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가 여성 안수의 역사와 현재 의미를 짚는 기획 '비하인드 스토리 - 여성 안수 투쟁사' 특별 페이지를 제작했습니다. 특별 페이지에서는 1930년대 자료와 타임라인 등을 보실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아직 50년을 살아 보지 않은 입장에서, 50년 전 일을 기억하고 이야기한다는 건 어떤 느낌일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는 1956년 여성 장로제를, 1974년 여성 목사제를 제도화했다. 완전한 여성 안수제 도입 후 48년이 지난 지금은, 투쟁 당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사람 자체가 많지 않다. 다행히 당시 기장 여교역자협의회(현 전국여교역자회) 서기를 맡았던 김지선 목사(74)를 만날 수 있었다.

"왜 새삼스럽게 지금 여성 안수를 다뤄요?" 김지선 목사는 기자들과 만나자마자 물었다. 기장에서는 여성 목사제가 50년 가까이 지났으니 당연한 질문이었다. 기장은 지난해 주요 장로교단 최초로 여성 총회장을 배출하기도 했다. 지금도 여성 안수는 성서적·신학적으로 맞지 않다며 제도적 성차별을 고수하는 교단이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벌써 50년 전 이 모든 논쟁에 종지부를 찍은 교단이 있다는 사실은 고무적이다.

김지선 목사는 인터뷰 전 발송한 질문지에 꼼꼼하게 답변을 정리해 왔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시절인 1930년대부터 있었던 여성 안수 논쟁 역사를 기억해 냈다. 그는 기장의 여성 안수가 그 긴 역사를 지나오며 신학적·인권적 문제들이 논의된 결과였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 50년 전 신학교를 갓 졸업하고 전도사로 사역을 시작했을 때를 회상하며, 1970년대 교단 안팎의 분위기가 어땠는지 이야기해 주었다.

김지선 목사.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김지선 목사.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한 맺힌 여성 사역자들

저희 때는 기장이니, 예장이니 하는 교파 의식 없이 이사 간 동네에 장로교회가 있든 감리교회가 있든 그 교회에 가서 봉사하고 그랬어요. 제가 신학대학에 들어갈 때쯤에는 예장통합 측 교회를 다녔죠. 근데 교회학교 교사, 성가대, 청년회 이런 것들을 맡아서 하다 보니까 '신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신학대학을 가야겠다고 목사님께 여쭸더니, 목사님이 "그럼 김 선생은 한국신학대학(현 한신대학교)을 가시오" 그러셔서 한국신학대학에 입학했어요.

학교 다닐 때는 선배 여교역자들을 보면 너무 거룩하고 귀해서, '과연 나 같은 사람이 전도사를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고민하고 있었는데, 당시 수도교회 당회장이셨던 문동환 박사님이 수도교회에서 인턴을 하면서 사역을 경험해 보라고 하시더라고요. 학교 다닐 때도 계속 예장통합 측 교회를 다녔는데, 그렇게 졸업 후 첫발을 기장 교회에 내딛게 됐어요.

그때가 1966~1970년이에요. 여성 장로제가 시행되고 있기는 했는데, 그때만 해도 여성 장로는 남성 장로가 있는 곳에서만 안수를 받을 수 있었어요. 여전도사들 상황도 열악했죠. 남성과 같이 신학을 했는데도 대우를 보면 '저건 아닌데' 싶더라고요. 제가 만났던 여성 선배님들은 대부분 사모님이 돼 있거나 기관 사역을 하셨죠. 처우는 열악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 어떻게 저렇게 이름도 없이 사역할 수 있을까' 의아했어요.

개인적으로는 교회에서 사역할 때 성차별을 많이 경험하지는 않았어요. 1970년도에 인턴 과정을 할 때도 문동환 박사님이 계셨던 교회였기 때문에, 문 박사님이 저와 같은 실무자들도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 주셨죠. 전도사로 부임했던 교회도 안병무 박사님이 계셨던 교회라서, 제가 전도사로서 어느 정도 권한을 갖고 일할 수 있었어요. 뭐 이런 경우는 있었죠. 저를 '전도부인' 심지어 '미스 김'이라고 부르려는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그러면 저는 그 자리에서 "직함을 수정해 주세요. 저는 엄연히 교단에서 인정한 전도사입니다"라고 지적하고 그랬어요.

