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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신학위원회가 '사건과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매달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해 칼럼을 게재합니다. 시대적 요청에 대한 신앙고백과 응답을 신학적 접근과 표현으로 정리하는 코너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신학위원회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2022년 6월 주제는 '우리들의 블루스: 이 시끄러운 세상에 푸릉이라는 판타지'입니다. - 편집자 주

'혼돈의 카오스' 같은 시간을 지나고 있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임신 중지 관련 판결을 뒤집는 바람에 미국 여성들의 임신 중지에 대한 결정권이 사실상 박탈된 날, 상원에서는 총기 규제 최종안이 가결됐다. 허술한 의료보장 때문에 사람들이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죽어 가는 나라에서, 숱한 총기 난사로 수많은 이의 삶이 갑자기 중단되는 나라에서, 태어나지도 않은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여성의 결정권을 제한하다니 참으로 혼란스러운 사태가 아닐 수 없다.

불의한 전쟁과 강대국의 탐욕으로 세계경제는 바닥 모를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고, 일본이 전시 성 노예제로 저지른 만행을 알리기 위해 독일 미테(Mitte)구에 설치한 소녀상 앞에서 "위안부는 없었다"며 소녀상을 철거하라는 극우 단체 인사들의 언어도단은 우리 마음을 멍들게 하고 있고, 공정과 상식을 떠드는 자의 '내로남불'이 매일 최고 수위로 갱신되는 시간들 속에서 만난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는 그 자체로 온전한 해방구였다.

언제나 지상의 작은 자들에게 초점을 맞춰 온 노희경 작가는, 가난하거나 외롭거나 장애가 있거나 치매에 걸리거나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을 무대 중앙으로 불러내어 켜켜이 쌓인 서사를 다정하게 풀어내 주었다. 이제는 공간을 아예 제주로 옮기고, 마치 외국어처럼 낯선 제주 토박이말에 자막까지 붙여 가며, 변방이었던 제주를 세상의 중심으로 가져왔다. 특히 무수한 드라마에서 도피처나 여행지로만 소비되던 제주, 늘 외지인이 헤집고 다니며 주인 행세하는 제주, 4·3과 공군기지 추진의 아픔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한 채 오늘도 육지 것들의 쓰레기를 받아야 하는 제주, 그곳에서 드센 바람을 제대로 맞으며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넉넉하고 깊은 시선으로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옴니버스 형식의 드라마는 매회 사연의 주인공이 달라지지만, 푸릉 마을을 기반으로 하는 공통의 지평 위에서 다양한 이야기가 변주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작가는 회차마다 소제목을 붙이는데, 그 역시 다른 이와의 관계성에 기초한 호칭이 아니라 '한수와 은희', '영옥과 정준', '영주와 현', '동석과 선아', '인권과 호식', '미란과 은희', '춘희와 은기', '옥동과 동석'… 이런 식으로 아주 어린 아이부터 죽을 날 받아 놓은 황혼의 어멍까지, 모두 제 이름으로 존재하면서도 하모니를 내는 '블루스' 같은 리듬을 보이고 있다. 아, 그래서 드라마 제목이 '우리들의 블루스'인가 보다.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포스터. tvN 홈페이지 갈무리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포스터. tvN 홈페이지 갈무리

한동안 궁금했다. 왜 블루스일까? '난리 부르스'의 그 블루스(Blues)인가? 등장인물들이 죄다 이 난리 난 것 같은 세상에 어울리는 슬픈 노래 같은 인생들이라서? 그러다 찾아보니, '블루스'라는 장르는 미국 흑인들이 낯선 땅으로 강제 이주된 후 자신들의 가락에 가스펠 등을 이리저리 섞어서 만들었으며, 우울(feel blue)한 가사에 슬픈 가락이 배어 있기에 블루스가 됐다는 풍문같은 이야기도 들었다.

제목처럼, 드라마는 우울(blue)하지만 푸른(blue) 이야기를 부지런히 던져 준다. 거친 바다와 그보다 더 거친 바람을 맞으며 척박한 삶을 일구는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갈등과 오해와 질투와 열패감, 미성년 임신과 장애를 가진 가족을 둔 사람들의 고단한 시간들을 보노라면, '삶은 고해苦海'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그러나 작가는 드라마 마지막 회를 닫으며 당부한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분명한 사명 하나. 우리는 이 땅에 괴롭기 위해 불행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오직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 모두 행복하세요!"

그렇다면, 오직 행복하기 위해 태어난 우리가 진정 행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들의 블루스' OST 가사에 그 길로 가는 방향이 제시돼 있다.

"잊지는 말아요 함께했던 날들. 눈물이 날 때면 그대 뒤를 돌아보면 돼요. 아프지 말아요 (중략) 내가 곁에 있을게요. 외로워 지칠 때 손잡아 줄게요. 슬픔이 짙어질 때면 위로해 줄 그 한 사람이 될게요. 폭풍 속에 혼자 남아 헤매도 길이 되어 지킬게요. 어두운 길을 밝게 비추는 그대의 빛이 될게요."

