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가 여성 안수의 역사와 현재 의미를 짚는 기획 '비하인드 스토리 - 여성 안수 투쟁사' 특별 페이지를 제작했습니다. 특별 페이지에서는 1930년대 자료와 타임라인 등을 보실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현재 대한성공회 사제 중 여성은 20명이 채 되지 않는다. 이는 전체 사제의 10%에도 미치지 않는 수치다. 첫 여성 사제 서품 후 21년이 지났지만 그간 여성 성직자가 그리 많이 나오지 않았다. 모든 교단이 인구 자연 감소와 개신교 인구 감소라는 이중고에 맞닥뜨린 상황이기는 하나, 지금 신학대학원에 있는 성직 후보자의 여성 비율도 10%가 되지 않는다는 점은 뭔가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민숙희(마가렛) 사제(53·대한성공회 광명교회)만큼 여성 사제에 대해 고민한 사람은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민 사제는 현재 여성성직자회 회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그 또한 여성에게 사제 서품이 주어지지 않았을 때 신학교에 입학했고, 대한성공회 여성 성직 투쟁의 한 부분을 함께했다. 2005년 사제 서품을 받은 후 지금까지 나눔의집(대한성공회 지역사회 선교 기관)과 교회에서 사목을 계속하며, 교회의 성차별적 문화를 바꾸려 노력해 왔다.

민 사제 특유의 거침없는 말투는 사이다를 마시는 것 같은 시원함을 주면서도 묵직한 맛이 있었다. 그는 자신과 동료들, 여성 평신도들이 당했던 교회의 성차별적 현실을 이야기하며, 결국 더 많은 여성 사제·리더가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이야기 속에서, 왜 여성 사제가 있어야 하는지, 여성 사제가 구체적으로 남성 사제와는 다른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민숙희 사제.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민숙희 사제.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그런 믿음 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신학교에 입학할 때만 해도 저 또한 여성은 사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저희 집이 4대째 성공회 집안이었는데도 여성 사제를 본 적이 없으니까요. 저는 고등학생 때부터 주일학교 교사도 하고 그랬으니까, 나중에 '주일학교 선생님이나 해야지' 이런 정도로 별생각 없이 신학교에 들어갔거든요. 근데 들어가서 보니까, 선배 언니들이 외국에는 여성 주교도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 소식을 처음 들었어요. 여자도 사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예요.

그 당시 신학과 여자 선배 중에는 성직자의 배우자가 되는 사람이 많았어요. '사모님'이라고 하죠. 저는 사모는 생각도 안 했고, 여자가 성직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가 한번 해 봐야겠다'고 바로 마음을 먹었어요.(웃음) 근데 성직 과정을 밟으려면 신학교를 졸업한 후 사목신학연구원에 가야 했는데, 제가 속했던 서울교구에서는 연구원에 입학조차 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시간을 좀 벌어 봐야겠다 싶어서 강화읍교회 교육전도사로 일하게 됐죠. 

그러다 당시 신학교 총장이셨던 이재정 사제님이, 한국교회여성연합회(한교여연)에서 실무자를 뽑는데 거기서 일해 보면 어떻겠느냐고 추천을 해 주셨어요. 처음에는 거절했어요. 강화읍교회에서 재밌게 일하고 있었으니까요. 두 번 거절했는데, 그래도 어른이 계속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그래, 그럼 좀 다른 경험도 해 보자'는 마음으로 한교여연에 들어갔죠. 거기서 정말 다양하게 활동하는 여성 목회자들을 봤어요. 사실 그때 성직자가 되는 걸 조금 잊어버리고 살았는데, 한교여연 간사로 일하면서 다시 한번 마음을 굳게 먹은 것 같아요.

