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유행 같다. 크든 작든 교회마다 대예배실에 강대상 위에 스크린에 설교할 본문을 띄우고 찬송 가사도 띄워 주어서 성도들은 성경, 찬송가를 손에 들고 부르지 않게 되었다. 강대상 앞에선 목사님의 얼굴을 보는 것보다 화면에 가득 찬 목사님의 얼굴을 보고, 찬송가, 성경책 대신 화면에 친절하게 너무나 친절하게 띄워 주는 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서 성경 구절을 읽고 찬송 가사를 보고 찬송을 부른다.

찬송가를 손에 들지 않고, 성경 본문을 찾느라 성경을 뒤적거리는 풍경을 보기 드물다. 기술 과학이 고도로 발달해 최첨단 시대를 걷고 있으니, 교회 안에도 역시 최첨단 시설과 기기들이 들어와 친절하게 사람이 해야 할 간단한 일조차도 다 해 준다. 좋은 것을 많이 들여 놓고 잘 활용할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그런데 그 좋은 것들이 때때로 이질적이고 괴리감을 느끼게 할 때가 있다.

옛 것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한다. 찬송가가 보편화되어 있지 않았던 시절에는 커다란 종이에 큰 글자로 가사를 써서 한 장씩 넘겨가면서 찬송을 불렀던 적이 있었다. 성경 찬송이 보편화되어서는 어디든지 언제든지 예배 시간엔 찬송가를 들고 찬송가를 들고 불렀다. 오랜 세월 동안 해 왔던 추억이 있는 우리 교회의 모습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교회 안에 편리한 스크린이 들어 왔고, 교회마다 유행처럼 스크린 없이 예배드리는 교회가 별로 없다. 예배를 인도하는 찬양단이 또 언제부턴가 유행처럼 생겨나 웬만한 교회엔 다 있게 되었다. 교회마다 가보면 찬양대 말고도 찬양단이 한두 개 이상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오늘날은 영상 시대라 한다. 귀로 듣는 시대가 아니라 보는 시대, 보이는 것에 크게 자극받는 시대이다 보니 교회 안에도 영상을 통해 많은 것을 실용화하고 있다. 강대상 위 대형 스크린에 성경 구절을 띄우고 찬양 가사를 띄우는가 하면 광고까지 영상 광고로 대체하고 있다. 사람들은 강대상 앞에 서서 설교하는 목사님의 얼굴을 보는 것보다 영상에 나타나는 목사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성경, 찬송가를 펼쳐보기보다는 두 손을 편하게 놓고 앉아 스크린에 주목한다.

하나님께 주목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인지, 스크린에 예배드리는지 혼돈스럽기도 하다. 이제는 교회 갈 때 성경 찬송가를 들고 다니지 않는 성도들이 태반이다. 너무나 친절한 영상이 다 알아서 해 주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이 나오면 크고 작은 교회를 막론하고 받아들이고 따라하는 추세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쪽으로 너무 치우쳐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CCM, 복음송이 찬송가보다 더 많이 불리고 있다. 어떤 교회는 예배 시작부터 마치는 시간까지 찬송가 한 번 펼쳐보지 않고 줄곧 CCM을 부르기도 하였다. 예배 시작부터 끝까지 우리 손에 들고 다니는 찬송가도 성경도 무색할 정도로 화면이 할 일을 다 하고, 또 찬송가 속에 든 찬송을 부르지 않는다.

손에 들고 간 성경 찬송은 무엇일까. 그저 손에 들고 교회 갔다가 한 번 펼쳐보지도 않고 그대로 가지고 또 나오는 하나의 액세서리로 변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성경 찬송을 한 번도 펼쳐보지 않고 들고 다시 나가는 성도들이 대부분이고, 아예 성경 찬송 없이 예배에 달랑 참석하는 사람들을 양산해 내고 있다. 아주 친절한 화면 덕분이고, 찬송가를 부르지 않는 것 때문이다.

가끔 교회들을 방문할 일이 생길 때가 있는데, 내가 느낀 뚜렷한 현상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점점 찬송가를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편 찬송만 부르는 교회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교회에서는 그동안 찬송가를 불러왔다. 그런데 어떤 교회는 변해야 한다고, 새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아예 찬송가를 부르지 않는다.

좋은 것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것을 도입하는 것은 긍정적인 일이다. 하지만 무조건 옛 것은 구습이다 하여 수용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작년 여름이었던가. 우연히 시골에 갔다가 이웃한 마을 교회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시골 교회치고는 건물이 아주 깨끗했는데 새로 지은 교회였지만 역사가 오래되었다고 했다.

