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주제로 열린 '2022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부활절 연합 예배 - 거친 길은 평탄하게 하고'에서 발표된 장애인 당사자 배융호 목사(한국환경건축연구원 책임연구위원) 설교문입니다. 성서 본문은 레위기 19장 14절, 누가복음 4장 18~19절입니다. 설교자의 허락을 구하여 전문을 게재합니다. - 편집자 주
4월 17일 열린 2022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부활절 연합 예배. 뉴스앤조이 구권효 
4월 17일 열린 2022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부활절 연합 예배. 뉴스앤조이 구권효 

장애인의 권리 등 소수자의 권리는 국제 인권의 목록에 포함이 됩니다. 소수자의 권리는 인권으로 보호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장애인의 권리는 국제 인권 목록에도 60번째에 올라가 있습니다. 그만큼 장애인의 권리는 중요합니다. 이러한 장애인의 권리 가운데서도 '이동권'은 가장 핵심적인 권리입니다. 이동권이 보장되지 않으면 교육도, 자립 생활도, 사회참여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장애인의 이동권, 장애인의 권리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고 계실까요? 예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하기를 원하실까요?

장애인 인권 보장을 명하신 하나님

오늘 레위기의 말씀을 보면 "듣지 못하는 사람을 저주해서는 안 된다. 눈이 먼 사람 앞에 걸려 넘어질 것을 놓아서는 안 된다. 너는 하나님 두려운 줄을 알아야 한다. 나는 주다"(새번역, 레19:14)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레위기 19장 9~10절은 외국인과 가난한 자들을 위한 재물의 배분을 이야기하고, 11절은 도둑질과 거짓말의 금지, 12절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 13절은 정당한 품삯의 지불을 이야기합니다. 이후 오늘의 본문인 14절이 나오고 이어서 15절에 공정한 재판이 나옵니다.

레위기 19장은 전체적으로 십계명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14절은 특히 장애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농아인을 저주하지 말라고 합니다. 농아인은 자신을 욕한 줄도 모를 것이고, 그래서 그 점을 악용해 몰래 뒤에서 욕을 하고 속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농아인이 잘 알 수 있도록 의사소통하라'는 의미입니다. 시각장애인 앞에는 장애물을 두지 말라고 합니다. 걸려 넘어져 다치기 때문입니다.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시각장애인 앞의 장애물을 치우라'는 의미입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장애인의 인권을 보호하라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 바꾸면, 농아인을 위한 수어 통역을 제공하고 모든 화면에 자막을 제공하라는 것이며, 시각장애인을 위한 정보 접근을 보장하고 그들이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장애인의 권리를 보호하고 그들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하라는 것이고, 그 내용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윤리 규범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라는 12절의 명령에 순종한다면, 14절에 나오는 장애인의 인권을 보장하라는 명령에도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레위기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명령입니다.

설교 중인 배융호 목사(한국환경건축연구원). 뉴스앤조이 구권효
설교 중인 배융호 목사(한국환경건축연구원). 뉴스앤조이 구권효
비난·혐오 아닌 연대·지지가 예수님 뜻

누가복음에서는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새번역, 눅 4:18~19)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말씀은 예수님의 미션을 선포하는 내용입니다. 예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여 "내가 온 것은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포로에게 해방을, 시각장애인에게 광명을, 억눌린 사람에게 자유를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기 위해서"라고 선언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해방과 광명과 자유를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동권을 보장받지 못하면 장애인은 포로 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동권을 보장받지 못하면 장애인의 삶은 억눌리게 됩니다. 따라서 장애인 이동권 보장은 해방과 자유를 주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러나 부활 이전에 먼저 십자가의 죽음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까?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신분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가장 천대받던 지역인 나사렛 출신이었습니다. 지역 차별을 받은 것입니다. 게다가 가난했습니다. 심지어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빈부의 차별을 받은 것입니다. 게다가 교육도 제대로 못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랍비와 바리새인들과 토론을 하자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무학의 변두리 출신이 당대 최고의 교수들과 학술 논쟁을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신분은 사람들의 비난과 혐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개혁과 혁명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기득권 세력인 제사장·랍비·바리새인들과는 다른 길을 가셨습니다. 오히려 기득권 세력의 부정과 불신앙을 지적하면서, 하나님나라는 기득권 세력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종교 세력들에게는 오히려 하나님나라에 가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회당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고 기도는 보이지 않게 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랍비와 바리새인들이 추종하는 모세의 율법 대신에 새 계명을 주시고, 무엇보다도 예수 자신이 메시아·그리스도임을 선포하셨습니다. 이런 예수의 행동은 그 시대에 엄청난 충격을 주는 개혁이자 혁명이었습니다. 이러한 개혁과 혁명은 기득권 세력을 위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살인자를 풀어 주고 대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요구하게 됩니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예수님에 대한 비난과 혐오, 그리고 개혁과 혁명이 가져온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비난과 혐오의 연속이었습니다. 지금 여기에 예수께서 오신다면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오실까요? 사람들의 사랑과 칭송과 선망의 대상으로 오실까요, 아니면 비난과 혐오의 대상으로 오실까요? 저는 예수님은 지금 가장 손가락질받고 비난받고 혐오받는 사람의 모습으로 오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렇게 오신 예수님은 비난하는 자가 아닌 비난받는 자와 함께하시고, 혐오하는 자가 아닌 혐오받는 사람들과 함께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 쪽에 서 있습니까? 비난하고 혐오하는 쪽입니까, 비난받고 혐오받는 쪽입니까?

우리는 어느 쪽에 서 있습니까?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우리는 어느 쪽에 서 있습니까?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장애인 이동권 보장은 하나님 명령이자,
예수 뜻을 따르는 사명

일생을 개혁과 혁명의 삶을 사시고 그것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께서 지금 이곳에 오신다면, 장애인 이동권 투쟁에 함께하실 것입니다. 장애인 권리 예산 확보 투쟁에 함께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득권 세력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 이루기 원하셨고, 그 나라는 가난하고 억눌리고 포로 된 사람들이 자유와 해방을 맞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장애인, 외국인, 이주 노동자, 성소수자 등 모든 소수자에 대한 비난과 혐오를 중단하고 예수의 뜻에 따라 연대와 지지에 함께해 줄 것을 부탁합니다. 그것이 하나님나라를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개혁과 혁명의 삶을 사신 예수님의 뜻이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장애인의 권리 보장과 이동권의 보장은 하나님의 명령이며, 예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사명입니다.

배융호 / 목사, 한국환경건축연구원 책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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