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는 슬프게도 거꾸로 가는 시대에 살고 있는 느낌이다. 도로에서 자동차만 역주행하여 대형 사고가 나는 것이 아니다. 우선은 국민이 주인이 되는 자유민주주의가 후퇴하여 역주행으로 달리고 있고, 그 뒤를 따라 복지 정책이 역주행하고, 그리고 언론 개혁도 마찬가지이다. 뿐만 아니라 때로는 마땅히 지켜야 할 법치도, 도덕도, 상식마저도 함께 역주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더욱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교회들까지도 허탄한 세속의 논리와 단맛에 빠져 '제자의 길'을 역주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건만, 오늘날의 많은 목사님들은 '십자가를 밟고' 자신들의 끝없는 허욕을 채우기에 급급한 모습이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한국교회 전체 교인의 과반수인 400만 명이나 되는 많은 신자들이 불과 몇 개 안 되는 극소수의 대형 교회에 집중적으로 몰려 있다고 한다. 반면에, 전체 교회 반수 이상이 출석 교인 50명 미만의 미자립 개척 교회로 밝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대형 교회들은 자성은커녕 오히려 "큰 것이 뭐가 잘못이냐, 더 크게 지어서 세력을 키우고 더 큰일을 하겠다"며 경쟁적으로 무한 증식 집짓기 사업에 온몸을 바쳐 헌신하고 있다. 또한 교인들도 성숙한 신자라면 집에서 가까운 지역 교회를 섬기는 것이 우선적인 일이건만, 편리함과 유리함을 찾아 끊임없이 큰 교회로만 몰리고 있다.

교회가 지역 사회와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지역 공동체'가 되는 것이 바람직하나, 그렇게 되지 못하고 유명 목사, 좋은 시설, 인맥, 이권, 그리고 취향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브랜드 공동체'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심지어는, 이미 잘 알려진 브랜드를 이용하여 지방이나 해외에까지도 오히려 자신들의 이름을 따른 지교회 확장마저 시도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교인들은 아직도 단순히 '크다'는 그 자체가 왜 잘못이 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물론 대형 교회의 주장대로, 큰 교회가 더욱 우월한 여건에서 더 큰일을 많이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거의 모든 대형 교회들이 이웃 교인들을 일방적으로 흡수하기만 할 뿐, 이를 방지할 구체적이고도 적극적인 보완 조치는 제대로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지역에 대형 슈퍼마켓이 하나 들어오면 대략 500개의 작은 가게들이 문을 닫고, 대형 교회가 한 개 생기면 약 300개의 작은 교회들이 문을 닫는다고 한다. 아마 매년 3,000개의 교회가 문을 닫고 있다는 일부 보도는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즉 대형 교회는 중소형 교회를 잡아먹는 육식 공룡이 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외에도 교회가 너무 커져서 생기는 다른 부작용들도 매우 심각하다. 중요한 사실은 커져서 얻는 장점보다는 크기 때문에 생기는 단점이 더욱 치명적이라는 점이다. 이런 메가처치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분들이 많이 지적을 해 주셨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더 이상의 구체적인 내용은 생략하고자 한다. 

하여튼 이런 극단적인 교회 양극화는 많은 심각한 문제들을 야기하여 결국 한국교회의 건강한 성장을 막을 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통렬한 지탄을 받게 만드는 부작용만을 양산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최근의 통계 결과가 이를 잘 뒷바침해 주고 있다. 즉, 이렇게 대형 교회는 더욱 커지고 늘어나는데도 한국의 기독교인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로빈슨 교수가 지적한 바에 의하면, 미국 역시 해마다 거의 200만 명씩 기독교인이 급격히 줄어 가고 있다고 한다.

