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인간을 등에 지고 달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말과 인간이 함께 정해진 트랙을 달려 나가기 위해서는, 말에게도 인간에게도 훈련이 필요하다. 나는 경주마 훈련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훈련을 받은 말들이 인간에게 복종하는 연습을 했다는 것 쯤은 알고 있다. 달리라고 하면 달리는 시간을 반복해 온 그 말들이 힘껏 달릴수록 칭찬받는다는 사실을 학습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그렇게 달리는 동안 자신을 힘들게 하는 인간들을 콱 믿어 버린 순간이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본다. 훈련과 경주 같은 고생스러운 과정을 버티기 위해 말이 인간에게 품었을 마음이 따로 있지 않을까. 

5년여간 경주마로 이용되다가 성적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말 대여 업체에 팔려 온1) 퇴역 경주마 '까미'는 드라마 촬영을 하다가 죽었다. 

까미는 극중 인물이 낙마하는 장면을 찍기 위해 불려 왔다. 인간들이 까미의 발에 줄을 묶고, 까미의 등에 배우를 태우고, 까미로 하여금 힘껏 달리게 했다. 인간이 달리자고 해서 달린 일이야 셀 수 없이 여러 번 해 봐서 익숙했을 테지만, 달리는 도중에 발에 묶은 끈을 당겨 넘어지게 하는 건 태어나 처음 겪는 무서운 배신이었을 것이다. 까미는 자신이 달려 나갔던 힘을 그대로 받아 바닥에 목이 꺾이며 고꾸라졌다. 달리다 만 뒷발이 하나, 둘, 세 번 흙바닥을 긁다가 이내 움직임을 멈췄다.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의 한 장면. 논란이 된 이 장면은 CG가 아니었다. KBS Drama Classic 유튜브 채널 갈무리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의 한 장면. 논란이 된 이 장면은 CG가 아니었다. KBS Drama Classic 유튜브 채널 갈무리

"까미가 넘어질 때, 고통스러운 것도 있는데, 왠지 당황하는 것 같지 않아? 순간적으로 말이야. 왜 이렇게 된 거지? 내가 뭘 잘못했지? 이런 당황과 수치도 있는 거 같지 않아?"

까미의 영상을 10번 정도 돌려 보고 나서 친구에게 보냈던 텔레그램 메시지다. 

동물도 감정을 느끼니까 동물을 학대하지 말자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동물 보호·복지나, 동물이 갖는 '권리'에 대해서도 지금은 논하고 싶지 않다. 동물 촬영 가이드라인 제작을 비롯한 제도 개선 촉구에 대해서는 동물자유연대 등 여러 동물권 활동 단체에서 활약2)해 주셨으니 그분들의 글을 읽으면 된다. 

나는 그냥 까미를 봤다. 까미는 배신을 당한 거라고, 이건 너무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느끼면서. 그게 내가 말하고 싶은 모든 것의 시작이다. 나는 까미를 봤고, 까미를 생각했다. 예를 들어, 까미가 혹시 다시 달릴 수 있게 되어 기쁘다고 생각하진 않았을지 궁금해했다. 퇴역한 경주마 중에서는 인간을 좋아하는 말, 경주에 나가지 못해 우울해하는 말도 있다고 하던데, 까미는 아무것도 모르고 촬영장에 첫발을 내딛었을 때 내심 기쁘기도 했을까? 드디어 자신에게 다시 쓸모가 생겼다는, 안심되고 들뜨는 기대가 혹시 있었을까? 

그런 다음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일하러 갔다가 죽은 노동자들 생각도 했다. 일터에서 시키는 대로 하다가 죽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산업재해로 죽은 사람이 2021년에만 828명이다. 떨어져 죽고, 기계에 끼여 죽고, 깔려 죽고, 뒤집혀 죽은 인간들의 사망 원인을 생각하고 있자, 유령처럼 너울거리는 질문들이 어김없이 따라와 붙었다. 왜 이렇게 된 거지? 내가 뭘 잘못했지? 방 안에서 혼자 까미를 보면서 생각하는 중이었므로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한다. 회사가 잘못했지. 안전 수칙을 지키고 작업 환경을 점검하는 것보다 인간이 죽는 편이 저렴해서 그런 거지.