저는 지금도 그래요. 여성이 목회자가 됐을 때 남성들이 하는 목회를 그대로 따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한교여연에서 일하며 가까이서 봤던 여성 목사님들은 주로 여성 인권과 성평등을 위해 일했던 분이 많았어요. 그리고 당시 '미군범죄근절을위한운동본부'라는 게 있었거든요. 한교여연 간사로 거기 연대하면서 인권을 유린당하는 여성들 이야기를 많이 접하게 됐고, 그걸 위해 일하는 여성 목사님들도 봤어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도 이런 목회를 하고 싶다'고 마음먹었죠.

서울교구에서는 사목신학연구원에 입학할 수 없었다고 했잖아요. 그때는 연구원이 정규 대학원도 아니었고, 입학을 위해서는 주교님의 추천서를 받아야 했어요. 서울교구 주교님은 추천서를 써 주지 않았던 거죠. 그분 입장도 일리가 있는 게, 여성은 서품을 못 받는데 성직 후보 과정에 추천하는 거 자체가 책임감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하셨던 거 같아요. 

근데 1997년 사목신학연구원이 정규 대학원이 되니까 주교 추천서가 필요 없어지게 된 거예요. 그래서 일단 신대원 시험을 보고 합격을 했어요. 합격은 했는데 입학을 못 했어요. 교구에서 준비가 안 됐다는 거예요. 공부는 학교에서 하지만 서품은 주교가 주는 건데, 교구에서는 여학생이 입학한다는 사실도 몰랐고 여성 성직에 대해 논의도 없었다는 거죠. 그러면서 갑자기 여학생을 받으면 어떡하냐고 학교에 따졌다고 하더라고요. 이재정 사제님이 말씀하시기를, 미안하지만 내년에 다시 시험을 보라고 해서 1년을 쉬었다가 다시 시험을 봤죠. 그래서 1998년에 저까지 여학생 3명이 입학하게 됐어요.

그때 성직자 선배들이 저한테 "야, 앞으로 100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여성 사제는 안 돼" 그러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런 믿음 없는 소리 하지 마시라고, 내가 10년 안에 사제 서품 받는 모습을 보여 드리겠다고 했죠. 실제로는 10년 안 걸렸죠. 왜냐면 그전부터 이미 여성 성직을 허용하라는 운동이 계속되고 있었거든요. 대한성공회 전국 의회가 2년에 한 번씩 있는데요. 거기에 여성들이 여성 성직과 관련한 안건을 올렸어요. 계속 부결됐지만. 

제가 신대원 입학한 해에 여성 성직을 위한 서명운동을 벌였어요. 그때는 1년에 한 번씩 성소 주일에 성공회대학교에 모여서 예배를 드렸거든요. 교회마다 바자회도 해서 수익금을 학교에 헌금하기도 하고. 성공회 교인들이 한 장소에 가장 많이 모이는 날이에요. 그때 저희는 '300명만 받아도 어디냐'면서 시작했어요. 근데 자꾸 서명 용지가 모자라는 거예요. 계속 복사해 와서 1000명 넘게 서명을 받았어요. 그 인원이면 아마 그날 오신 분 대부분이 서명을 하신 걸 거예요. 그렇게 해 주실 줄 몰랐어요. 너무 기뻤죠.

민숙희 사제(맨 오른쪽)와 여학생들은 성소주일에 여성 성직을 위한 서명운동을 벌였다. 사진 제공 민숙희
민숙희 사제(맨 오른쪽)와 여학생들은 성소주일에 여성 성직을 위한 서명운동을 벌였다. 사진 제공 민숙희

물론 그날 지나가면서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여자 신부는 안 돼"라고 소리 지르는 분도 있었고, "여자는 부제까지만 해도 되지 않겠어" 이러면서 가시는 분들도 있었어요. 하지만 덕담을 해 주시는 분이 더 많았어요. 제가 "저는 여기 신학대학원생 민숙희입니다. 서명 좀 해 주시겠습니까" 하면, 교인들이 서명해 주시면서 "꼭 신부님 되세요", "우리도 이제 여성 사제 생겨야죠"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현장에서 확실히 느꼈어요. 교인들은 원하고 있구나. 굉장히 고무적이었어요. 