이런 원인은 교회의 대형화가 교인의 참된 '제자화'에 힘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편리주의와 이권에 눈이 먼 '세속화'를 가속시켰고, 그 결과로 실망한 많은 교인들을 떠나게 하거나 전도의 문을 크게 좁히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작은 교회 울리는 개교회주의

만일 누구라도, 이웃 교회는 죽든 말든 자신의 교회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는 참된 주의 제자가 아니라고 단언해도 좋을 것이다. 이단과 사이비를 제외한, 지상의 모든 교회들은 주님 안에서 하나의 지체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웃 교회의 아픔을 함께 느끼지 못하는 교회가 있다면, 그 교회는 분명코 욕심으로 병든 잘못된 교회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문제는 단순한 밥그릇 싸움이 아니다. 구조적인 불리함에서 나오는 불공정한 경쟁이 그 문제의 핵심이다. 대형 교회와 작은 교회가 그냥 자유롭게 경쟁하도록 방임하라는 것은, 마치 경제 및 기술력에서 초강대국인 미국이 제3세계의 허약한 국가들에게 서로 모든 시장을 활짝 열고 자유롭게 경쟁하자는 논리와 마찬가지로 정의롭지 못한 일이다.

이는 대학생과 초등학생에게 서로 정정당당하게 한번 겨루어 보라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아니면 대형 교회는 크니까 더 중요하고, 작은 교회는 작으니까 덜 중요한 교회인가. 그러면 심장이나 눈도 허벅지보다 작으니 덜 중요하단 말인가. 우리는 모든 교회들이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서로 세워 주어야 할 한 지체임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오늘날 대형 교회의 성장 이면에는 중소형 교회로부터의 교인 수평 이동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을 누구나 다 인정한다. 그렇다고 그런 교인들을 흡수한 대형 교회에 그 모든 책임이 다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꼭 따지고 싶은 것은 대형 교회가 이들을 흡수한 그 이후의 태도 때문이다. 

필자가 크게 주목하고 우려하는 것은, 마치 모든 것을 빨아들이기만 하는 무서운 블랙홀처럼 한번 흡수하면 절대로 흩어지지 않으려는 그들의 습성 때문인 것이다. 새 신자들이나 초신자들이 대형 교회로 오는 것은 막을 이유가 없다고 본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들을 잘 가르쳐 성숙하고 독립적인 신앙 인격을 갖춘 제자로 훈련한 후에도, 여전히 이들을 품고 놓아 주지를 않는다는 것에 있다. 이제 어느 정도 성인이 되었으면 나가서 일을 해야 하지 않는가.

끝도 없이 몸집만 키우는 행위는 스스로 회복될 수 없는 비만증 환자가 되어 자신도 해치고, 남에게도 피해를 주겠다는 무책임한 처신이다. 또한 스스로 공룡이 되어 이웃을 포식하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훈련된 제자들을 파송하라

그동안 제자 훈련의 선도적 모범을 보인 사랑의교회가 참된 제자의 길을 계속해서 걷기 원한다면, 이런 기형적인 비만증을 막기 위하여 이제라도 뼈를 깎는 노력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노력은 기존의 방법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가장 시급히 해야 할 일은 그동안 꾸준히 해 오고 있던 물적 지원보다는 직접적인 인적 지원을 통해 작은 교회들을 동역자로 섬기는 일이라 생각한다.

만일 이런 사랑의 섬김을 진지하게 실천할 수 있다면, 사랑의교회뿐만이 아니라 다른 대형 교회들도 더 이상 작은 교회들을 잡아먹는 포식자가 아니라, 작은 교회를 도와주고 세워 주는 동역자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아울러 모두에게 존중받고 사랑을 받는 아름다운 교회로 칭송을 받게 될 것이다.

물론 대형 교회가 과거처럼 물질적인 후원을 통해 작은 교회들을 도와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소극적인 처방이 될 수밖에 없다. 가장 효과적이며 강력한 도움은 잘 훈련받고 준비된 제자들을 몇 가정 단위로 팀을 만들어, 마치 자비량 선교사처럼 가까운 지역의 작은 교회들에게 영구적으로 파송하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우선 지역에 따라 10~20 가정 정도가 한 팀을 이루면 좋겠다고 생각하나, 이에 대한 세부적인 결정은 실제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하게 조정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여튼 눈가림으로 할 것이 아니라, 자원자들을 철저히 훈련시킨 후에, 적어도 20~30% 정도는 몸집을 줄일 각오를 하고 적극적인 자세로 인적 지원을 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할 경우에, 최소한 두가지의 장점이 있다. 우선 작은 교회로서는 일꾼이 충원되니 당연히 큰 힘이 될 것이고, 사랑의교회 입장에서도 만성적인 예배당의 협소함을 해소하고 지속적으로 제자를 키우는 도전적인 사역에 충실할 수 있으니 서로에게 득이 되는 좋은 동역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평신도를 소외시킨 신축 추진

