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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보적 성경 해석 체계의 원천이 공표되다

한밝 변찬린(1934~1985)의 <선, 그 밭에서 주운 이삭들>(문사철)이 출간됐다. 이 책은 나와 깊은 인연이 있는 책이다. 학창 시절 검은 대학 노트에 적힌 이 책의 원본을 변찬린 선생에게서 받아 밤새워 읽은 기억이 소록소록 되살아난다. 변찬린의 생애와 사상을 조명한 책을 같은 출판사에서 낸 인연으로 해제를 청탁받았지만, 이를 짧은 지면에 옮기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체감했다.

변찬린은 <성경의 원리>(한국신학연구소)의 저자로 세간에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서구 신학의 대리전 양상을 벌이는 한국의 상황에서 성서 해석의 신기원을 연 역사적인 작품이다. 한국 종교 시장은 사대주의·식민주의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 언어로 종교 세계를 표현하지 못하는 학문적 제국주의에 점령당해 있다. 특히 한국 그리스도교는 서구에서 이식된 교회·신학 전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신학으로 알려진 '민중신학'마저도 주류가 아닐뿐더러, 루돌프 불트만의 해석 체계에 근거한 신학적 사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런 한국 그리스도교의 문화에서 변찬린은 그리스도교가 한국에 전래된 이래 그리스도교의 전유물인 '성서'를 인류 보편적인 성스러운 경전인 '성경'의 차원으로 해석해 낸 <성경의 원리>를 저술한다.

나는 그의 해석 체계를 '한밝성경해석학'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그의 해석학이 동서고금의 사유 체계를 회통할 뿐만 아니라 경전 해석의 패러다임을 전환할 독창적인 해석학적 사유를 담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성경의 원리>는 신학적 언어, 유교·불교·도교 등의 전통 종교의 언어, 종교 사상의 교차적 해석, 인문학·사회과학·자연과학의 학제간 방법을 총동원한 경전 해석의 표본을 제시하고 있다. 한국교회사를 전공하고 한국문화신학회 회장을 역임한 박종현 교수는 변찬린의 저술을 이렇게 평가한다. 

"그(변찬린)는 한국적 성서 이해를 통해 성서를 기독교의 전유물이 아닌 인류의 보편적 영적 유산으로 가는 길을 열려고 시도한다. 기독교가 가진 성서 이해의 한계를 지적하고 성서 전체를 한국 선맥仙脈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이러한 그의 시도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전체를 선도로서 일관된 해석을 이루어 내었다. 한국의 신학 사상가 중에는 나름의 독창적 신학을 수립한 이들이 있지만 성서 전체를 하나의 관점에서 일관되게 해석한 경우는 변찬린이 처음이었다. 그의 이러한 성서 이해는 기독교를 서구의 역사적 전통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새로운 이해를 가능하게 한 탁월한 시도였다."

<선禪, 그 밭에서 주운 이삭들 - 동방의 빛, 화쟁의 혼, 새밝에게> / 변찬린 지음 / 문사철 펴냄 / 276쪽 / 1만 5000원
<선禪, 그 밭에서 주운 이삭들 - 동방의 빛, 화쟁의 혼, 새밝에게> / 변찬린 지음 / 문사철 펴냄 / 276쪽 / 1만 5000원

변찬린 사후 30여 년이 지나 그의 생애와 사상이 <한밝 변찬린 - 한국 종교 사상가>(문사철)에서 전면적으로 복원됐고, 종교학계와 역사학계, 특히 그리스도교계에서 그의 학술적 성과에 대해 다양한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철학자 김상일은 "한국의 선맥과 기독교의 부활 사상을 상호 교차적이며, 융합적으로 이해한 것은 변찬린이 세계 종교계에서 최초라고 평가된다"고 진단한다. 원로 신학자 서창원은 "동방 종교 심성에 근거한 변찬린의 '한밝성경해석학'과 독자 반응 비평이 새롭게 주목받아 독창적 해석학으로 자리 잡기를 기대한다"고 논평한다. 성서학자인 조용식은 변찬린의 성서 해석이 "나침반으로서의 가치를 가진다"고 논평한다.