그다음 해 전국 의회 때 그 1000명이 넘는 서명 용지를 같이 첨부해서 여성 성직 수용안이 올라갔죠. 서명이 큰 역할을 했어요. '이만큼 사람들이 원하고 있는데 뭐 자꾸 책상에서 고민만 하느냐. 이게 그 증거물이다' 하면서 들이민 거죠. 그렇게 여성 성직이 통과됐습니다.

끊임없이 나를 증명해야 했던 시간들

우리 성공회에서 여성 사제에 대한 차별이 있다고 말하면 아마 '우리가 언제 불공평하게 했다고 그래. 다른 교단보다 훨씬 평등해'라고 생각하는 남성 사제가 많을 거예요. 기본적으로 성공회는 모든 성직자에게 발령을 내 주기는 하니까요. 자기가 알아서 개척하고 그런 시스템은 아니니까. 일단 발령을 받으면 어디라도 가거든요. 

그런데 기본적으로 우리 성공회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문화 자체가 남성 중심이잖아요. 그런 환경에서 발령 내 준다고 여성 사제가 사목하는 게 쉬운 건 아니거든요. 가령, 평등이라는 말을 잘못 이해하는 분들이 있어요. 남성이 돌 10개를 옮기면 여성도 돌 10개를 옮겨야 평등이라고 생각해요. 여성은 물리적으로 힘이 약하거든요. 근데 무조건 모든 부분에서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하는 게 평등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어요. 

또 교회 안에서 남성은 뭘 많이 하지 않아도 기본적으로 먹고 들어가는 권위가 있어요. 근데 여성 성직자들은 끊임없이 자기를 증명해야 돼. '나는 이만큼 잘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걸 잘 했었습니다', '나는 이것을 할 수 있습니다'라는 거를 계속 증명해야 하니까 너무 피곤하죠. 지쳐요. 마음의 상처가 많아집니다. 실제로 마음의 상처로 병을 얻은 분들도 계시고요. 저도 한동안 치료를 받을 정도로 힘들었던 경험이 있어요. 

제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저는 한 번도 '어서 오세요'라고 환영받으면서 간 적이 없어요. 교회든지 나눔의집이든지. 한번은 조금 규모가 있는 나눔의집 원장사제로 가게 됐는데, 거기서 반대를 하는 거예요. 교인들이 "우리는 저 사람 말고 이 사람을 원합니다"라고 하는데, "여성 말고 남성이요"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누가 봐도 남성 사제를 원장으로 모시고 싶다는 거였어요. 어떡하나 고민했죠. 근데 이번에 교인들 반대로 안 간다고 해도, 다음 파송된 곳에서 저를 환영해 준다는 보장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갔어요. 가면 또 금방 익숙해져요. 물론 잘하려고 노력했죠. 10개를 할 수 있는데 12개까지 하면서 무리를 하기는 했습니다. 그랬더니 교인들도 원장사제가 여성이라서 뭘 특별히 못한다는 의식은 갖지 않더라고요. 

나눔의집 사역을 오래 하다 보니 일반 교회에 가 보고 싶었어요. 도시보다는 시골을 가고 싶었죠. 그래서 강화에 있는 송산교회 관할사제로 갔어요. 민통선에 있는 작은 교회예요. 교인들은 거의 다 노인이었고요. 강화에서도 성직자에게 잘해 주기로 유명한 교회였죠. 저한테 아주 안전한 교회였어요. 