사랑의교회는 1,174억 원에 매입한 서초동 대법원 근처 부지에 900억 원의 건축비를 들여 12층 규모의 '사랑방 글로벌 미니스트리 센터'라는 거창한 이름의 건물을 짓고, 건물 지하에 6,000명이 동시에 들어갈 수 있는 초대형 예배당을 조성할 계획이라고 한다. 건물 조감도를 보니 아마 베르사이유 궁전도 크게 부럽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은 냉소적이고 싸늘하기만 하다. 초호화 성남 시청 사건으로 비애감을 느꼈던 많은 사람들은 이제는 교회마저도 아방궁 대열에 합세하였다며 분노를 터트리고 있는 것이다.

출석 교인 4만 명이 넘는다는 사랑의교회는 지금도 충분히 큰 대형 교회이다. 그런데 이제는 이를 넘어서, '초대형 교회'가 되겠다고 공언하고 질주하고 있다. 2,000억 원이면 지방에 2,000개의 교회도 세울 수 있는 큰 돈이다. 더군다나 그동안 예배당 신축 추진 과정에서 보여 준 사랑의교회 지도부의 모습은 한마디로 실망 그 자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우선 '평신도를 깨운다'는 교회답지 못하게, 시작부터 평신도가 제대로 참여한 의사 수렴 절차가 무시되었다. "예배당 신축안은 2년간 치열한 고민 끝에 나온 결과입니다"라고 최근 기자 간담회에서 밝혔다는데, 그래서 그 긴 기간 동안에 그 흔한 공청회나 토론회 한번 없었냐고 묻고 싶다. 

'치열한 고민'을 했다는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공청회를 열어 다양한 의견을 나누고 지혜를 모으는 것이 나쁜 일인가. 무엇이 그리 두려웠을까. 한마디로 말해서, 일반 교인들의 의견을 먼저 묻지 않는 이러한 태도는 오만한 행동이다.

또한 사랑의교회 당회는 공동의회의 승인도 없이, 이미 600억 원의 대출을 받아 1,174억 원 상당의 신축 부지를 임의로 구입했다. 처음부터 그렇게 '초법적으로' 덜컥 땅을 사 놓고 한다는 말이, "그 땅을 우리가 안 샀으면 통일교가 샀을 것이다"라는 구차한 변명이었다. 아니 통일교가 사든 강남 복부인이 사든, 새삼스럽게 그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런 유치한 말을 하시는가.

그리고 일은 이미 다 저질러 놓고 추인해도 좋다는 교회법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마치 불법적인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뒤에 추인하라는 식과 무엇이 다른가. 사랑의교회 담임목사와 당회는 교회법 위에 존재하는 중세 가톨릭 교황이라도 되는가. 추인 결과에 관계없이 앞으로 이 문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아울러 건축 헌금 작정 시, 오정현 목사님께서 하신 헌금 독려 발언은 마치 사탕발림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어려워도 1세기의 초라한 어부들보다 잘 산다. 베드로를 비롯한 어부들은 끼니를 잇기 힘든 상황이었다. 어부들처럼 십자가의 사건을 받아들이면 하나님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소명자로 만들어 준다."

그렇다면 묻고 싶다. 요즘 귀족 목사들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받아들인 1세기 어부들처럼 그렇게 잘 헌신한 소명자가 되셨기에, 수억 원대의 고급 승용차를 타시고 억대의 연봉으로 호의호식하시고 있는가. 그렇게 사는 것이 소명이고 헌신이라 생각한다면, 목사직을 오늘이라도 사임을 하시고 차라리 '전경련'에 가입하시는 것이 좋을 것이다. 

