 있는 형평법령과 자비 법령을 고대 이스라엘이 계승해 독특하게 발전시킨 것이 바로 안식일·안식년·희년에 대한 법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물론 김회권이 언급하지 않지만 시내산 율법의 내용이 훨씬 포괄적이고 촘촘하며, 특정 왕의 시혜적 성격을 극복하기 위해, 즉 지속성을 담보하기 위해 항구적으로 제도화했다는 점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다. 게다가 시내산 율법은 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사회가 아니라 자유롭고 당당한 자유농민을 주축으로 하는 지파 연합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다.

이 부분을 읽고 과연 그럴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당대로 돌아가서, 특히 모세의 입장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김회권의 해석이 사실에 부합하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 이집트의 왕자였던 모세는 당연히 위와 같은 역사와 철학과 종교를 섭렵했을 것이다. 더구나 그의 주된 관심이 히브리 노예를 해방해 모든 사람이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안연히 살아가는 거룩한 나라를 형성하는 것이었다면, 이런 역사적 사실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 하나 무릎을 친 부분은 시내산 율법의 강조점이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난을 청산하라는 것에 있다는 주장에 대한 반대 논거로 항상 제시돼 왔던 구절인 "땅에서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치니라"(신 15:11)에 대한 본뜻 주해다. 이 구절이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기독인을 낙담시키는 용도로 사용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속담과 함께 말이다. 그런데 김회권은 히브리어 구문으로 보면 "정녕 가난한 자가 땅의 소출을 누리는 데 있어서 절대로 배제되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382쪽)가 올바른 해석이라고 주장한다. 즉, 신명기 15장 11절은 공평한 토지 분배를 강조한 것이다.

토지 기본 소득이라는 대안 제시

그러면서 그는 토지를 바탕으로 한 기본 소득을 토지 정의를 구현할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한다. 재산권의 신성함을 논하는 로크의 토지 사유제를 반박하는 동시에 기본 소득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토마스 페인의 토지 정의론을 자세하게 정리하면서 토지 기본 소득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러면서 이 대안이 모세오경의 땅신학에 근거했다고 주장한다. 기본 소득의 성경적 토대가 분명함을 논증한 것이다. 여기에서 김회권이 단순한 문명 비평가가 아니라 대안을 제시하는 신학자임을 알 수 있다.

한편 필자에게 이 책이 반가웠던 이유는, 지금까지 인류 역사에서 전개돼 온 공평과 정의의 역사를 모두 하나님나라의 역사라고 선언하기 때문이었다. 그에게서 세속의 역사와 교회의 역사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왜냐면 역사 속에 공평과 정의를 부르짖는 모든 곳에 하나님이 내재하시기 때문이다.

예전부터 필자는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라고 하려면 세계 역사에서 일어난 모든 정의로운 움직임을 성경으로 품어 안을 수 있어야 하고, 역사의 흥망성쇠도 성경으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아가서 성도의 신앙적 행위가 어떻게 역사를 바꿀 수 있는지가 설명돼야 한다고 봤다. 하지만 필자가 지금까지 봐온 책, 특히 교회사 관련 책들은 그렇지 않았다. 성경의 관점에서 교회사와 세계사를 통합해서 하나로 다루는 책은 보지 못했고, 세계 구원과 신앙 공동체의 관계를 다루는 책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서술은 없지만, 최소한 김회권은 하나님을 명실상부한 역사의 주관자로 묘사하고 있다.

'개인 구원/사회 구원' 도식을 넘어설 수 없을까?