너무 신나고 재밌게 5년을 목회하고 옮기게 됐는데, 마지막에 원로 회장님이신 할아버지가 나와서 말씀하시는 거예요. 처음에는 제가 온다고 해서, 즉 여성 사제가 온다고 해서 "이제 우리 교회가 여자나 오는 교회가 됐구나"라고 남자 교인들이 한탄을 했다는 거예요. 그래도 그건 입 밖으로 내면 안 되는 말이라 생각하셔서 저한테도 말을 안 하신 거예요. 저는 전혀 모르고 있다가 떠나는 날 들은 거죠. 그러면서 "여기 왔던 어떤 남자 신부님들보다 훨씬 잘하셨다"고 칭찬을 하시는데, 저는 '헉 그랬던 거야?' 했어요.(웃음) 

지금 있는 광명교회에 올 때도 말이 많았어요. 여기는 송산교회처럼 시골에 있는 작은 교회가 아니고, 성공회 안에서는 중간 정도 되는 규모의 교회다 보니까, 여기서도 나름 자신들이 원하는 신부님을 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겠죠. 근데 이제 민숙희가 여기로 온다는 소문이 돌자 리더들이 모여서 투표를 합니다. 다다음 주가 부임일인데 투표를 한 거예요. 성공회에서는 총사제가 있는데, 장로교단으로 말하자면 시찰장 같은 분이거든요. 서부 지역 총사제가 교인들을 설득하려고 직접 오셨는데, 몇몇 반대하는 분의 의견을 꺾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투표에 부치게 됐어요. 의견이 모아지지를 않으니까. 

초대위원회 9명이 투표를 했는데, 찬성 4, 반대 4, 기권 1, 이렇게 나왔어요. 나중에 반대하셨던 분들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두 분은 원래 반대였고 다른 두 분은 이런 상태에서 제가 오면 너무 고생하겠다고 생각하셔서 반대표를 던졌대요. 그런데 어쨌든 기권 1표 덕분에,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주교님이 결과를 보시고는 그냥 가라고 하시더라고요. 발령을 그냥 내 버리셨죠. 그래서 처음 1년 동안은 마음고생을 많이 했어요. 반대했던 한 분은 아예 교회를 떠났고. 제가 반대를 무릅쓰고 온 사람이니까 교회위원들은 또 걱정을 하는 거예요, 제가 뭐 하나라도 교인들 눈 밖에 날까 봐. 

자유롭지가 않았어요. 진짜 한껏 제 사목관을 펼치고 싶은데, 하려고 하면 교회위원들이 반대를 해 버리니까… 마음이 힘들었어요. 근데 생각해 보면 그분들도 내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교회를 잘 운영하고 싶으니까 그렇게 하셨던 거겠죠. 근데 교회위원들 말고 그냥 신앙생활 하시는 분들, 특히 여성분들이 저를 지지해 주셨어요. "아무 걱정하지 마시라", "사제님 지금 너무 잘하고 계신다"고. 물론 뭐 내가 잘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웃음),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까 기운이 나더라고요. 그러면서 교회위원회와도 손발을 맞춰 나가고,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봉사하시는 분들을 많이 세우고 하면서 교회가 좀 더 활발해졌죠. 지금은 되게 즐겁게 사목하고 있어요.

처음부터 반겨 주는 곳은 없었다. 하지만 민숙희 사제는 어디서나 최선을 다했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지지받지 못한 결혼, 포기해야 했던 출산

지금 여성 사제 중 결혼한 분하고 결혼 안 한 분이 반반 정도 되는 것 같아요. 결혼하고 싶은데 못하는 경우도 있죠. 이런 거예요. 우리 신랑도 한번 도망갔었거든요.(웃음) 자기는 여성 성직자의 남편이 될 마음의 준비가 안 돼 있다는 이유였어요. 그래서 놔 드렸죠. 어떻게 해요. 뭐 못생겼다고 하면 수술이라도 할 수 있고, 성격이 더럽다고 하면 좀 고칠 수도 있을 텐데, 이 길은 하느님과의 약속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으니까 저도 그냥 '안녕' 이렇게 보냈죠.