게다가 전임자이신 옥한흠 목사님께서는 더욱 큰 실망감을 안겨 주셨다. "교회를 크게 키운 과거는 후회한다, 그러나 미래에는 더 크게 키워야 한다." 자신도 이해하시기 힘든 이런 모순된 발언은 분명히 한국 교회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되어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미래에는 교회를 더 크게 키워야 한다'는 이 발언은, 오정현 목사께서 최근에 "교회 확장은 이웃 교회의 신도들을 '흡수'하자는 게 아니라 포화 상태인 우리 교회 신도들을 '수용'하자는 차원이지요. 그런데 마치 강남의 대형 부자 교회가 문어발식 확장을 하는 것처럼 비치는 게 가슴 아팠습니다"라고 하신 발언과 서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크게 키우려면 확장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또한 '예배당 건축이 아니라면, 그렇게 많은 돈이 작정되지 않았으리라'는 발언도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그동안 그렇게도 강조하고 제시한 제자 훈련의 결과가 이 정도인가 싶어서 허탈감마저 느끼게 된다. 제자 훈련이 허상이었다고 고백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뒤를 이어 백기사 발언이 터져 나왔다. 다른 교회도 아니고 제자 훈련의 원조격인 사랑의교회에서, 담임목사가 '반대 의견을 소신껏 밝힌' 자신의 교인을 향해 공개적으로 집단 공격을 명령하다니. 이런 것이 과연 제자들이 할 행동인가.

그러더니 최근에는 드디어 절차상 위법임을 알았는지 뒤늦게 허둥지둥 공동의회를 열어, 거의 95%의 '압도적인 지지'로 추인을 받았다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런데 과연 2,100억 예배당이 참된 제자의 길에 꼭 필요한 것일까. 그동안의 신축 추진 과정을 지켜본 필자의 눈에는, 오히려 옥한흠 목사께서 과거에 그토록 경계하시던 '삼허'의 길에 제대로 들어선 확신마저 든다. 

하여튼 이러니 어떤 분의 비웃음처럼, '좁은 문을 부수고, 좁은 길도 불도저로 넓혔으니' 누가 막을 수 있겠나? 이제는 정말 그리로만은 절대로 가지 말라고 붙잡고 싶은, '넓은 길'만이 남아 있는 느낌이다.

예배당과 공산당

더욱 유감스러운 일은 공동의회의 압도적 지지율에 대한 교회 측의 자랑스러운 언급 때문이다. 필자는 아직까지 한국의 대형 교회 공동의회에서 어떤 중요한 사안이 부결된 적이 한 번이라도 제대로 있었는지 거꾸로 물어보고 싶다. 조금 더 솔직해지라는 것이다.

본인의 기억으로는 무슨 안건이든 거의 다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되는 것이 관례이고, 만일 통과가 안 되면 그것은 홍해를 갈라 놓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나 마찬가지로 희귀한 일이라는 것이다. 영적 통찰력이 뛰어나신 귀족 목사님들께서 공동의회를 소집하여 스스로 질 게임을 하실 리가 있겠는가.

그리고 그대들은 여러 대형 교회의 추잡한 세습이 공동의회에서 거의 만장일치의 찬성을 받았다는 것을 잊었는가. 그러므로 그대들의 논리대로 하면 교회 세습도 매우 은혜로운 일이란 말인가. "인류의 역사에 가장 부패한 집단이 종교 집단이다"라는 말이 괜히 나오겠는가. 다수결이란 무시해서도 안 되겠지만, 너무 믿어도 안 된다는 이야기이다.

요즘 예배당 정치는 공산당하고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누가 가슴이 후련하게 한번 설명 좀 해 주시기를 바란다. 오정현 목사님께서 자신은 "여당도 아니고 야당도 아니고, 예배당이다"라는 아주 멋진 말을 하셨다던데, 요즘 여러 대형 교회들의 유치한 정치 행태를 바라보노라면 '예배당'과 '공산당'을 자주 착각하시는 분들이 제법 많은 것 같기 때문이다.