하지만 그의 책에서 느끼는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기존 구원관 도식인 개인 구원/사회 구원의 틀을 그대로 가져간다는 점이다. 이것은 "한국교회는 개인 구원에 대한 과도한 집착에 비하여 사회적 구원인 공평과 정의에 대한 관심을 다소 결여하고 있다."(293쪽)는 문장에 드러난다. 그리고 이런 구도는 '사회 선교'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쓴 그의 논문 '사회 선교의 정당성과 전망에 대한 고찰'(김회권. 2021. <신학과실천>. vol. 73. 749~786쪽)에서도 그대로 묻어난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개인 구원은 무엇일까? 자세한 설명은 없으나 문맥상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죄 사함의 은총을 누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의미할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사회적 구원은 아마도 이 책이 강조하는 부분일 것이다. 이것은 한국교회 주류의 구분이기도 하다. 사회변혁에 관심 있는 기독인들이 주로 언급하는 '로잔 언약'도 이 구분을 따르고 있다. 로잔 언약은 복음 전도와 사회정의 추구는 동반자 관계로서 동시에 추구해야 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 틀은 십계명을 포함한 시내산 율법과 그 정신으로 돌아오라는 예언자의 메시지, 그리고 율법과 예언자를 완성하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흡수하지 못한다. 기존의 '개인 구원/사회 구원' 혹은 '복음 전도/사회 선교'에서 개인 구원이 '존재의 변화'를 의미한다면, 사회 구원은 변화된 존재가 전개해야 할 '실천의 영역'으로 구분되는데, 이렇게 되면 결국 사회 구원(사회 선교)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 사항으로만 남게 된다는 난점이 생긴다.

이 둘이 결합 되려면 구원의 필수 조건인 회개의 내용에 김회권이 새롭게 해석한 십계명과 예언자들이 외친 공평과 정의에 바탕을 둔 토지 정의 법령들이 들어와야 한다. 십계명을 지키지 않아서 나라가 망한 것처럼 십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결론이 도출돼야 한다. 이렇게 해야 개인 구원/사회 구원이라는 도식을 극복할 수 있고, 사회 구원을 위한 활동이 선택 사항으로 전락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으며, 구약과 신약을 하나의 맥락으로 연결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김회권의 책에서는 그것을 발견할 수 없다. 

필자가 개인 구원/사회 구원이라는 종래의 틀을 비판하는 까닭은, 이 틀에 머물러 버리면 기독교의 세계 구원 가능성을 담보하기도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가 십계명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뒤집어 설명하면, 만약 이스라엘이 십계명과 토지 정의를 지켰다면 세계가 이스라엘을 통해 복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 된다. 즉, 계명을 지키는 일이 세계 구원의 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에서도 회개한 신자들에게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희년을 핵심으로 하는 '계명에 순종하는 삶'이라는 구원론이 세계 구원으로 이어지는데, 김회권의 구원론에서는 그것을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3. 강인태: 하나님의 심정으로 성경과 역사를 새롭게 해석하다

하나님 체험에서 시작된 강인태의 독창적인 성경 해석

경기 군포에 위치한 둔대케노시스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강인태는 60대 후반의 목사다. 찢어지는 가난 때문에 중·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통과했고 어렵게 감리교신학대학을 졸업했다. 학문에 뜻이 있어 대학원까지 다녔지만 박사과정까지 마치지는 못했다. 서울대 영문과를 나와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신학 박사를 했고 숭실대 교수라는 직함과 이력을 가진 김회권과 비교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그가 쓴 <하비루의 길>과 <죄인의 길>(케노시스영성원)은 김회권의 <자비경제학>보다 더 호소력이 있다. 여기서 내가 말한 호소력의 핵심은 강인태의 책이 김회권의 책보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한다는 점이다.

<하비루의 길 - 자기 비움의 길 제1부> / 길동무(강인태) 지음 / 케노시스영성원 펴냄 / 400쪽 / 1만 7000원 
<하비루의 길 - 자기 비움의 길 제1부> / 길동무(강인태) 지음 / 케노시스영성원 펴냄 / 400쪽 / 1만 7000원 

강인태의 성경 해석과 역사 해석이 지닌 독특함과 탁월함은 어디서 온 걸까? 자신의 영성 체험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비움의 길>(케노시스영성원)에서 자세히 설명해 놓고 있는데,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의 체험은 천국을 갔다 왔다는 이야기도, 병 고치는 능력도, 다른 사람의 생각을 꿰뚫어 보는 투시도, 미래에 일어날 일을 척척 알아맞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는 체험, 하나님 면전에 서는 체험이다. 마치 예언자 이사야가 하나님을 체험한 것과 거의 유사한 체험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이와 같은 하나님 체험이 그의 성경과 역사를 보는 눈 전체를 뒤바꿔 놓는 계기가 됐다는 점이다.

