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이 공식화할 때에 발생하는 문제가 무엇인가? 그것은 마치 특정한 공식에 의해서 주문을 외우거나, 심지어는 마치 여러 개의 버튼 가운데 전선과 연결되어 있는 버튼만 찾아서 누르기만 하면 내가 원하는 결과물이 도출된다는 사상이다. 그런데 문제는 매뉴얼대로 시키는 대로 다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원하는 결과가 산출되지 않을 때 바로 그때 문제가 발생한다.

현 시대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왜 신앙생활을 하다가 쉽게 낙담하거나, 혹은 교회를 떠나고 있는가? 이에 대한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와 같은 신앙관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신앙을 마치 공식화하려는 경향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한동안은 나름대로 열정을 다해 40일 작정 새벽 기도회도 참여해 보고, 때로는 20일 작정 금식 기도에도 돌입해 보지만, 정작 원하는 결과가 성취되지 않을 경우 적지 않은 이들이 믿음에 대한 회의에 빠지게 되거나, 심각한 경우에는 교회를 떠나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약점은 무엇이었을까? 다시 말해서 왜 이와 같은 신앙관을 수정해 주지 못했는가?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서 몇 가지만 지적해 본다면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이다.

1. 실용주의

우선적으로는 기독교 역시도 '실용주의' 곧 '결과 중심주의'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결과가 성취되려면 반드시 따라와야 할 것이 '매뉴얼'이다. 나름대로의 공식이 있어야 결과가 산출될 수 있다. 또한 매뉴얼대로 해야 나름대로의 규율과 질서가 유지된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공식화'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신앙의 긴장성'을 놓치게 만드는 실수를 범한다. 즉 신앙은 공식이 아니다. 다시 말해 공식화는 사람이 인위적으로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다는 인본주의를 조장할 수 있다. 마치 하나님 없이도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아무리 인간적으로 모든 조건을 다 갖추었다고 해도 그것을 되게 하거나, 안 되게 하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말씀해 주고 있다. 즉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실용주의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실용주의에서는 결과가 성취되지 않은 것은 언제나 인간 노력의 부재로 결론짓는다. 바로 이와 같은 사상이 기독교 안에도 들어온 것이다.

이와 같은 사상에 목회자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아 왔다. 그리고 동시에 성도들 역시도 이와 같은 사상에 자신도 모르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2. 의도적인 성장주의

실용주의와 아울러서 늘 따라다니는 것이 의도적인 성장주의다. 이 둘은 뗄레야 뗄 수가 없다. 이유는 실용주의가 곧 성장(결과) 중심적이기 때문이다. 의도적인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공식을 빼 버릴 수가 없다. 어떤 교회 성장학자는 이와 같은 말을 했다.

"교회 성장은 하나님의 뜻이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단순히 교회 성장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인 교회 성장'을 외친다는 것이 문제다. 당연히 교회는 성장해야 한다. 그런데 그 방법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아니 방법이라기보다는 성경적인 원리에 의해서 교회는 성장해야 한다.

그런데 현 시대의 교회는 성경적인 원리로 성장하려기보다는 인위적이고, 의도적인 성장주의로 나아가려 한다. 그래서 날짜와 시간을 정하고 나름대로의 목표를 잡는다. 여기까지는 좋다. 문제는 '무엇을 위해서인가?'이다. 대부분의 교회가 '총동원 주일 1000명 초청', 아니면 '몇 년 안에 몇 명의 선교사 파송' 등과 같은 것이 목적이 된다.

한마디로 의도적인 성장주의로 기울어져 가고 있다. 영혼 구원, 선교사 파송은 교회의 사명으로 당연한 것이지만, 문제는 그 당연한 사명을 의도적 성장주의로 이용한다는 것이 문제다. 만일 이것이 달성되지 않으면 교회는 성도들로 하여금 회개를 촉구하거나 진짜로 죄인 취급을 한다.

3. 성경적 세계관 교육의 부재

따라서 현시대 한국교회는 무엇보다도 신앙을 공식화하려는 이와 같은 태도와 사상을 성경적인 안목에서 재해석해 주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성경적인 세계관의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여기서 성경적 세계관을 다 다룰 수는 없고, 간단히 성경적 세계관으로 신앙을 재해석한다는 것을 설명한다면,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예배'라는 것이고, 나아가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하나님나라'를 이 땅 가운데 세우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나라를 세운다는 것은 교회 건물을 많이 세우자는 이야기만이 아니다.

신구약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나라'란 온 세계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주권'이 설 수 있도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성경적 세계관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요, 신앙이다.

필자는 한국교회에 시급한 과제가 있다면 먼저는 성경적인 세계관을 통한 성경의 재해석이 필요하며, 나아가 이원론적인 신앙관을 벗어 버리고, 이 세상을 '하나님나라'라는 신구약 성경의 중심 주제로부터 다시금 일원론적인 교회론을 정립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작금의 한국교회는 커다란 예배당을 건축하는 일에 급급해 할 때가 아니라, 현재 예배당 안에 모여 있는 성도들의 삶의 변화를 유도해야 함과 동시에, 그들이 이 땅 가운데서 감당해야 하는 개개인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제시해 줄 필요성이 있다.

결국 이것은 한국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목회자들의 사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목회자들이 변해야 교회가 산다. 문제는 목회자다.

간혹 우리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마치 믿음을 공식화할 수 있는 것처럼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내용의 설교나 조언 등을 듣곤 한다. "이렇게 이렇게만 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을 수 없다"는 식으로 말이다. 마치 무슨 기도 응답에 대한 '매뉴얼'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기도할 때에 응답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은 사실이다. 가령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를 통하여 우리들에게 기도가 응답되는 원리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다. 이에 대한 가장 모범적인 기도로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셨다. 그리고 나아가 마태복음 6장 33절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즉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면 우리들이 구하지 아니한 모든 것들까지도 응답해 주시겠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때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을 마치 수학에서의 공식처럼 '공식화'하려 할 때에 문제가 발생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과 인격적인 관계를 원하시는 분이시지, 마치 쌍방 간에 기계적인 관계를 원치 않으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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