제가 사역했던 교회는 그랬지만, 보통의 교회에서는 여전도사들에게 권한을 주지 않았죠. 나중에는 여교역자들의 투쟁이 자꾸 부각되니까, 아예 여전도사를 쓰지 말자는 분위기까지 생겼어요. 제가 1971년 여교역자협의회 서기를 맡게 되면서,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여성 사역자의 현실을 더 생생하게 알게 됐는데요. 선배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정말 그 바닥에 한이 많이 맺혀 있더라고요. 남성들과 비교하면 재정적인 부분뿐 아니라 인격적인 대우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현실이었으니까요. 심방을 가도 한참 후배인 남성 목사를 위해 문 열어 주고, 청소가 제대로 되어 있는지 확인하고, 아이가 울면 안고 밖에 나가고…. 여성 전도사는 남성 목사가 예배를 인도하는 데 다른 것이 방해되지 않게 하는 역할이나 맡았던 거예요.

김지선 목사(오른쪽 두 번째)는 여성 안수를 위해 힘쓴 후, 고민 끝에 1988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사진 제공 김지선
김지선 목사(오른쪽 두 번째)는 여성 안수를 위해 힘쓴 후, 고민 끝에 1988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사진 제공 김지선
배불러서 강단 못 올라? 똥배 나온 남성은?

우리 교단에서 여성 목사제는 1974년 도입됐지만, 여성 안수에 대한 논의는 1930년대부터 시작됐어요. 1934년 김춘배 목사님의 필화 사건은 유명하죠. 그러다 1953년도에 한국기독교장로회가 분립 총회를 하면서, '복음의 자유, 신앙 양심의 자유, 자립·자조의 정신, 세계 교회 정신'을 선포한 교단 새 역사가 시작됩니다. 필화 사건의 주인공이었던 김춘배 목사님을 비롯해, 여성 안수를 주장하던 대부분이 기장 소속이었어요. 이후 1956년에 여전도회장 김말봉·신애균 같은 분들이 다시 여장로제를 청원해서 여장로제는 통과가 된 거죠.

여장로제는 바리새주의를 거부하고 복음의 자유를 선포한 기장 교단으로서는 당연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장로제만 보면 그런데, 그때 총회에서 목사의 자격을 남자만 될 수 있게 한 거예요. 헌법 '목사의 자격' 부분에 "35세 이상 된 자로서"라고 돼 있었는데 이걸 "35세 이상 된 남자로서"라고 바꾼 거죠. 여성의 목사직 참여를 제도적으로 막아 버렸습니다. 여장로제를 통해 신학적인 선언을 했는데도, 몸화·체화한 가부장적인 사고는 뿌리가 깊었던 거예요.

이후 1957년 서울을 중심으로 여전도사회가 만들어져서 여성 목사제 운동이 시작돼요. 1959년 총회는 "여목사 장립 제도는 원칙적으로 승인하는 것이 가하나, 그 규정과 절차는 한국교회 실정에 부합하도록 외국의 예를 참고하면서 금후 계속 연구키로" 결의하면서 사실상 보류를 했어요. 1968년 여교역자협의회가 만들어지고 그해 총회 때 다시 여목사제를 청원해서 통과가 됐죠. 그런데 이게 헌법을 개정하는 일이라 노회 수의를 거쳐야 하거든요. 그때 노회가 10개였는데, 수의 결과 5 대 5로 부결이 됐어요.

그래서 1971년 총회에 다시 여성 목사제가 상정돼요. 그때도 일단 총회에서는 통과가 됐죠. 또 노회 수의 과정이 남았는데, 마침 그때는 제가 여교역자협의회 서기였기 때문에 전국을 쫓아다니면서 뭐 페이퍼 워크(paper work)도 하고, 목사님들도 만나고 했어요. 전국을 다니느라 여관방에서 잘 때도 있었고, 그때마다 선배들하고 전략을 짰죠. "너는 누구를 맡아라, 너는 누구를 맡아라" 하면서. 그렇게 했는데도 1972년 노회 수의 결과 또 부결이 된 거예요.

반대하는 쪽에서는 지금 들으면 성 인지 감수성이 떨어지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어요. 그때도 화들짝 놀랄 얘기이기는 했죠. "월경하는 사람이 어떻게 강단에 올라가겠느냐", "임신이라도 하면 배불러 가지고 어떻게 올라갈 거냐", "출산하면 수유는 어떻게 할 거냐" 이런 노골적인 이야기가 왜 없었겠어요. 요새 같으면 그런 말 했다가는 큰일 나죠. 