하여튼 그대들은 담임목사의 의도적인 설교에 따라 갈대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이, 오늘날 '예배당 건축'에 목을 매고 있는 한국교회의 영적 수준이라는 말을 처음 듣는가. 갈대밭을 한번 가 보라. 홀로 반대 방향으로 기울어진 갈대를 하나라도 찾을 수 있는지. 그저 그때그때 바람따라 모두 만장일치로 기울어져 있는 것을 볼 것이다. 아마 지구상에서 만장일치를 가장 자랑하는 집단이 있다면, 바로 예배당과 공산당일 것이다.

제자가 되어 '삼허'를 버리기로 하고 광야로 나왔으면. 선지자를 만나야지 갈대나 바라보고 있어서야 되겠는가. 우리 모두가 진심으로 아끼는 '사랑의교회'라도 좀 달라야 한다. 정말 제자들마저도 이렇게 헛된 숫자를 들고 만족하며, 외식적인 겉치레로 얼버무려야 하겠는가. 이러니 "한국에 정상적인 교회가 어디 있나" 하는 말이 터져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제자의 길을 가자

그동안 사랑의교회 측에서 앞세운 가장 큰 명분은 '장소가 협소해서, 더 이상 참기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런 점은 거의 모두가 충분히 인정하고 공감하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궁금한 점은 '2,100억이나 퍼붓는 예배당 신축' 외에 다른 가능한 대안이 전혀 없었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자문해 보시기를 바란다.

"좁아 터져, 못 견디겠다"면서, 평소에는 그렇게 똑똑하시던 분들이 왜 훈련된 제자들을 지역 교회로 돌려 보낼 생각은 안 하냐는 것이다. 아니 '못 했는지' 또는 의도적으로 '안 했는지'를 묻고 싶은 것이다. 2,100억을 쓰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다이어트만은 싫다는 말인가.

이렇게 말하면, "현실적이지 못한 제안이다! 그러면 교인 중에 누가 자원해서, 정든 교회를 떠나 문제가 많은 지역 교회로 돌아가려고 하겠는냐!"라면서 또 구차한 변명을 늘어 놓을 인사들이 눈에 선하다. 그래서 미리 밝혀 두고자 한다.

만일 그대들 중에서 "지역 교회로 돌아가 스스로 작은 교회를 섬기겠다"는 헌신된 자원자가 충분히 나서지 않는다면, 지난 30년간의 제자 훈련은 '허수, 허상, 그리고 허세' 그 자체였다는 완벽한 방증이 될 것이란 사실이다. 그러니 자원자가 없을 것이라는 허망한 핑계만은 절대로 하지 마시기를 바란다. 오히려 필자는 사랑의교회가 갖고 있는 뿌리 깊은 저력을 고려해 볼 때, 자원자가 넘칠 것으로 굳게 믿고 있다.

이제라도 마음을 비우고, 4만이 넘는 교인들 중에서 자원자를 받아서 우선 단 400명의 제자만이라도 실험적으로 지역 교회에 과감히 파송을 해 보시기 바란다. 그리고 그 지역 교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한번 직접 확인해 보시라. 평소 때 들려주시던 그 감동적인 설교들을 종합해 볼 때, 특별히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이웃 사랑'이야말로 제자 훈련의 정수가 아니겠는가.

여러 기독교 사이트의 후원을 위해 정성껏 올려진, "더 힘껏 섬기겠다"는 사랑의교회 배너를 늘 관심을 가지고 보고 있다. 그런데 말로만 하는 겉치장이 되지 않토록,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오랜 훈련을 받은 제자다운 모습을 한번 제대로 보여 주시기 바란다. 이번이야말로 대형 교회들이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오명을 벗고 뭔가 보여 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닌가.
 
아울러 사랑의교회는 어느 개인의 것이 아니고, 앞으로도 한국교회의 좋은 모델로 함께 가꾸어야 할 소중한 자산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인식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어느 분이라도 "남의 교회 일에 간섭하지 말라"거나, "왜 우리만 물고 늘어지냐"는 등 백기사 방식의 막말만은 삼가해 주시기를 정중히 부탁드린다. 