아무튼 다시 붙잡혀 왔는데(웃음) 나중에야 '이 사람이 왜 그때 자신이 없다고 했을까, 우리 둘 사이는 문제가 없었는데' 생각해 보니, 자기가 다닌 교회에서 본 거예요. 목사의 배우자를 본 거죠. 여성 배우자, 사모였겠죠. 교회 안에서 입도 못 열고 자유롭지 못한 모습을 본 거 같아요. 또 가끔 언론에서 사모에 관한 기사들을 보면, 어이없고 한심하고 '아직까지도 이렇다니' 하는 수준이잖아요. 그러니까 제 남편도 자기는 그렇게 살지 못하겠다고 생각했던 거 같아요.

여성 성직자의 배우자가 되는 남성 성직자들, 남성 평신도들도 그런 모습을 떠올리는 거예요. '이제 교회에서 뒤치다꺼리나 하게 생겼구나', 또는 '교회에서 나는 그냥 바보처럼 조용히 지내야 하는 건가' 이런 고민을 하게 되죠. 그러니까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생겨도, 결국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저는 사제 서품 받은 2005년에 결혼을 했어요. 제가 결혼할 때 보좌사제였는데, 교인들이 축하한다는 말을 잘 안 하시더라고요. 교인들 입장에서는 이 교회에서 처음으로 여성 사제를 봤는데, 그 여성 사제가 결혼을 한다니까 난처했나 봐요. 물론 청년들은 축하해 줬지만, 나이가 좀 있는 그룹에서는 '이건 아니지'라는 반응이었어요. "그냥 처녀로 있으면 더 빛이 날 텐데 왜 결혼을 하냐"부터 "애 낳으면 애기는 누가 봐줄 거냐" 등등 별의별 말을 다 들었어요. "배불러 가지고 제단에 올라오는 꼴은 못 본다"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하는 분도 있었죠. 

싫은 거야. 겪어 보지 않았으니까. 지금까지 여성 사제가 사목하면서 아기를 낳고 키우는 걸 보지 못했으니까. 당시 저는 교회에서 굉장히 잘하고 인정받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같이 멤버십을 가지고 활동했던 평신도분들이 그런 반응을 보이니까… '아니 여기서도 이런데 다른 데 가면 어떻게 생각할까' 겁이 나더라고요. 

그때 저는 갓 사제 서품을 받고 난 후여서 너무너무 훌륭한 성직자가 되고 싶었어요. 지금은 그럴 수 없다는 걸 아니까 그런 생각 안 하지만. 그때는 '나는 뭐든지 잘해야 한다. 앞으로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내가 잘한다는 칭찬을 들어야 한다' 이런 강박이 있었거든요. 정작 "여성 사제가 배불러서 제대에 서는 꼴 못 본다"고 말했던 사람은 그렇게 말한 것도 잊어버렸대요. 근데 저는 거기 걸려 넘어진 거예요. '아이는 포기하고 그 시간에 난 목회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 그렇게 스스로 생각한 거죠. 지금 생각하면 아이를 낳았어도 목회 잘했을 텐데…. 

후배 여성 사제들 중에는 아이를 낳은 사람도 있어요. 그런 후배들을 보면서 누군가는 "사목하면서 어떻게 키우려고 애기를 낳냐" 이래요. 근데 저같이 비출산인 사람은 또 "무슨 대단한 목회 한다고 애도 안 낳냐"는 말을 들었거든요. 대체 남의 자궁에 왜 이리 관심이 많은지… 여성 사제들은 뭘 해도 그냥 입방아에 오르게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제가 유기 동물들을 키우다 보니까 "아니 애나 낳지, 무슨 동물들을 데려다 키우냐" 그런 말도 들었어요. 동물들은 애가 없어서 키우는 게 아니거든요. 단순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애가 없으니까 허전하고 뭐 대리 만족을 위해 동물을 키우나 보다' 생각하는 것 같아요. 