강렬한 '체험'을 한 사람, 그걸 강조하는 사람은 성경 해석이 약하다. 아니 성경 해석을 무시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체험을 새로운 성경 해석의 바탕으로 삼는다. 생생한 하나님 체험이 모세오경·예언서·역사서, 신약성경 전반을 완전히 새롭게 보게 했다는 것이다.2) 체험 이후에는 모세오경을 읽으면 히브리 노예들의 삶을 보면서 가슴이 타들어 가는 모세의 마음과 하나가 되고, 복음서를 읽으면 제자들의 마음이 됐다고 한다. 그의 체험과 영성에 관해서 쓴 <비움의 길>에서 흥미로운 점은 그의 영성이 동양의 영성과도 유사한 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종교 혼합주의나 다원주의와는 전혀 거리가 멀다. 그의 영성에는 하나님의 탄식, 아니 통곡이 들어 있다.

한편 체험을 바탕으로 성경과 역사를 해석한다고 해서 그가 기존의 연구 성과를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그의 주요 저작인 <하비루의 길>과 <죄인의 길>은 사도 바울을 닮아 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후 이방인 선교 신학을 완성하는 데 약 14년이 걸렸듯, 강인태도 체험 이후 10여 년간 기존의 학문 성과와 씨름하며 두 책을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김회권의 책과 달리 강인태의 책은 술술 읽힌다. 물론 본인이 쉽게 쓰려고 매우 노력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점은 강인태의 모세오경·예언서 주해가 김회권의 것과 거의 일치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강인태는 십계명 제1계명을 설명할 때 김회권처럼 논증하지 않는다. 강인태는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의 본뜻은 배타적 신관의 강조가 아니라 우상을 섬기면 이집트에서 겪었던 비참한 노예 생활로 돌아갈 수밖에 없으니 그러지 말라는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이 담긴 것이라고 설명한다. 나아가 노예처럼 살아가는 열방의 모든 민족을 구원하라는 말씀이라고 설명한다. 이처럼 두 사람은 표현만 달랐지 내용은 거의 일치한다. 강인태가 보다 설득력 있어 보이는데, 그건 아마도 그의 해석이 상식의 논리로, 자명성의 원리로 접근하기 때문일 것이고, 이것 역시 그의 체험과 관련이 있다. 그는 하나님을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만물의 이치와 '법'으로 만났다는 점을 강조한다.

질문과 답변으로 서술된 <하비루의 길>

성경은 가장 오래된, 그러면서도 가장 긴 역사책이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 방식은 자세한 설명이 아니라 마치 시처럼 함축적이고 중요한 내용이 숨겨져 있는 경우가 다반사다. 다시 말해, 표면적 의미와 이면적 의미가 다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특히 구약의 대부분은 지금으로부터 최소 2500년 전에 기록된 고문서이기 때문에 당시 시대 상황이나 표현 방법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엉뚱한 해석으로 흘러가기 십상이다. 그런 까닭에 묻지 않으면 그 의미를 알 수 없다. 예를 들어 창세기에는 노아 홍수 때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것을 후회한다고 표현돼 있는데, 대체 그것이 무엇인지 물어야 그 진의를 알 수 있다. 성경 이해에 있어 질문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강인태는 질문의 답을 구할 때는 하나님의 심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영성의 길을 끝까지 갔을 때 최종의 결과는 '하나님의 심정'"(24쪽)이기 때문이다. 그는 성경 66권도 이렇게 하나님의 심정이 주어진 자에 의해 기록된 것이라고 강조한다. 즉, 성경은 하나님이 불러 주신 것을 단순히 받아 적어 놓은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하비루의 길>은 질문에 답하는 방식으로 서술돼 있다. 기독인들이 평소에 궁금해하는 선악과는 대체 왜 만들었는지, 노아의홍수와 같은 하나님의 심판은 무엇을 말하는지, 왜 가나안을 거룩한 땅이라고 하는지 등 76개 질문을 던지고 이 질문에 답하는 방식으로 내용이 구성돼 있다.