또한 민중신학자 김진호는 "한국 개신교의 뿌리를, 그 근본주의적 표상 체계로 인해 숨겨진, 하지만 신앙적 수행법에서는 기독교인들의 삶 속에 깊게 스며 있는 체험적 종교성을 해석한 책이다. 말할 수 없었던 것을 말한 셈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종교학자 윤승용은 "변찬린 선생의 성경 해석학과 한밝 사상은 이상의 '한국적 기독교'를 추구한 이들 모두의 문제의식을 함께 아우르는 신학 사상으로, 새 축의 시대 한국적 기독교의 해석 틀"이라고 평가한다. 이외에도 '도의 신학자' 김흡영은 변찬린의 선맥과 도맥을 <옥스퍼드 한국 성서 핸드북 The Oxford Handbook of the Bible in Korea>(Oxford Handbooks)에 소개하고 있다.

나는 <성경의 원리>가 서구 신학의 전통의 연장선상에서 사유하는 세계 신학적 전통과 서구 신학의 대리전을 벌이는 한국 신학계에 성서 해석의 패러다임을 전환시킨 역사적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다시 말하면, 당나라의 종파 불교가 신라에 재현되자 화쟁 사상으로 통불교 운동을 전개한 원효처럼, 변찬린은 한국의 전통 도맥인 '선맥僊脈'으로 위기에 봉착한 서구 신학의 한계를 극복하여 성서 해석의 신기원을 이룩한 것이다. 이런 변찬린의 사유 체계의 근거를 밝혀 주는 책이 그동안 희귀 절판본으로 시중에서 구하기조차 힘들었던 <선, 그 밭에서 주운 이삭들>이다. 

한국 종교계·그리스도교계의 동방 르네상스 설계도

이 책은 낡은 문명의 집결지이자 새 문명의 새벽을 밝히는 한국의 종교적 영성이 폭발하여 저술되었다. '동방의 빛, 화쟁의 혼, 새밝에게'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에는 문명 전환기적 위기에 봉착한 한국 종교계, 특히 그리스도계의 영성 정신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론이 제시돼 있다. 특정 종교의 종파 종교인이 아닌, 특정 이데올로기의 대변인도 아닌, 경제적 탐욕으로부터 탈피한 저항인으로서의 '새밝'이다. 새밝은 낡은 역사시대를 갈무리하고 영의 시대를 개명하는 동방 르네상스의 주인공이다. 새밝은 한밝 선생의 도반道伴이다.

변찬린은 "번개와 피와 아픔과 고독"으로 가득 찬 세상에 살면서, 세상에 살지 않는 마지막 때의 예언자이자 새 시대의 전도자로 살았다. 절정의 진리 체험을 상징하는 "번개", 자신의 육체적 고통과 민중의 아픔을 공명시키는 "피와 아픔", 처절한 "고독"은 동서고금의 구도자가 걸었던 삶의 집약체라고 할 수 있다.

"누구 한 사람도 이해하는 자 없이 고단히 행하는 길목마다 진한 객혈喀血의 장미꽃을 아름답게 피워 처절하도록 눈부신 화환을 엮어 저는 아버지의 제단에 바쳤습니다. 불안의 균이 전염시킨 공포의 병, 우수의 균이 감염시킨 고독의 병, 허무의 균이 오염시킨 절망의 병, 원죄의 균이 부식한 죽음의 병을 앓으면서 저는 황금빛 젊은 날을 몽땅 악마에게 빼앗겼지만 믿음의 품위와 구도자의 성실을 잃지 않기 위해 몸부림쳤습니다.
 

