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을 읽다 - 로완 윌리엄스의 바울서신 읽기> / 로완 윌리엄스 지음 / 손승우 옮김 / 비아 펴냄 / 160쪽 / 1만 2000원
<바울을 읽다 - 로완 윌리엄스의 바울서신 읽기> / 로완 윌리엄스 지음 / 손승우 옮김 / 비아 펴냄 / 160쪽 / 1만 2000원

'교회'로 번역된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는 시민들의 모임이다. 너무나 잘 아는, 그러나 바울서신을 읽으면서 단 한 번도 고민해 보지 않았던 내용이다.

"이는 '시민들의 모임'을 뜻하는 그리스어입니다. 고대 지중해 도시들에서 에클레시아는 시민만이 참석해 표결을 하고 특정 사안을 토론할 수 있는 회의를 의미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를 에클레시아라고 불렀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온 세상에서 일어나는 공적 사안을 논의하는 희의에 모든 이(노예, 이주자, 시민이든 누구나)가 참석하도록 부르셨다는 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교회에서는 누구나 시민입니다." (92쪽)

로완 윌리엄스의 글은 쉽다. 그리고 명료하다. 결코 피상적이지 않다. 로완 윌리엄스는 성경과 현대 독자들 사이에 놓인 2000년의 시간과 낯선 언어와 문화의 간극間隙을 메우는 신통한 능력의 소유자다. 인간의 본질 그 자체에 주목하고, 시대의 언어로 다시 들려준다. 바울 신학, 아니 바울서신이란 단어만으로 주눅 들기에 충분하다. 바울과 바울서신에 관련한 책을 읽고 또 읽어도 바울이라는 바다에 물장구치는 어린아이 같다. 작년 4월 존 바클레이의 <바울과 선물>(새물결플러스)을 읽었을 때는 숨이 턱턱 막혔다. 선물이라는 관점에서 바울의 신학을 재평가한 바클레이의 안목은 독자들로 하여금 혀를 내두르게 한다. 바울 신학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바울 신학을 어렵게 생각한다는 것이 이상하다. 왜냐하면 바울의 편지를 받았던 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수백 권의 책을 읽을 리 만무하고(대부분 문맹이었다), 읽고 또 읽어도 이해하기 힘든 신학 사상이라고 생각할 리도 없지 않는가. 바울서신은 말 그대로 바울의 '편지'일 뿐이다. 그럼에도 왜 이리 바울 신학은 학자들이나 신자들을 주눅 들게 하는 것일까.

나도 모르게 잘못된 생각에 함몰되었던 탓에 140쪽 분량의 작은 '바울 읽기'가 손에 들렸을 때 걱정부터 되었다. '너무 간단한 거 아냐?', '내용이 너무 시시하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얇게 바울과 관련한 책을 쓸 수 있단 말인가' 걱정인지 염려인지 무시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마음으로 책을 읽어 나갔다. 단숨에 읽었다. 2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읽었다는 표현보다는 '빨려 들었다'. 그렇다. 무엇인가에 홀린 듯이 읽었다.

이 책은 공동체의 관점, 또는 시민의 관점으로 바울서신 전체를 훑어 나간다. 모두 3부로 나뉘어 있는데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흐름이 자연스럽다. 로완 윌리엄스만의 독특한 서사적 글쓰기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듣는 강연 같다. 이 책은 "강연을 녹취하고 정리"(14쪽)한 것이다. 그런데 강연이라고 하기에는 참으로 깊고, 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흥미롭다. 단숨에 책을 읽고 '와 진짜 대단하다'라는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지금까지 읽은 로완 윌리엄스의 책이 대부분 그랬지만 이 책은 복음서가 아니라 '바울 신학'에 관련한 책이 아닌가. 서두에서 윌리엄스는 톰 라이트의 <바울과 하나님의 신실하심>(크리스천다이제스트)을 소개하며 읽을 것을 부탁한다. 그런데 진심으로 필자는 Th.M. 이상 공부하지 않으려는 이들에게 <바울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추천하고 싶지 않다. 정말 어렵고 두껍다. 물론 '바울에 관한 새 관점'에 관심 있는 독자들이라면 백 번이고 추천하지만 말이다. 필자는 라이트의 바울 신학 관련 책들을 읽으면서 힘들었고,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기 쉽지 않았다. 그러나 로완 윌리엄스의 이 책은 탄성이 절로 나온다.