요즘에는 성직자 부부들 중 아이가 없는 사람이 많아요. 노력했는데 안 생기는 경우도 있고, 원래부터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한 경우도 있겠죠. 남성 사제에게는 그런 관심을 갖지 않잖아요. 근데 여성 사제에게는 꼭 그런 옛날 말 있죠. "뭐 좋은 소식 없어?" 이런 식으로 자꾸 간섭하려 해요. 저도 젊었을 때 성직자 모임에서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어요. 요즘에는 정말 하면 안 되는 말인데, 한 고참 사제가 저에게 "애는 안 낳는 거야, 못 낳는 거야?" 묻더라고요. 그분은 농담으로 던진 말이에요. 제가 "당신 같은 사람 때문에 내가 애를 못 낳는다"고 받아쳤다가 굉장히 혼났어요.(웃음)  

먼저 지도자가 바뀌어야 하는데

아직도 여성 안수를 도입하지 않은 교단은 뭔가 변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런 교단에서는 여성의 지위나 리더십 자체를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는 남성 목사들이 그런 마인드를 가지고 목회하니까요. 그런 설교를 계속 듣는 사람들은 다 세뇌가 되지 않겠습니까? 정말 혁명적인 사람이 아니고서야, 교회에서 우리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은 다 옳고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겠죠. '여성은 집사·권사 하면 됐지, 뭘 장로·목사까지 하려고 하느냐', '하나님께서 이미 충분히 좋은 직분을 주시지 않았느냐'라고요.

저는 다른 교단 직제를 잘 모르니까 한번은 권사가 뭐하는 직분인가 찾아보려고 인터넷에 '권사'를 검색해 봤어요. 권사 임직식을 할 때 목사가 앞치마를 걸어 주는 이미지가 있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권사는 앞치마를 두르는 사람인가', '더 빡세게 주방에서 부려 먹으려고 권사를 주는 건가', '이게 도대체 뭔가' 싶었어요. 그런 건 아닐 거잖아요. 그 직분의 본래 의미가 있을 텐데, 어떤 교회에서는 여성 집사·권사는 앞치마를 두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남자가 임직할 때 앞치마 둘러 줄까요? 그렇지 않다고요.

목사가 좀 바뀌어야 할 텐데, 그러기는 너무 어려울 것 같아요. 지금까지 여성 안수를 도입하지 않은 교단이 바뀌는 건 힘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다행히도 그런 교단에는 젊은 여성이 많이 가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소멸되지 않을까….

올해 7월 열린 퀴어 문화 축제에서 민숙희 사제는 참가자들을 축복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올해 7월 열린 퀴어 문화 축제에서 민숙희 사제는 참가자들을 축복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목사들이 바뀌지 않는 게 정치인들과 똑같은 거 같아요. 지금 보세요. 옛날에 386이 586이 됐잖아요. 그들에게 386 시대의 진보적인 정신이 있어요? 없어요. 그냥 꼰대가 돼 버렸거든요. 그러면서 오히려 그때 정신을 자기 정당화하는 데 끌어다 씁니다. '내가 옛날에 민주화 운동 한 사람이야', '나는 그런 일반적인 꼰대가 아니라고' 이러면서 자기를 정당화하거든요.

저는 목회자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지금 같은 시대에 여성주의에 관심 없는 교회는 사라질 수밖에 없어요. 그럼 여성주의를 공부해야죠. 옛날에 민주화 운동 한 거는 옛날에 끝난 거예요. 왜 1980년대 얘기를 2020년대에 하냐고요. '지금의 진보는 무엇일까' 고민해야 하고, 거기에는 당연히 페미니즘이 들어갑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남자와 여자만 고려됐지만, 지금은 제3의 성도 고려해야 한단 말이죠. 그럼 그것에 대해서도 그냥 "귀동냥으로 들었소" 하지 말고 공부해야 해요.

