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교회를 논할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진실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지상의 어떤 교회도 완전한 교회가 될 수 없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교회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평판을 얻고 있는 교회라도 교회됨으로부터 먼 교회, 거짓 교회가 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진실 중 하나라도 외면하면 교회에 대한 논의는 위험에 빠지게 되고, 어리석고 피상적인 수준을 넘지 못하게 된다. 교회에 대한 논의가 교회를 살리고 회복시키는 건강한 논의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교회에 대한 이 두 가지 진실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그래야만 교회의 연약함에 대한 인내와 관용의 정신을 잃지 않을 수 있고, 교회의 외형이나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활동으로 교회를 판단하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다.

교회의 존재적 당위와 현실 사이의 간극

지상의 어떤 교회도 결코 완전할 수 없다는 사실은 숨길 수 없는 교회의 진실이다. 교회는 본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즉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증언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제대로 증언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존재 양식 속에 하나님나라의 존재 양식이 반영되어 있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의 모든 활동을 보고 하나님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짐작할 수 있도록 교회의 모든 것은 하나님나라의 생활양식을 따라 디자인되어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존재적 당위이다.

그런데 현실 교회는 결코 하나님나라를 온전하게 반영하지 못하는 한계를 갖고 있다. 지상의 교회는 의로워진 죄인들의 공동체일 뿐 아니라 가라지가 섞여 있는 공동체이고, 또 온전함을 바라보며 전진하는 도상(道上)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흠이 없을 수 없고, 언제라도 유혹에 넘어갈 수 있으며, 세상성이 잠입해 들어와 기승을 부릴 수 있다. 심지어 지상의 교회는 하나님나라와 대립하기도 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대적하기도 한다.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증언해야 하는 교회가 하나님나라의 복음에 최대의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교회는 존재의 당위와 현실 사이의 간격에서 누추한 모습으로 방황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가 교회 되기를 위해 어떤 노력을 경주한다 할지라도 교회는 결코 교회 됨에 이를 수 없다. 이것은 영원히 부인할 수 없는, 또 부인해서도 안 되는 교회의 구원사적 현실이요 피할 수 없는 교회의 운명이다. 마치 바닥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처럼 교회는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이 깊은 수렁에서 헤어날 수 없는 구원사적 위치에 놓여 있다는 사실은 절대 변할 수 없다.

때문에 교회는 원하든 원치 않든 이런 교회의 구원사적 현실을 겸손히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존재의 당위와 존재의 현실 사이의 모순과 간극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고백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교회는 교회로 설 수 없다. 왜냐하면 교회의 잠정성(暫定性)과 부정성(否定性)을 인식하지 못하는 교회는 결코 그리스도의 용서와 은총 앞에 엎드리지 않을 것이고, 그리스도의 용서와 은총에 기대지 않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일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 교회는 언제라도 종교적인 영광을 추구하는 집단으로 굴러떨어질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존재 유비

반대로 교회가 존재의 당위와 존재의 현실 사이의 모순과 간극을 정직하게 인식한다면, 교회는 교회의 허물과 수치를 변호하고 포장하기 위한 헛된 노력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교회의 의로움이 아니라 교회의 부정(不貞)함을 고백하고 스스로를 부정(否定)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용서와 은총이 아니면 도무지 설 수 없는 형편없는 공동체요,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지 않고서는 어떤 가능성도 발견할 수 없는 공동체라는 것을 인정하고 겸손히 무릎 꿇게 될 것이다. 교회의 가능성을 꿈꾸며 하나님나라의 자리를 꿰차는 오만함을 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매우 역설적이지만 교회는 자기 긍정이 아니라 자기 부정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교회가 될 수 있다. 자신의 의로움이 아니라 자신의 부정(不貞)함을 고백하고 스스로를 부정(否定)할 수 있을 때 교회는 교회로서 해야 할 책무, 즉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은혜의 승리를 증언할 수 있게 된다. 교회가 교회의 정당성을 증명하고 변호하려 하면 할수록 교회는 더 깊은 모순과 위선의 수렁에 빠지게 될 뿐 교회 됨을 향해서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 매우 역설적이지만 진실로 그렇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는 것은(롬5:20) 비단 그리스도인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진리가 아니다. 그 진리는 교회에게도 해당된다. 의인이 되었지만 의인이 못 됨을 인정하고 고백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그리스도인의 존재의 신비처럼 교회도 그러하다. 교회도 자신의 의로움과 승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부정함을 고백함으로써 주님의 용서와 치유를 경험하게 되고, 하나님의 의와 구원의 어떠함을 드러내는 놀라운 신비에 참여하게 되며, 교회가 되는 축복을 받게 된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통치의 신비, 지혜의 신비가 빚어내는 역설이다. 교회는 바로 이런 하나님의 신비한 통치에 힘입어 자기 존재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나라를 반역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에 걸림돌이 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런 교회의 정직한 자기 인식과 고백을 통해서 그분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간다.

절망 위에 선 희망

이와 같은 교회의 자기 인식은 교회의 절망적 현실에 주저앉지 않고 다시금 새로운 희망을 향해 일어서게 하는 희망의 원천이 된다. 본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희망이란 절망을 넘어선 곳에 존재하는 희망이고, 절망을 보지 못하고는 볼 수 없는 희망이며, 인간의 희망 위에 선 희망이 아니라 인간의 절망 위에 선 희망이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는다는 것도 다른 게 아니다. 현실의 절망에도 절망하지 않고, 그 절망 속에서 하나님이 행하실 새로운 일을 희망하고 기다리는 것이 믿음이다.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오늘의 교회의 절망을 보고 절망하기보다는 그 절망 속에서 내일의 희망을 보고, 그 희망을 향해 일어설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오늘의 교회의 절망 속에서 절망밖에 보지 못한다면, 그래서 교회를 내치고 비난하고 등진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 하기 어렵다. 교회의 사람이라 하기 어렵다.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람은 교회의 추악함과 부정함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희망을 보고, 그 희망을 향해 일어설 뿐만 아니라 그 희망을 위해 오늘의 절망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이다.

결국 그리스도인은 교회에 흠이 있다고 하여 쉽게 거짓 교회라고 단죄하거나 내쳐서도 안 되고, 반대로 교회는 흠이 있을 수밖에 없으니 어지간하면 사랑으로 덮고 교회의 권위에 순복하자고 해서도 안 된다. 완전한 교회란 존재할 수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교회의 오류와 왜곡을 정당화해서도 안 되고, 교회에 흠이 있다는 이유를 내세워 교회를 부정해서도 안 된다.

참된 그리스도의 사람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허물을 날카롭게 인식하면서도 동시에 교회의 허물을 끌어안고 하나님의 희망을 향해 일어서는 오직 하나의 길을 가야 한다. 비록 이 길이 쉽지 않아 보이고, 공허하기 이를 데 없어 보이지만 교회는 오직 이 좁은 길을 통해서만 내일의 희망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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