그런 말에 반박해 주시는 목사님들도 있었어요. "배불러서 강단에 못 올라온다면 목사들 중 똥배 나온 사람은 뭐냐. 운동 안 해서 배 나온 건 비생산적인 것이지만, 여성들이 임신·출산하는 건 생명적인 일이고 창조적인 질서다. 어디다 대고 그런 얘기를 하느냐"면서 저희를 대변해 주는 목사님들이 계셨죠. 그러니까 목사들 사이에서 찬반이 있었는데 그 정서가 어떤 것이었냐 하면, 만약 여성 안수에 대해 시험을 봤다면 '가능하다'고 답했을 거예요. 그러니까 머리로는 맞는 줄 아는데, 가슴으로 못 받아들였던 거죠.

심지어 나중에는 반대를 하다 하다 이래요. "아무개가 보기 싫어서", "아무개가 목사 되는 꼴 보기 싫어서" 찬성 못 하겠다는 거예요. 그런 생각은 성서적이지도, 신학적이지도, 교회론적이지도, 선교적이지도 않잖아요. 여성 안수를 반대할 별다른 이유가 없다는 거죠.

그렇게 1974년 총회에 여목사제를 다시 청원했고, 그 결과 헌법 '목사의 자격' 조문을 "35세 이상 된 사람"으로 고치면서 '사람'이라는 말 속에 여자와 남자가 모두 포함된다는 것을 재확인했죠. 노회 수의를 거치지 않아도 되도록 여목사제가 통과된 거예요. 그때 저희는 '이런 역사적인 날도 오는구나' 하면서 얼싸안고 손뼉 치고 그랬죠. 누구는 옆에서 '아멘 아멘' 하고. 여성도 목사가 될 수 있다는 것에 모두가 동의할 정도가 됐다는 거잖아요. 감격스러웠어요.

분위기를 무르익게 만들었던 것은
기장 여성 목회자들은 여성 안수가 주어지지 않았을 때도 모여서 공부하고 여성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사진 제공 김지선
기장 여성 목회자들은 여성 안수가 주어지지 않았을 때도 모여서 공부하고 여성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사진 제공 김지선

여목사제가 통과된 것은 교단 여성들이 전략적으로 노력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성 안수에 대한 분위기가 무르익었기 때문이기도 했어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여성 안수에 대한 성서적·신학적인 문제, 생리적·기능적 문제, 인권적 문제, 국제 교류 문제 등은 1930년대부터 논의돼 왔으니까요.

특히 당시 제 의식을 아주 확고하게 해 줬던 일이 있었어요. 1965년 우리 교단에 베다니평신도교육원이 설립됐는데, 여기서 1968년 한국교회 여교역자 목회 실태에 대한 조사를 해요. 우리가 생각하는 여교역자상과 현대 교회가 요구하는 여교역자상은 무엇이며, 그것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하는 것들이 실태 조사를 통해 나오게 된 거예요. 교단 여성들이 여성 지도력을 향상해 달라고 요구했던 건 이런 데이터를 가지고 했던 거지, 그냥 정서적으로만 "우리 한 맺혔으니까 풀어 주세요" 했던 게 아니에요.

또 한 가지는 당시 한국교회 갱신 운동으로 기장·예장통합·루터교 등 여러 교단 목사가 함께 '새바람회'라는 걸 조직해서 월요일마다 스터디를 했어요. '교회, 이대로 좋은가', '교회는 정말 민주적인가' 이런 것들을 논의했죠. 우리 교단 여신도회도 여성 목사제와 관련해서 이런 주제로 토론회를 연 적이 있었는데, 꼭 그것과 같았어요. 1971년 당시 저는 목사가 아니었는데도 새바람회 목사님들이 다 선후배라며 그냥 나오라고 했어요. 거기 참여하면서 좀 더 연대 의식이 생겼죠.

1975년 '세계여성의해'를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 고민했던 것도 1974년 여성 목사제 통과에 영향을 주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당시 크리스챤아카데미를 중심으로 여성 문제를 논의했고, 세계적인 기류에 따라 여성학이나 여성운동사 같은 걸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어요. YWCA라든지 범여성 단체들과도 교류했고, 심지어 가톨릭 수녀님들과 연대한 적도 있었죠. 당시 한 캠프장을 빌려 며칠 쉬면서 수녀님들과 여성 사제 문제라든가 여성 사역자의 현실 등을 나눴던 기억이 나네요.