예배에 좀 일찍 참석했던 나는 찬양단이 인도하는 찬양을 화면에 띄워주는 가사에 맞춰 함께 불렀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찬송가는 부르지 않았다. 예배를 시작하고, 또 마칠 때까지도 마찬가지였다. 전체가 다 복음송, CCM으로 일관했다. 교회엔 연세가 많으신 어르신들이 앞자리에 가득 앉아 있었지만, 새로운 곡조를 따라서 찬송을 부르지 못해 입만 벙긋하거나 아예 입을 다물고 앉아만 있었다.

새로운 물결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어르신들의 모습이었다. 이분들이 틀림없이 교회 역사와 함께해 온 분들일 테고, 신앙고백이 담긴 체험 많은 찬송이 많을 텐데, 그 찬송들을 마음껏 부르지 못하는 아쉬움이 얼마나 많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초등 2학년 때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처음엔 우리 마을에 교회가 없어 면소재지에 있는 교회에까지 걸어 다녀야 했다.

저녁에 교회라도 가는 날이면 울창한 숲길을 걸어 공동묘지가 있는 재를 넘어 한참 걸어가야 했는데, 두려움과 공포심을 떨쳐 내기 위해 주일학교에서 암송한 찬송가를 목청껏 부르며 오고갔던 기억이 새롭다. 그 시절엔 사람들이 재를 넘다가 귀신을 만났다는 이야기, 여시를 만났다는 이야기 등 온갖 이야기들이 무성했던 시절이었고, 재를 넘어갈 때면 낮에라도 혼자 지날 땐 무서워하던 그런 곳이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잘 아는 찬송 가운데 나의 찬송이 된 것이 또 얼마나 많은가. 나의 신앙고백이 담긴 찬송가를 부르면 더 은혜가 되고 그 시련의 한가운데를 통과할 때 함께하셨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면서 더 은혜를 받곤 한다. 긴 세월 속에서 고난과 환난을 이기고 유혹을 이기고 살아온 어르신들은 나름대로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고백이 담긴 찬송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알지 못하는 복음송만 따라 부르려고 하니 되지 않아 우두커니 앉아 있는 모습들을 볼 때 내 마음도 절로 답답했다. 잠시 낮 예배에 참석한 나 자신도 그 잠시 동안 전혀 모르는 CCM으로만 도배를 하고 있는 찬양 시간에, 마치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 못하는 가슴 답답한 그런 심정이었는데, 이분들은 얼마나 더 그럴까, 마음이 답답해졌다.

예배를 마친 뒤 교회 식당에서 성도들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 참석했던 나는 점심을 다 먹고 커피를 마시면서 목사님한테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고 물어 보았다. 특별히 찬송가를 부르지 않고 복음송만 부르는 이유가 있는지, 연세가 많으신 분들이 아주 많던데 그분들은 오랜 세월 동안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자신의 신앙고백이 담긴 찬송이 참 많을 텐데 괜찮은지 물었다.

목사님은 열정이 가득한 음성으로 나름대로의 이유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목사님 나름대로의 이유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내 마음 한구석은 답답했다. 따라 부를 수 없는 CCM을 쳐다보기만 하고 있는 어르신들의 모습, 입만 움직이는 시늉만 하고 있던 노인들의 모습이 계속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 마음 역시 하나님 앞에 찬양다운 찬양을 부르지 못해 아쉽고 답답했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에도 모 교회에 집회가 있어 참석한 적이 있는데, 역시 복음송 위주로 예배 찬양을 인도했고, 주보에 찬송가 순서가 들어 있었지만 그것마저도 나중에는 복음송으로 바꾸어서 불렀다. 찬송가 안에 든 찬송을 단 한 번도 부르지 않아 역시 아쉬운 마음이었다. 설교할 성경 본문을 찾는 시간에도 역시 영상 화면이 알아서 다 띄워 주었고, 사람들의 성경 찾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광고도 영상이 대체했다.

그 교회 역시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 많은 교회였다. 복음송을 잘 따라 부르지 못하는 분들이었다. 나도 찬송가를 좀 펼치고 싶었다. 찬송을 부르자고, 제발 찬송가를 좀 부르자고 소리치고 싶을 지경이었다. 나는 교회를 나서며 생각했다. 오늘날의 시대에는 성경책도 찬송가도 유물이 되었나 보다. 마스코트요 액세서리가 되었나 보다. 나는 크게 소리치고 싶었다. 성경 좀 찾읍시다. 제발 찬송가 좀 부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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