이 중에서 그의 독창적인 성경 해석이 잘 드러나는 부분은 가나안 '정복' 전쟁에 관한 부분이다. 우리가 알고 있듯 여호수아서에서는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가나안에 들어가서 성들을 점령하면서 남녀노소는 물론이고 가축들까지, 코로 숨 쉬는 것은 다 몰살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런 내용 때문에, 이런 내용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기독인들 때문에 양식 있는 허다한 지성인들이 기독교에 부담을 느끼고 떠난다. 예수님과 전혀 다른, 잔인하고 배타적인 구약의 신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내용은 멀게는 십자군 전쟁으로부터 가깝게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 지배와 수탈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강인태는 질문한다. "구약성경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면 과연 이런 일을 명령하셨을까?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는 이유로 남녀노소는 물론 가축까지 무자비하게 몰살시켜 버리라고 한다면 과연 참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을까?"(167쪽) 이렇게 누구든 물을 수 있는 질문을 던진 후, 그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은 가나안에 거주하고 있는 토착 하비루(노예)들의 해방운동이라는 해석을 내놓는다. 우상 종교 속에서 노예처럼 비참하게 살아가는 가나안 지역 사람들에게는 시내산 율법을 등에 지고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입성이 해방의 소식이지만, 소수 특권층에겐 재앙의 소식이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주 목적은 빈부와 신분 격차 없는 거룩한 나라의 건설이고, 가나안 거류민들도 그것을 모두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가나안 민중은 이스라엘을 뜨겁게 환영했고 소수 특권층은 격렬하게 저항했는데, 죽음은 바로 저항하는 소수 특권층에게만 한정됐다고 강인태는 설명한다.

이런 해석의 바탕에는 하나님의 선교 방법에 대한 그의 지론이 깔려 있다. 그는 하나님이 비참하게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을 보며 탄식하면서,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방법이 없을까를 끊임없이 고민했던 아브라함을 선택해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그 민족이 가나안에 입성해 거룩한 나라의 모형을 만들고, 열방이 그 나라를 본받아 복을 받게 하려 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준 사명은 약탈과 전쟁으로 얼룩져 있는 가나안에 입주해 약탈 전쟁을 끝내고 바알 문화를 청산하는 것이 된다. 가나안 7개 부족뿐만 아니라 그 이웃 나라에도 거룩한 나라가 형성되고 거룩한 문화가 꽃피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이다. 

약탈 전쟁과 거대한 성전 건축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렇다면 잔인한 '정복설'을 지지하는 듯한 수많은 구절은 어떻게 봐야 하나? 강인태는 기본적으로 여호수아에서 열왕기까지의 책들은 '역사서'라는 것을 강조한다. 역사서는 사건 당시의 기록이 아니라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사건이 일어난 지 한 참 뒤에 기록한 책이다. 그러므로 역사서에 기록자의 '사관'이 반영되는 것은 당연한데, 역사서를 기록한 사관에게는 이방인이 지옥의 땔감에 불과하다는 선민의식과 우월주의가 내재돼 있었고, "숨 쉬는 것은 진멸하라"와 같은 유목민의 독특한 표현 방식도 이 역사서에 들어 있다고 그는 설명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이런 설명이 김회권의 빼곡한 예언서 주해와 십계명에 대한 해석을 든든히 지지해 주고 있다는 점이다. 바알 문화의 핵심은 김회권이 말했듯이 자유농민을 파괴하는 대토지 소유제다. 여기서 더 나아가 강인태는 김회권과 달리 대외적 약탈 전쟁 금지도 중요한 율법의 원칙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근대 제국주의와 식민지 수탈을 근본적으로 반성하고 회개할 수 있는 지평을 열어 준다. 약탈 전쟁 금지의 관점에서 보면, 미국의 건국 과정에서 일어난 원주민 학살과 사회경제적 차별은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 기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온갖 식민지 수탈은 철저한 반성의 대상이 된다.