아버지께서 제 심전心田안에 심어 주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때문에 저는 오늘도 신음하면서 십자가의 흔적을 지고 길을 가고 있습니다." [변찬린, <성경의 원리 - 하>(한국신학연구소), 572쪽]

종교의 시대가 가고 (초)과학의 시대가 왔다고 하지만, 과학적 유토피아가 초래하는 복제 인간과 로봇 인간의 탄생, 전쟁 위기의 증폭, 생태계 위기의 파열음, 역병의 창궐 등 이곳저곳에서 문명의 경고음이 울리고 있다. 즉 지구촌을 하나의 지향점으로 묶을 수 있는 '권위'는 추락했고, 문명은 갈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 과거 이스라엘이 로마화를 배경으로 유일신 신앙을 전파하고, 프로테스탄트가 민주·인권 등의 서구적 가치를 세계화로 확산했다면, 오늘날에는 문명의 축적된 집결지인 한국이 중심이 되어 지구촌과 우주 마을에 나비효과를 일으켜야 한다. 분단이라는 냉전 체제가 상존하고 다양한 종교 전통이 축적된 한국은 세계의 모든 문제점의 집결지다. 우리는 한국이 스스로의 문제뿐만 아니라 위기에 처한 인류 문명의 난제를 해결해야 할 주인공임을 자각해야 한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

한국 종교계·그리스도계는 어떤 종교적·신학적 기제를 통해 낡은 문화를 혁신할 수 있을까? '새밝'의 탄생이 그 답이다. 새밝은 동방의 빛으로서 역사시대에 응집된 낡은 문명을 해체하고, 새 문명의 씨앗을 뿌려 온 우주에 조화의 향기를 내뿜는 열매를 맺도록 하는 구현자다. 동방 르네상스의 집행자인 새밝은 고난과 수난의 역사적 십자가를 짊어지고 진리를 향한 완전과 겸손한 행동을 겸비한 선지자로서 온전한 인간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촉구한다. 변찬린의 유언과도 같은 <성경의 원리>마지막에 있는 "번개와 피와 아픔과 고독 가운데서 쓴 <요한계시록 신해>(한국신학연구소)를 기독교인이 아닌 예수를 믿는 '이긴 자'에게 바칩니다"라는 헌사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밝 변찬린(1934~1985). 사진 출처 한밝선당 네이버 블로그
한밝 변찬린(1934~1985). 사진 출처 한밝선당 네이버 블로그

오늘날 자본과 기복신앙에 경도돼 교회 매매·세습이라는 현대판 신성모독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회칠한 무덤'과 같은 낡은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침묵의 봄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 성서의 고난 정신, 십자가와 부활, 하나님을 찾아가는 성서의 주인공은 타락하고 부패한 현대 교회의 모습을 어떻게 평가할까. 종교적 권위가 추락하고 하나님은 역사에서 추방당하고 고난과 수난을 외면한 신앙이 득세하는 텅 빈 종교의 장에서, 현대인은 자본과 기복신앙의 부산물인 과학적 유토피아를 창조하려고 한다. 그러나 생명공학·로봇공학으로 대변되는 과학적 유토피아가 과연 우리 미래를 책임질 수 있을 것인가. 변찬린은 인간 존재의 가능성을 과소평가하는 제도 종교, 직업 종교인, 직업 정치인, 직업 지성인의 허위를 폭로하며 만물의 영장으로서 인간의 품위를 회복하라고 당부한다.

참다운 인간이 없는 미래는 공허하다. 참다운 그리스도교인이 없는데 참하나님은 어찌 나타날 수 있을까. 참 하나님이 나타난들 기복신앙에 빠진 그리스도교인이 참하나님을 인식이나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이 불러내신 땅에서 나그네 생활을 한 아브라함·이삭·야곱, 미디안 땅에서 생활한 모세, 불 수레를 타고 우화등선한 엘리야, 아기 예수를 영접한 빈 들의 목자, 예수를 따라나선 제자와 민중들은 모두 '구도자'로 살았다. 믿음의 대장정에 오른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다.

