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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렸을 때, 이 교회는 내 교회였어요. 사실 그때는 모두가 교회를 다녔죠!"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에 위치한 버클리한인교회(현 열린교회)의 한 중년 남성이 말했습니다. 교회의 추세가 바뀌었다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비록 미국보다 느리기는 하지만, 제가 나고 자란 한국에서도 기독교가 쇠퇴하는 추세는 가시적입니다.

저는 현재 베이 지역에서 백인이 다수인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쇠퇴가 어느 때보다 분명하게 진행되는 것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비록 활동적이고 성장하는 새로운 소수민족 교회도 있지만 말이죠.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는 않은' 젊은 세대, 특히 캘리포니아 문화에서는 이런 현상이 두드러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왜 쇠퇴하는가'하는 질문보다 목회자인 제게 더 적합하고 중요한 질문은 '왜 그럼에도 기독교인가', '기독교는 여전히 중요한가'일 것입니다.

저는 이 글에서 제가 찾은 나름의 답을 나누고자 합니다. 목회하고 고민하고 배우면서 제 대답은 계속 바뀌고 보완되겠지만요. 제 생각을 나누는 이유는 답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아마 그건 평생이 걸리겠죠) '내가 왜 여기 있고, 왜 이 일을 하는지' 스스로에게 답변하기 위해서입니다. '기독교는 여전히 중요한가' 하는 질문은 '기독교가 우리 시대에 실용적으로 유효한가' 하는 질문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저는 누가복음에서 찾은 세 가지로 답을 대신하고 싶습니다.

1. 기독교의 성경은 삶을 해석하는 큰 이야기 틀을 제공합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이야기 틀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이는 미국 대선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혹은 진보와 보수의 전쟁으로 봅니다.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로 남아 있을 것인지 아니면 중국이나 러시아가 패권을 쥘 것인지', '주식이 오를 것인지 내릴 것인지', '미국 대통령이 성경 예언을 이룰 것인지' 하는 관점으로 대선을 보는 이도 있습니다. 우리가 동의하든 안 하든 그들은 그들의 이야기 안에서 살고, 사실은 우리 모두가 각자 이야기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독특한 이야기 틀을 제공합니다. 전 우주의 하나님이 인간과 피조물을 창조해 에덴동산에 놓아두셨지만, 우리가 이 낙원(paradise)에서 쫓겨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보내 파괴된 세상과 관계를 회복하고 우리를 하나님나라, 즉 하나님의 통치로 초대하셨지요.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강도 둘이 그 옆에 함께 매달립니다. 유대 지도자들과 로마 군인들, 그리고 한 강도가 그를 비웃으며 예수에게 "너를 구원하고, 나를 구원하라"고 외칠 때, 예수는 침묵합니다. 하지만 회개하는 강도가 예수(히브리어로 '야웨가 구원하신다')를 부르고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말할 때, 예수는 그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고난받고 우리를 다시 낙원으로 초대해 구원하신다.' 예수의 이야기는 치유·축귀의 기적뿐 아니라 병든 자, 가난한 자, 소외된 자를 초대해 사회·문화적 장벽을 허무는 기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기독교 내러티브가 우리 목표와 삶의 틀을 재정립하고 새롭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믿습니다.

2. 기독교 신앙은 우리의 의사 결정에 필요한 윤리적 틀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말하는 21세기,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저는 조던 피터슨(Jordan B. Peterson)의 말처럼, 경쟁하는 가치·도덕 사이에 여전히 위계질서가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뇌가 가진 가장 중요한 기능이 정말 중요한 것에 집중하기 위해 다른 것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기독교 신앙이 우리에게 삶을 인지하고 이해하는 적절한 틀 혹은 가치 체계를 제공한다고 믿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는 강도를 만나 반쯤 죽어 있는 한 유대인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제사장은 그를 지나치고, 레위인도 지나칩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보고 가까이 와서 도와줍니다. 이 이야기에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종교적 규율입니다. 성전에서 섬기는 이는 시체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했고, 그래서 반쯤 죽은 사람을 만지지 말아야 했습니다. 둘째, 인종적 우월감·편견입니다.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을 혼합된 민족으로 여겨 증오했습니다. 그렇다고 제사장과 레위인의 행동이 정당화될까요? "이들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냐" 하는 예수의 질문에 대한 답은 너무나 분명해 보입니다.

보스턴대학 종교학 교수 스티븐 프로테로(Stephen Prothero)는 기독교의 핵심 문제는 '죄'이고 해답은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기독교의 핵심이 '윤리', 즉 단순한 생존을 넘어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라고 봅니다. 기독교 신앙과 윤리는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고 약자를 돌보는 일이 종교적 규율, 민족적 편견, 혹은 경제적 이득보다 더 높은 가치라고 말합니다.

3. 기독교의 구세주는 우리에게 궁극적 힘을 경험하게 합니다

인간은 종교적 존재입니다. 우리 모두는 신이든 사람이든 사물이든 무언가를 예배하고 초월적인 경험을 하기를 갈망합니다. 쉽게 이해하려면 연예인·스포츠팀의 팬덤을 생각하면 됩니다. 월드컵 경기에서 자국 대표팀이 골을 넣거나 내가 선호하는 팀이 우승을 하면 우리는 환희에 빠집니다. 이것이 바로 초월적 경험입니다.

이런 경험이 대게 일방적이고 상호작용은 거의 없는 반면, 기독교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기반으로 합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뒤, 두 제자가 엠마오로 향합니다. 부활한 예수가 가까이 와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묻지만, 그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죠. 둘 중 한 명인 글로바가 "내가 메시아라고 생각했던 예수가 죽는 것을 보며 얼마나 실망했는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자 예수는 메시아가 왜 필히 고난을 받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하는지 설명합니다. 날이 저물자 제자들은 예수에게 함께 머물다 가라고 말합니다. 여전히 그가 누구인지 모른 채 말입니다. 예수가 떡을 떼어 줄 때, 그들은 비로소 예수를 알아 봅니다. 예수는 사라지고 보이지 않게 되죠. 그들은 말합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어 주실 때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않았습니까?"

약간은 초현실적인 이 이야기는 기독교 신앙생활이 약속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 줍니다. 경외감과 놀라움, 궁극적 힘을 만나는 감동과 열망, 두려움과 절망 속에서도 무언가를 따르고 싶은 욕구와 기쁨입니다. 저는 기독교가 제시하는 이 궁극적 존재와의 쌍방적인 만남과 교제에 우리의 삶을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습니다.

박현호 목사 / Grace United Methodist Church of San Ramon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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