강인태 해석의 독특성은 다윗-솔로몬에 대한 평가에서도 나타난다. 강인태는 솔로몬은 물론 다윗까지 비판적으로 본다. 정복 전쟁 금지의 관점에서 보면, 대표적으로 사무엘하 8장 1~14절에 나오는 다윗의 끔찍한 정복·약탈 전쟁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뿐 아니라 다윗이 성전을 짓고 싶었으나 하나님께서 다윗에게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솔로몬에게는 허락하셨다고 기록돼 있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왜냐면 거대한 신전을 지어 놓고 제사에 열을 올리는 것은 타파해야 할 이방 종교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소규모의 번제단을 만들 때도 정으로 다듬은 돌을 쓰지 말고 계단을 높이 쌓지 말며 자연석과 흙을 사용하게 할 정도로(출 20:25) 하나님은 거대한 성전 건축을 반대하고 있다는 것이다.3) 요컨대 거대한 신전 건축은 왕권 강화를 위한 다윗과 솔로몬의 정치적 프로젝트였고, 정확히 말하면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정을 잘못된 길로 인도한 안내자였던 셈이다.

그렇다. 하나님이 거대한 성전 건축을 반대한 까닭은 그 공사에 막대한 노동력과 돈이 들어가는데, 그것은 결국 백성의 고혈을 짜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대한 신전과 웅대한 건축물의 크기로 위용을 자랑하는 것은 하비루의 하나님과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더구나 다윗이 거대한 성전을 지으려면 건축자재와 재물을 주변 나라에서 약탈해 와야 하는데,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가능한 것이겠냐고 강인태는 반문한다. 즉, 거대한 성전 건축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합리화하는 자체가 배교 행위이자 반율법적이다. 그러면서 강인태는 가나안에 입성한 이스라엘의 사명은 빈부와 신분 격차 없는 거룩한 나라를 만들어 열방이 복되게 하는 것에 있었다는 점을 반복해서 환기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웃 나라를 약탈하는 전쟁에 승리하게 해 주셨다, 성전 건축에 함께해주셨고 축복해 주셨다는 구절은 어떻게 봐야 할까? 강인태는 앞서 말한 '역사서'의 특징을 통해 설명한다. 즉, 하나님이 함께하셨다는 기록은 정말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셨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약탈 전쟁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합리화했던 과거의 죄악을 그대로 기술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바벨론 포로기에 우리가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다가 망했다는 것을 가감 없이 참회의 관점에서 기록해 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록 당시의 사람들은 그렇게 기록해 놓아도 그 의미를 잘 알고 있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4) 다윗과 솔로몬에 대한 이런 해석은 김회권의 예언서 주해와도 조화를 이룬다. 자유농민의 땅을 빼앗는 것뿐만 아니라 주변 나라를 약탈하거나 거대한 성전을 짓고 제의에 몰두하는 것 역시 질타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필자는 강인태를 통해서 성경을 새롭게 보는 경험을 했다. <하비루의 길>과 <죄인의 길>을 접한 후에 필자를 괴롭혔던 질문들이 상당 부분 해소됐고, 성경 이해는 깊어졌으며 자연스럽게 신앙도 새로워졌다. 무엇보다 '전도'하고 싶은 열정이 내 안에 되살아났다. 물론 강인태의 책은 지나치게 도식적이고 어떤 부분에서는 논증 없이 선언 혹은 단언하는 까닭에 성경과 다른 책을 보면서 교차 검증할 필요성은 있다.