1부에서는 내부인과 외부인의 관점에서 당시 세계를 파악한다. 로마 시민으로서의 바울, 유대인으로서의 바울, 그리고 인간 그 자체로서의 바울을 다룬다. 바울은 그 어떤 유대인보다 열심 있는 바리새인이었다. 그런데 바울은 빌립보 관리들이 겁을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로마 시민'이었다. 유대식 사울이란 이름과 로마식 바울이란 이름을 동시에 가진 바울은 로마 시민인 동시에 유대인으로서의 이중적 정체성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로마 시민이자 여행자, 숙련공인 파울로스인 동시에 유대교 교사이자 율법 전문가, 그리고 한때나마 이단 색출 집단의 지도자였던 샤울(오타인 듯하다. '사울'로 읽어야 한다. - 필자 주)이었습니다." (41쪽)

그 사람이 속한 세계는 '범주'이며, '틀'이다(43쪽). 그런데 바울은 그들이 가진 범주와 틀이 아닌 "새로운 세계 질서"(59쪽)로 그리스도인들을 인도한다. 아니 이미 그 안에 있음을 일깨운다. 로완 윌리엄스는 2부에서 그리스도인의 '보편적 환대'를 설명한다. 교회, 즉 '에클레시아'는 새로운 공동체이며, 한 몸이다. 즉 차별이나 차등이 없는 균등하고 균일한 자유와 권리를 가진 존재들인 것이다. 이것이 에클레시아이다.

"모든 이가 존중받을 자격이 있으며 모든 이가 보호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것이 한 분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생기를 얻게 된다는 말의 참된 의미입니다." (90쪽)

교회는 모두가 독립적인 개체(에클레시아의 회원처럼)인 동시에 서로에게 종속된 존재들이다. 윌리엄스는 남편의 몸이 아내에게 속했음을(고전 7:4) 고지한 바울의 발언에 대해 "현실을 뒤흔드는 복음의 새로움"(91쪽)의 차원으로 해석한다. 여성이나 노예나, 어린이나 노약자나 모두가 하늘에 속해 있다고 바울은 말한다(빌 3:20). 그들은 하나님나라의 정치에 참여한다.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소유함으로 재판과 여행의 안정을 보장받듯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서는 누구나 시민"(92쪽)인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κτίσις)이라"(고후 5:17)고 선언한다. '그리스도 안(ἐν Χριστῷ)'은 곧 십자가를 따르는 삶이다. 십자가는 철저히 정치적이며 반율법적이다.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멀어짐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명징하게 드러내는 역설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예수는 철저히 하나님께 버려짐으로 세상을 향한 하나님 사랑 - 윌리엄스는 '환대'로 표현한다 - 을 드러낸다(122쪽). 마지막 3부는 새 피조물로서의 교회 공동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다룬다.

대가의 글을 '서평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불성설인가. 그릇된 서평은 책의 내용을 왜곡하거나 오독하게 한다.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쓰면서 그런 생각에 짓눌렸다. 로완 윌리엄스의 모든 책을 추천한다. 특히 이 책을 더 추천하고 싶다. 덤으로 사순절에 바울서신을 읽고 묵상하도록 부록에 가이드를 제공하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온 세계가 혼란 속에 있다. 우리나라는 '사회적 거리 두기'를 권고하고 있다. 이럴 때 이 책을 벗 삼아 바울서신을 묵상해 보는 것은 어떨까?

*이 글은 <크리스찬북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정현욱 /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인, 서평가

외부 기고는 <뉴스앤조이>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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