성서를 보면, 하나님을 만나려는 구도자들은 모두 믿음으로 고난과 수난의 대장정을 떠난다. 그들은 예수가 태어나기 전이나 후나, 무소유의 자세로 건물 교회와 신학 체계에 안주하지 않았다. 일용할 양식을 의지해 하늘 가는 계단을 향해 한 발 한 발 걸어갔다. 이런 무소유의 구도자는 결코 성서의 전유물이 아니다. 종교를 막론하고 성인들의 공통점은 진리를 위해 완전을 추구하면서도 민중과 더불어 겸손의 자리에서 처했다는 것이다. 유교의 군자, 불교의 보살, 도교의 진인, 그리스도교의 의인이 모두 이러한 존재다.

변찬린은 동방 르네상스의 주인공인 '새밝'을 81차례나 호명하며 문명의 폐단과 종교의 허상과 권력의 무상함을 깨닫고 새로운 길을 나서라고 독촉한다. 서쪽에 물든 화려한 석양에 현혹되지 말고, 일체의 낡은 것을 버리고, 문명의 새벽을 밝히라고 호소한다. 그의 애타는 목소리를 들어 보자.

"내가 영의 시대를 예언하고 지인至人의 탄생을 선언하고 인간의 원리를 개봉하고 미래를 노래하니 저 하찮은 소인들은 대소大笑합니다. '종교에서 탈출하기 위하여 출애굽 하라' , '성인들을 살리기 위하여 고성古聖들을 초극하라',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해원解寃 굿을 하자' 이렇게 대갈大喝하니 천박한 종교꾼들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사랑의 공동체와 신령한 공동각共同覺을 증거하니 오만한 석두石頭들은 개별의 각을 고집합니다." (234쪽)

"우리의 시조는 오고 있는 하나님. 아담의 혈맥血脈이 아닌 예수의 영맥. 아브라함과 다윗 자손과 그 세계世系가 아닌 멜기세덱과 예수의 도맥道脈이다.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는 평화의 왕. 이 무궁한 심맥心脈과 영적 계보는 바울도 이해하지 못하였다." (191쪽)

"홀로 계시를 받았다고 선전하는 직업적인 성직자 당국자들과 절교하라. '십자가의 보살행'과 '공동의 각'은 역사의 방향이며 '사랑의 공동체'는 창조적 진화의 내실이며 수렴임을 깊이 대각하자." (211쪽)

"새밝이여 그대는 대인大人이 될 가능태임을 명심하여 저 조무래기 철학자들과 갈보 같은 신학자들과 절교하라. 그대는 열린 미래 앞에 서라. 뒤를 돌아보고 소금 기둥이 되지 말고 탈출한 애굽을 그리워하지 말고 역사의 속도를 타고 앞을 향해 약진하라." (207쪽)

깨달음의 높이와 지성의 두께와 행동의 넓이가 누구보다 심대한 한밝 선생은 그의 구도여정인 <선, 그 밭에서 주운 이삭들>에서 탁월한 언어적 구사력으로 독자들의 가슴에 불화살을 쏜다. 이 책은 사대주의와 식민주의가 옥죄던 한국(인)의 사유 공간이 해방되는 쾌감을 선사함과 동시에, 독자들에게 우주촌의 한 사람으로 거듭나는 지적 체험을 제공해 줄 것이다. 이 책의 출간은 동방 르네상스가 열렸다는 상징적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호재 / 중국사회과학원에서 중국 종교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성균관대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 자하원 원장이다. 관심 영역은 동서양 종교 사상 연구를 바탕으로 새로운 문명의 사유 체계를 구축하고, '새 축 시대의 영성 생활인'이라는 생활 프로젝트를 세계화하는 데 있다. 주요 저서로는 <포스트 종교 운동>·<한밝 변찬린 - 한국 종교 사상가>(문사철), <인생 지도>(나비꿈) 등이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한국의 신명神明 사상과 신명 공동체', '한국 재래 종교의 구원관', '변찬린의 새 교회론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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