계약론으로 보는 구원관

강인태는 기존의 구원론을 수정 혹은 전복해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필자는 그가 이 지점에서 김회권과 다를 뿐만 아니라 어떤 면에서 그의 한계를 넘어선다고 생각한다. 그는 '언약'이 아니라 '계약'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아니 '사용'이 아니라 '고수'라는 말이 맞을 것이다. 언약이 일방이 한 약속이라면 계약은 쌍방이 하는 것이다. '계약'이란 용어를 강조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인간을 계약의 대상으로 여기시는 것에서 인간의 위상 혹은 존엄성이 드러날 뿐만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역사가 달라진다는 전망도 확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계약'의 관계고 그 계약의 내용이 십계명을 포함한 시내산 율법인데, 그것을 지키지 않아 계약이 파기된 것으로 구약 전체를 해석한다. 요컨대 구약은 계약 형성과 계약 파기와 계약 갱신의 서술인 것이다. 이스라엘이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멸망당한 것을 1차 계약 파기의 결과로, 바벨론에서의 귀환을 회개에 의한 계약 갱신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에 유다는 헬라 제국의 헬라화 전략에서 살아남기 위해 할례와 정결례와 무노동 개념의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을 중시하는 유대교 율법을 만들어 내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안식일·안식년·희년을 핵심으로 하는 시내산 율법과 이러한 유대교 율법은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그런데 유대교 율법 관행은 헬라 제국이 붕괴한 이후에도 그대로 유지·강화돼 강력한 전통으로 확립됐고, 예수님 당시에는 메시아 대망론과 결합하면서 절정에 달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신앙 전통에 젖어 있는 종교 권력자들은 유대교 율법이 근본적으로 잘못됐고 시내산 율법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설파한 예수님과 사사건건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강인태는 이들이 예수님의 회개 선포와 촉구에도 돌이키지 않자 A. D. 70년 예루살렘성전이 붕괴되고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계약이 완전히 파기됐다고 이스라엘 역사를 정리한다.

이 관점에서 그는 예수님을 새로운 계약의 체결자로 왔다고 해석하고 두 번째 계약의 대상이 바로 '죄인'이었다고 논증한다. 예수님 당시 생업과 가난 때문에 정결례와 무노동 개념의 안식일을 지키지 못한 일반 민중들, 그리고 가난과 온갖 질병은 죄의 결과라는 당시의 신앙관으로 볼 때 죄인일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계약의 대상자였다는 것이다. 강인태가 볼 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시내산 율법, 즉 안식일·안식년·희년의 정신을 지키지 못한 인간의 죄를 예수님이 스스로 짊어지시고 죽으신 사건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계약에 참여한 사람은 율법과 선지자의 완성인 희년을 실천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교회의 놀라운 실천이다. 사도행전은 이들의 희년 실천이 예수님께 직접 배운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강인태의 계약론적 구원관의 강점은 구약과 일맥상통한다는 점이다. 행위 없는 구원이 발을 붙일 수 없게 만든다. 개인 구원/사회 구원이라는 구분도 불필요하다. '영혼' 구원이라는 헬레니즘의 영혼불멸설에 뿌리박은 구원론도 끼어들 자리가 없다. 예수님이 구원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느냐는 물음에 "(십)계명을 지켜라"(마 19:17)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그런데 아쉽게도 김회권에게는 이런 관점이 희미하다.

하나 더 첨언하고 싶은 것은, 강인태의 계약론적 구원관은 오늘날 기독인을 세계 구원으로 자연스럽게 이끌고 나아가 역사 변혁의 능동적 주체가 되도록 격려한다는 점이다. 성령님은 계약을 맺은 당사자인 우리가 계약을 지킬 수 있도록 도우시는 분이며,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놀라운 역사를 이루실 수 있다는 해석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성경을 자세히 보면 신자들의 순종이, 보잘것없어 보이는 작은 순종의 누적이 하나님의 역사를 불러오는 사건으로 꽉 차 있음을 알게 된다. 구약에서는 신명기의 말씀대로 바벨론 멸망 이후 고레스 칙령(B. C. 537년)으로 귀환한 역사가 대표적인 예이고, 신약에서는 성도들의 박해에 대한 순교적 저항과 놀라운 희년 실천으로 밀라노칙령(A. D. 313년)이 선포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요컨대 계약론적 구원관은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는 방식을 이해하도록 돕고, 기독인들에게 세계 구원과 하나님나라 건설의 영광스러운 자격이 있음을 보여 준다.