교수님들도 많은 도움을 주셨어요. 저희가 한국신학대학에서 받은 교육은 여성 차별적이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더 자신감을 갖고 두드릴 수 있었죠. 여교역자들과 여신도회 지도자들이 함께 워크숍을 하면 교수님들이 주제 강의를 맡으셨고, 그야말로 '여성들이여, 일어날지어다. 깰지어다' 하시면서 오히려 더 자극을 주셨어요. 문제의식을 지닌 사람이 투쟁해야 한다고 하셨죠. 김재준·김정준·문동환·이우정·전경연 이런 분들이 다 저희 은사셨어요.

제가 여목사제 운동을 할 때는 굉장히 열심히 했는데, 정작 목사 임직은 1988년도에 했습니다. 제도 만들 때 함께했다고 해서 다 목사가 돼야 하는 건 또 아니잖아요. 저는 당시에 신학대학 나와서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 신학대학 졸업자로서 산다는 것, 이거 자체로도 벅찼어요. 그런데 거기다 목사까지 되면 너무 힘들 것 같아서 목사 임직을 하지 않았습니다. 고시를 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죠.

그랬더니 나중에 여신도들한테 혼났어요. 제도를 만들려고 그렇게 투쟁한 사람이 왜 목사 안수를 안 받느냐고, 여목사 모델을 다양하게 만들어야 하는 시점에 왜 고시도 안 치르느냐고. 저는 오히려 안수 안 받는 것이 순수해 보이지 않을까 했는데, 그걸 교만으로 보는 경우도 있더라고요. 그럼에도 안수를 받고 싶지는 않았어요. 준목 고시를 치르고도 결단을 못 한 채 교단 추천으로 영국 개혁교회 소속 학교에서 1년을 수학하게 됐어요. 세계 교회를 경험하면서 여성 목사가 되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됐죠.

1976년 7월 진행된 크리스챤아카데미 교회 여성 교육. 사진 제공 재단법인 여해와함께
1976년 7월 진행된 크리스챤아카데미 교회 여성 교육. 사진 제공 재단법인 여해와함께
여성도 총회장이 될 수 있다고

아직도 여성 안수를 도입하지 않는 교단은, 글쎄요…. 지금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게 벌써 50년 전 이야기잖아요. 저는 1970년대에 투쟁했던 사람이니, 요새는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여성 안수 얘기하면 뭐 자꾸 "인본주의적이다, 인권적인 문제다" 그러는 거 같은데, 아니 애초에 인권이 성서에서 나왔는데 왜 그걸 분리하는 거죠?

여성들을 교육하는 일이 필요할 것 같아요. 저희 교단은 베다니평신도교육원에서 여성들을 교육하면서 '사모학' 같은 건 배제했어요. 그건 여성을 정말 돕는 배필이 아니라 남성보다 한 단계 아래에 두는 프레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여성 의식이라든지, 하나님의 형상이 부여된 여성의 이미지, 권리, 기대, 이런 거에 대한 교육을 계속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고요. 하나님 앞에서 자유하고 책임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려면 여성 스스로 주체가 되는 여권운동이 필요해요. 한편으로는 우리가 해외 교회 사례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서 정체성을 찾을 수 있었듯이, 여성 목사에 대한 모델을 계속 개발해야 할 것 같아요.

저희 교단 106회 총회에서 여성 총회장이 나왔잖아요. 노회장을 하신 여성 목사님은 몇몇 계셨는데 여성 총회장은 처음이죠. 열린 교단으로서 좀 늦은 감이 있지만, 그래도 '올 것이 왔네' 하는 생각이 들면서 감격스러웠어요. 제가 지금 은퇴한 지 10년이 됐어요. 제 동기 중 남성 세 분이 총회장을 했고요. 여성 동기 중에도 훌륭한 사람이 많았는데, 그야말로 때를 만나지 못해서 자리에 오르지 못한 사람이 많죠.

총회장님이 이번에 한신대학교 개교기념일에 학교에서 설교를 하셨더라고요. 그걸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여성 목사에 대한 이미지 메이킹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여학생들의 자긍심을 높이는 건 물론이고, 남학생들도 여성이 전도사와 교역자 부인만 되는 게 아니라 총회장까지 할 수 있다고 생각을 전환할 수 있는 계기가 되겠죠. 그냥 그 자리에 서 계시는 것만 해도 굉장히 영향력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감격스럽습니다, 가슴이 벅차게!(계속)

※ 본 기획물은 정부 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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