맨날 "교회들이 없어지네", "한국교회가 위기네" 이런 말만 할 게 아니고, 교회를 찾는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문턱을 낮춰야 하거든요. 교회가 성평등하다는 것, 교회에 성 정의가 있다는 것을 외부 사람들이 인식하지 않으면 교회는 그냥 없어지는 거예요. 지금 활동하는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서 없어지면 그냥 같이 사라지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하느님을 필요로 하고 교회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먼저 성직자들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는 거예요.

이건 다른 교단뿐 아니라 성공회도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그냥 알고 있는 것, '나는 진보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페미니즘을 지지해' 혹은 '성소수자를 지지해' 그런 거는 정말 지식의 향유일 뿐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정말 진심으로 지지하고 진심으로 다가가지 않는다면 그거는 가짜죠. 그냥 지식으로만 알고 있는 것은 또 하나의 율법에 불과한 것이라고 봐요.

저는 그래서 성직자들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저는 강화도 송산교회에 있을 때 교인 대부분이 70~80대 할아버지·할머니인데도, 성소수자, 비정규직 노동자, 여성주의에 대해서 끊임없이 얘기했어요. 일부러 말하려고 한 게 아니라 설교 본문에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 너무나 많았거든요. 

예수님이야말로 틀이 없고 경계가 없는 분이었잖아요. 그런데 성직자들이 신학을 공부한다면서 율법주의자가 되어 버린 거예요. 사회적 약자를 위해 뭔가 하자고 하면 "신학적으로 맞는 거야?" 이렇게 묻습니다. "안식일에 벼 이삭을 따 먹으면 되겠어?" 이거랑 다르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자꾸 신학을 들이밀면서 거기 맞추려고 하니까 사랑이 사그라드는 거죠. 아니, 동성애가 신학적으로 맞는지 안 맞는지가 뭐가 중요해요. '하느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이런 질문이 더 우선돼야 하는 거죠. 

저는 지금 교회에서도 그런 설교를 많이 하거든요. 어떤 연세 드신 분은 못마땅하셨는지 "우리 사제님은 나눔의집 사목이 딱 맞는 것 같아요" 이렇게 말씀하세요. 그러면 저는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광명교회가 딱이에요" 이렇게 말하죠.(웃음) 대체로 여성분은 좋아하세요. 이런 설교가 필요하다고 말씀해 주시기도 하고요. 불편한 분들도 당연히 있겠죠. 그러나 들어야 합니다. 안 들으면 모르잖아요. 자꾸 들어야 성소수자도 우리가 함께 신앙생활 해야 하는 형제자매라고 받아들일 수 있거든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그저 공부 안 하고 가난해서 그렇게 사는 게 아니라, 이 사회구조가 불의하기 때문이라는 걸 알아야 하거든요. 그러니까 먼저 목회자가 바뀌어야 한다는 거죠.

중요한 건 교회 문화를 바꾸는 일

교회 안에 여성의 성 역할이 고정돼 있는 모습이 굉장히 여러 가지잖아요. 일례로 수년 전 우리 성공회 여성국이 주최한 여성 리더십 워크숍에서 이런 말이 나왔어요. '교회에서 제일 하고 싶은 게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여성들은 선교, 교육, 기도 모임을 하고 싶다고 답했어요. 얼마나 소박해요. 다음 질문은 '그러면 여러분이 실제로 교회에서 하고 있는 일은 무엇이냐'였는데, 대부분 애찬, 환경 미화 등 사목의 보조적인 역할이라고 답했어요. 