마치 길 잃은 우리를 두 팔 벌려 환영하는 예수처럼, 작가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는 뉘앙스로 서로가 서로의 손을 잡아 줄 것을 부탁한다. 교회가 차별과 배제의 언어로 사람들을 내모는 이때에, 드라마는 지치고 힘든 이들이 쉬어 갈 수 있는 푸릉 마을을 통해 다시금 생의 의지를 북돋우는 것이다.

웅숭깊은 드라마에 풍덩 빠져 있던 차에, 문득 오래전 읽었던 황정은의 단편소설 '양산 펴기'1)가 떠올랐다. 모아 둔 동전 3만 원으로 지구본을 사고 싶어 하는 남자 주인공이 장어를 먹고 싶다는 아내(녹두)를 위해 구청 근처 바자회에서 양산 파는 알바를 하게 되면서 겪는 하루 동안의 이야기는 아래 문장을 통해 절묘하게 완성된다.

"로베르따 디 까메르노 웬 말이냐 자외선 차단 노점상 됩니다 안 되는 생존 양산 쓰시면 물러나라 기미 생겨요 구청장 한번 들어 보세요 나와라 나와라 가볍고 콤팩트합니다 방수 완벽하고요. 아줌마 빤스는 국산이 좋아 국산 사세요." [황정은, '양산 펴기', <파씨의 입문>(창비), 144쪽]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동석(이병헌 분)이 한쪽 다리를 구르면서 "골라 골라, 윗도리 5000원, 아랫도리 5000원"이라고 소리치면, 저쪽에선 "오늘 막 잡은 은갈치 만 원" 등의 말들이 들리듯이, 소설 속 시장에도 온갖 소리가 떠다닌다.

그러나 소설의 백미는 여기에 있다. 알바를 하며 하루종일 "너덜너덜해진 생존권"을 들은 남자는 집에 돌아와 얕은 잠에 빠진다. 그런데 녹두가 안 하던 잠꼬대를 한다며 그를 깨워 묻는다.

"뭐라는 거야 그거, 시야?
내가 뭐라고 했어?
로베르따 어쩌고 이태리 메이커에 제조는 중국입니다.
아아 그거.

노래," (153쪽)

라고 그는 잠결에 대답한다. 그렇다. 죽을 것을 알면서도 살아가는, 결론이 정해진 인생이지만, 우리 삶은 그 자체로 시일 수도, 어쩌면 노래일 수도 있는 것이다. 노희경 작가나 황정은 작가 모두, 비록 너덜너덜해진 생존권 사수를 목에 걸고 있는 인생일지라도, 푸른 바다 앞에서 매일 절망을 달고 사는 우리의 그 모양 그 꼴 같은 인생도, 본디 '노래'라고 말하는 건 아닐까. 다운증후군을 가진 영희(정은혜 분)도 멋진 그림으로 세상과 만나고, 100개의 달에 소원을 빌면 아빠가 살 수 있을 거라는 은기(기소유 분)의 소원에 풍랑이는 바다에 100척의 배를 띄워 주는 세상에선 우리 모두 이미 노래하고 있다고, 블루스의 선율이 되어 녹아들고 있다고 속삭이는 건 아닐까.

설교하지 않음으로 설교하고, 가르치지 않음으로 가르치는 이 드라마는, 제주에 살면서도 한 번도 한라산을 가 보지 못한 어멍(옥동, 김혜자 분)과 그 어멍을 평생 미워했던 아들(동석)의 뒤늦은 화해를 보여 주며 막을 내린다.

'옥동과 동석' 에피소드 포스터. tvN 홈페이지 갈무리
'옥동과 동석' 에피소드 포스터. tvN 홈페이지 갈무리

아, 드라마처럼 현실도 '해피 엔딩'이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지금 이 시간에도 빚 때문에 자살한 가족, 절망 속에 생을 마감한 발달장애인 부모, 성매매를 시키면서 동물 사료를 먹인 자매 등 악랄하고 아프고 어두운 이야기가 끊임없이 들려온다.

드라마는 이처럼 뒤틀릴 대로 뒤틀린 세상을 바꾸기엔 참으로 연약한 도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 읊조린다.

"이 서러운 세상의 따뜻한 해방구 같은 푸릉 마을 하나 있어, 캄캄한 어둠 속에 내몰린 이들에게 100개의 달로 비추게 하소서. 혼돈의 카오스를 지나는 당신과 내가 끝내 땅의 사람들에게서 하늘의 기쁨을 길어 올리는 마중물이 되게 하소서."

사람에 대해, 우울증에 대해, 미성년 임신과 청소년 인권에 대해, 이해받지 못하는 삶에 대해, 교회에 대해, 신앙에 대해, 고난받는 이들에 대해, 환대와 해방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로 당신을 초대하는 바이다.

배영미 / 기독여민회 홍보출판위원장.

1) 황정은 <파씨의 입문> (창비, 2012) 수록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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