그래, 아무래도 번거롭게 CG 작업 같은 걸 따로 하는 것보다는 까미가 죽는 편이 저렴했겠지. 그렇게 혼자만의 생각이 이쪽저쪽으로 튀며 이어지는 가운데, 갑자기 죽은 까미가 나타나(!) 묻는다. 내가 만약 경주장에서 더 열심히 달렸다면 이렇게 죽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나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말문이 막힌 채로 까미를 마주 본다. 경주마들은 자신이 언젠간 반드시 은퇴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 퇴역 경주마는 이렇게 죽지 않아도 결국 사료 제작 등에 '활용'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달려 왔다. 그건 까미가 자책할 일이 아니니 질문을 바꿔 보자는 제안을 꺼내기 전에, 다른 어떤 반응을 하기도 전에 먼저 내 두 뺨이 붉게 달아오르고 눈가에 눈물이 고인다.

이건 전부 부적절한 상상이다. 동물이, 타인이 진짜로 무엇을 느꼈고 무슨 생각을 했으며 어떤 질문을 했을지는 나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내가 추측한 감정과 연결했던 존재들이 이대로 괜찮은지 아닌지를 당사자에게 확인해 볼 방법은 없다. 확실하게 남아 만져지는 건 수치심 때문에 뜨거워진 얼굴과 눈가에 남은 눈물 자국 뿐이다. 나는 까미를 봤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까미가 있는 쪽에 고통과 수치가 있다고 느꼈다. 분명 그랬는데, 혼자 있는 방 밖으로 나오면 내가 느낀 것들이 진짜라고 주장할 수 있는 상대가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대체 내 뺨과 눈의 상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내 쪽으로 꽂히는 시선의 주인을 찾다가 내가 뭔가 착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동물이 나를 보고 있었다. 동물도 나를 보고 있었다.

동물이 인간을 본다. 인간을 기피하는 벌레들, 인간을 따라 점점 더 웃는 얼굴이 되어 가는 강아지들, 인간에게 너무 자주 거절당해 주인보다 앞서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는 시각장애인 안내견들, 인간에게 보답하고자 건넨 죽은 쥐가 호감을 얻지 못하자 살아 있는 쥐로 바꿔 주는 고양이들, 지나가는 행인의 얼굴을 알아보는 까치와 까마귀들, 꽤나 사무적인 태도로 관광객을 접대하는 관광지의 동물들, 인간을 다른 종과 구분해 잡아먹지 않기로 결정한 범고래들이 인간을 본다.

드라마 촬영장에서 쓰러진 경주마, 인간이 만든 유리 벽에 부딪혀 죽는 새, 인간이 버리고 간 그물에 걸린 바다 생물, 인간이 오염시킨 물을 마시고 죽은 물살이, 고기로 가공되기 전 죽음을 앞두고 피눈물을 흘리는 소, 태어나자마자 기계에 갈려 다져지는 수평아리들, 도살장으로 향하는 트럭에 담겨 동물권 활동가들이 주는 물과 감자를 허겁지겁 받아먹는 돼지가 인간을 본다. 밥을 먹일 수도 밥으로 먹을 수도 있는 것, 옷을 입힐 수도 옷으로 입을 수도 있는 것, 쓰다듬을 수도 죽일 수도 있는 것들의 눈이 인간 말고는 만날 수 없는 장소까지 따라 들어와 나를 보고 있다. 

동물이 인간을 본다. 신이 인간을 보듯이. 너무 많이 겹쳐져서 누가 누구인지 모르겠는 얼굴의 투명한 입이 천천히 움직인다. 우리 중 누구도 천국에 갈 수 없다. 이제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한유리 / 머리 아플 때 시편 23편 부르는 사람.



1) 생명환경권행동제주비건·제주동물연구소 X 동물자유연대, 인스타그램 게시물 "은퇴 후 촬영 현장에서 사망한 경주마, 퇴역 경주마 복지 체계 구축을 촉구한다"(2022. 01. 22.) 참고.
2) 단지 한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동물을 저렇게 대하는 건 부당했다는 지점에 많은 시민의 동의가 모였고, 방송국도 농림축산부도 미디어에 출연하는 동물이 지금보다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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