지금 여성 사제가 관할로 있는 교회들을 보면 여성을 보조적인 역할로만 두지 않습니다. 여성들에게 리더 자리를 주고 역할을 하게 해요. 다 능력이 있거든요. 저 역시도 이 교회에 처음 왔을 때, 여성들은 교회위원으로 뽑힌 분들조차 보조적인 역할을 하고 있더라고요. 주로 밥하기, 환경 미화, 꽃꽂이 이런 것들은 여성이 하고, 물론 남성들도 건물 수리 같은 것을 하지만 주로 의사를 결정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어요. 수련회 가서도 여성들은 음식 하느라 바쁜 거야. 교육받고 말씀 들으러 온 건데…. 그런 걸 많이 바꿨어요. 제가 좀 우악스럽게 보일 정도로 강하게 푸시를 했어요. 애찬 문제를 봐도, 그래 남자들이 요리 못할 수 있어, 그러면 설거지라도 할 수 있잖아요. 자기가 설거지를 안 하면요, 설거지가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여성 사제들이 사목할 때는 그 공간에 속한 평신도 여성들의 지위도 달라진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공동체 문화가 바뀌어요. 이제는 누구한테, 자기 부인한테라도 함부로 "물 좀 떠다 줘" 이런 거 못 합니다. 그렇게 말하면 굉장히 후진 인간이라는 걸 제가 수차례 얘기했기 때문이죠. 그런 말은 병상에 누워 있는 아픈 분들이나 컵을 들고 다닐 수 없는 아이들이나 하는 말이라고 강조하니까 어쩔 수 없는 거예요. 교회 오면 자기가 움직일 수밖에 없죠. 어머니들이 "민 사제님이 오시고 교회가 굉장히 바뀌었다"는 말을 많이 하세요.

지난해 9월 여성 사제 서품 20주년 기념 감사 성찬례를 마친 후. 뉴스앤조이 구권효
지난해 9월 여성 사제 서품 20주년 기념 감사 성찬례를 마친 후. 뉴스앤조이 구권효

여성들이 사회적 약자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다른 약자를 대접할 줄 압니다. 우리 교회에 이주 노동자도 오시고 가난하고 혼자 사시는 할머니도 오시는데, 사실 그런 분들이 교회에 오기 쉽지 않아요. 교회 문턱이 의외로 높습니다. 그분들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교회에 오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하려고 노력하는데요. 만약 우리 교회 문화가 고루하다면 전 그분들한테 교회에 오라고 말 못 했을 거예요. 저는 우리 교회가 이제 사회적 약자도 받아들일 수 있는 교회가 됐다고 판단한 거죠. 물론 남성 성직자들도 약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 문화를 조성할 수 있겠지만, 그런 문화는 주로 여성 평신도들이 만들어 주더라고요. 그런 면에서 문턱을 낮추는 교회를 만드는 데는 여성 성직자의 사목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성 성직자들이 기억해야 할 것이 있어요. 선배 때부터 지난하게 싸워 왔던 과정들, 그 귀한 역사가 우리에게 양분이 된 거예요. 그 양분을 먹고 자랐으면 이제는 나도 그 에너지를 갖고 일해야 하는 거거든요. 물론 현장은 늘 바쁘고 정신 없지만.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고 갈 것인가, 흔히 '성공'이라고 이야기하는 큰 교회, 많은 성도, 많은 돈, 이런 건 우리 방향이 아니잖아요. 그게 아니라 예수님이 사역했던 그 지점, 약자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친구가 되는 것. 여성들도 약자니까 다른 약자들과 친구가 되기 쉽지 않겠어요? 약자의 편에 서고 약자들의 교회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여성 성직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성들의 연대는 더욱 강하고 부드럽습니다. 서로 경쟁하는 구도가 아니고, 어떻게 하면 우리가 조금 더 교회를 교회답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연대하기 때문이에요. 뭔가 더 큰 것을 얻기 위해 연대하는 어떤 부류와는 다르죠. 저는 그 옛날 선배들의 고생을 헛되게 하지 않으려면, 우리 여성 성직자들이 그분들 뒤를 이어 정말 하느님의 교회다운 교회, 예수님이 살아 계신 교회, 그리고 모두가 예수님 안에서 평등한 교회를 만드는 데 쓰임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계속)

※ 본 기획물은 정부 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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