4. 세계를 구할 두 권의 책

김회권과 강인태의 상호 보완성

김회권과 강인태의 유사성은 2~5세기의 교부들이 이원론에 뿌리를 둔 헬라 철학에 깊이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이들은 <하나님의 도성>의 저자 어거스틴의 사상도 이원론에 기반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강인태는 여기서 머무르지 않고 어거스틴의 역사관이 지닌 오류를 수정하면서 중세 시대 1000년 암흑기의 원인이 바로 이 이원론에 뿌리인 헬라 사상에 바탕을 둔 신학과 수도원 영성이었다는 점을 상당한 분량을 할애해 증명한다.5) 기독교 국가가 됐다면 당연히 십계명과 희년법 등이 사회 법의 근간이 되도록 해야 했는데, 즉 거룩한 나라를 만들어 열방을 복되게 해야 할 책임이 있었는데, 오히려 당시 신앙은 반희년적 농노제와 신분제를 합리화·고착화하는 이데올로기가 됐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세의 기독교 왕국은 구약의 시내산 율법과 신약의 구원관으로 볼 때 반기독교적이었던 셈이다.

근대 이후에 대해서도 강인태는 시내산 율법과 예언자와 예수님의 희년 선포의 정신으로 개신교의 다양한 흐름과 역사를 개괄하고 평가함과 동시에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근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출현, 그리고 기독교 국가들이 자행한 식민지 수탈 등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풀어내고 있다. 이렇게 강인태는 김회권이 선언적으로 언급한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또 계약론의 관점에서 역사 전체를 새롭게 해석해 낸다.

또한 서양이 해 왔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전하는 선교'가 가진 본질적인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원하셨던 선교 방법과 신약의 초대교회가 보여 준 선교 방법이 '보여 주는 선교'임을 밝히고 다시 성경의 선교 방법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점도 역설하고 있다.

그러나 강인태는 가장 중요한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를 자신이 정리한 관점으로 해석하지 않고 있다. 모든 학문은 결국 '오늘'을 이해하기 위함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이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해방 이후 숨 가쁘게 전개된 현대사를 희년과 시내산 율법의 관점에서 해석하지 않았다는 것은 강인태의 큰 한계로 보인다. 희년과 십계명을 강조한다면 토지 없는 사람의 입장에서, 사상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가난한 사람의 입장에서 한국 현대사와 현재를 해석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데도 말이다. 이런 까닭에 강인태의 강조점은 생태 환경 영역에서 집중돼 있고 오늘날 한국 사회에 대한 사회경제적 분석은 일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에서 김회권은 강인태를 충분히 넘어선다. 김회권은 성경의 공평과 정의의 관점으로 한국 현대사뿐만 아니라 현안에 대한 깊이 있는 정치경제적 분석과 대안을 내놓는다.

이렇게 두 사람은 성경 해석과 역사 해석에서 상호 보완적이다. 김회권의 구원론의 한계를 강인태가 뛰어넘고 있고, 하나님 체험을 바탕으로 한 강인태의 성경 해석의 구멍을 김회권이 메우고 있으며, 김회권이 선언한 역사 해석의 내용을 강인태가 상술하고 있다. 물론 두 사람은 대천덕의 성경 해석과도 일맥상통하지만, 한편으로 두 사람은 대천덕의 성경관도 극복하고 있다. 편집 비평, 문학 비평 등 신학의 모든 성과를 흡수하면서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도록, 또 한편으로 기독인이 역사 형성의 능동적 주체가 되도록 든든히 지원해 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강조하는 것은 두 사람 모두 다원주의와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책을 읽어 보면 알겠지만 예수의 유일성과, 성경이 하나님이 계시해 준 진리라는 점이 바탕에 두껍게 깔려 있다. 특히 강인태의 경우에는 구원의 원리가 성경에만 있다는 점을 상식과 자명성의 원리에서 접근해서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하비루의 길>, 37~43쪽]

세계를 구할 두 권의 책

필자는 세계를 구원할 종교는 성경에 기반을 둔 기독교라는 걸 확신한다. 그런데 기독교가 세계 구원의 사명을 완수하려면 성경 해석과 역사 해석이라는 두 기둥이 튼튼하게 서 있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모든 신앙 행위는 이 해석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릇된 성경 해석과 역사 해석은 작게는 기독교의 위기를 가져오고 크게는 세계의 위기를 가져온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이 위기는 잘못된 성경 해석과 역사 해석이 초래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올바른 성경 해석과 역사 해석의 내용을 가득 담고 있는 이 두 권의 책은 세계를 구할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권의 책은 구원의 길이 사회변혁의 길임을 보여 주고 있다. 개인 구원/사회 구원의 구분을 극복한다. 오늘날 심해지고 있는 경제 불평등과 생태 환경 파괴가 불순종의 결과임을,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 발발과 기후 변화가 궁극적으로는 교회와 기독인의 죄 때문임을 보여 준다. 또한 지금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작은 순종이 한반도 평화와 생태 환경 보존과 세계의 역사 변화, 즉 하나님나라 구현을 가능케 한다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생긴다. 현재 이현령비현령으로 전락한 하나님나라의 구체적인 모습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 준다. '보여 주는 선교'가 성경이 제시한 선교 방법이라는 점도 깨닫게 해 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두 권의 책은, 성령님은 우리가 여기서 희년의 정신을 구현할 수 있도록 돕는 분이라는 것도 알게 해 준다. 이처럼 한국교회와 사회를 염려하는 기독인이 이 두 권의 책을 읽어야 할 이유는 차고도 넘친다.

남기업 / 희년함께 공동대표. 토지+자유연구소 소장.

1)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2022년 3월 31일부터 4월 4일 전국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기독교에 대한 대국민 이미지 조사' 결과 한국교회 신뢰도는 18.1%로 나타났는데, 이는 2년 전보다 13.7% 포인트 떨어진 수치다. 구체적으로 보면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가 38.9%,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가 36.9%다. 국민 10명 중 8명은 교회를 불신하고 있다는 것이다(<국민일보> 2022년 4월 27일)
2) 강인태는 '길동무'라는 필명으로 본 글이 주로 언급하고 있는 <하비루의 길>, <죄인의 길>, <비움의 길>, 이외에도 <창세기>, <십계명과 주기도문>, <요한계시록>,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사도행전과 바울서신> 등의 성경 주해서와 <성경으로 보는 우리 역사> 등 역사책도 저술했다.
3) 이것은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테반의 설교와도 일맥상통한다. 스데반은 유대인들에게 행하는 설교에서 솔로몬의 성전 건축을 비판하고 있다.
4) 다윗을 위대한 신앙인으로 보는 성경의 구절들 역사서뿐만 아니라 시편에도 등장하는데,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하비루의 길> 231~239쪽을 참고하라. 
5) 자세한 내용은 <죄인의 길> 281~389쪽 참조.

참고 문헌

강인태(길동무). 2004. <하비루의 길>. 케노시스영성원. 
강인태(길동무). 2008. <죄인의 길>. 케노시스영성원.
강인태(길동무). 2008. <비움의 길>. 케노시스영성원.
김회권. 2022. <자비경제학 - 구약성경과 하나님나라 경제학>. PCKBOOKS.
김회권. 2021. '사회 선교의 정당성과 전망에 대한 고찰'. <신학과실천>. vol. 73. 749~786쪽.
<국민일보>. 2022. 4. 27. '추락하는 교회 부활의 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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