사랑의교회가 과거에 아름답고 귀한 일들을 많이 해 온 사실은 구태여 긴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잘 알 것이다. 그러나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과거의 공로가 오늘의 잘못을 무효화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잘 하다가 중도에 옆길로 빠진 슬픈 인생들을 성경에서도 많이 보여 주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건물에 몰두하여 세력을 키우고,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는 교회가 되어 보겠다는 '자랑의 교회'가 되지 말라는 의미이다. 아울러 세계적인 교회가 되려고 하기 전에, 가까운 동네부터 잘 돌보라는 말인 것이다. 또한 '회개할 양심마저 마비된' 다른 귀족 교회들을 교훈 삼아 조심 또 조심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자랑스러운 과거의 추억은 이제 가슴에 묻어 두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잘 하자는 뜻이다.

작은 교회의 동역자가 되자

"나에게 1,000번의 삶이 있다면, 그 삶 모두를 조선에 바치겠다!" 텍사스 출신 25세 처녀 선교사 루비 켄드릭이 부모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다. 당시 열악한 환경 속에서 병마와 싸우던 그녀는 1908년 6월 충수염으로 숨졌다. 이 땅에 온 지 겨우 아홉 달 만이었다.그녀는 자신의 말 그대로, 씨앗을 심듯 이국 땅 양화진에 자신의 삶을 묻어 조선의 복음화를 위하여 한 알의 밀알이 되었다.

모두 413명의 선교사님들과 그 가족들이 안장된 양화진 선교사 묘원에 가 보시기를 바란다. 거기에 가면 베델 선교사님, 헐버트 선교사님, 무어 선교사님, 스크랜턴 선교사님, 베어드 선교사님, 에비슨 선교사님, 아펜젤러 선교사님, 그리고 두 따님과 함께 안장된 하디 선교사님의 묘지를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무명 묘지이다. 말 그대로 묘비명이 없다. 그야말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먼 낯선 땅에 오셔서 우리 민족을 위하여 뼈를 묻으신 존경스러운 분들이다. 이분들 모두가 정말 파란 만장한 삶을 사신 분들이다. 더구나 자신을 바치는 것도 부족해서 온 가족마저 대를 이어 충성하신 분들도 많다. 물론 이분들뿐만 아니라, 한국의 많은 선교사님들도 온 세계 구석구석으로 퍼져 그 땅에 뼈를 묻을 각오로 헌신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선교사만 뼈를 묻는 게 아니다'라는 말을 모든 주의 제자들에게 간곡히 당부하고 싶다. 우리가 비록 영광스러운 순교자는 못 될지라도 앞서 가신 훌륭한 선교사님들처럼, 파송된 작은 교회에서 뼈를 묻을 각오로 동역자가 되어 '죽도록 충성'을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 이럴 수 있다면,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 이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찬 일이 아닌가.

'제자의 길'은 흩어지는 길이다

오늘날 작은 교회들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우리가 스스로 '주의 제자'라면서, 여기저기 큰 교회나 기웃거리며 즐겁고 빛나는 일만 찾아 다녀서야 되겠는가. 그리스도의 다른 지체인 이웃 교회들이 주리고 고통을 받고 있는데 그것이 어찌 남의 일이겠는가.

참된 제자라면 달려가서 함께 짐을 나누어야 하지 않겠는지. 더구나 넓은 들판에 추수할 곡식은 무르익어 쓰러져 가고 있는데, 일꾼들이 떼로 몰려서 끝도 없이 집짓기 사업에만 몰두해서야 되겠는가. 큰 건물을 세워 이름을 알리고, 사람을 모아 흩어짐을 기피하려는 생각은 바벨의 정신이다.
 
이 땅의 고통받고 천대받는 여러 미자립 교회들을 생각할 때, 정말 마음이 많이 아프다. 이는 예수님이 천대받으시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또한 그 속에서 분투하시는 젊은 사역자들을 바라보면 눈물이 난다. 왜 이분들만이 저런 무거운 짐을 져야 하나. 대형 교회에 출석하시는 모든 형제 그리고 자매들에게 간곡히 부탁드린다. 그대들 자신이 만일 주의 제자라고 생각한다면, 지금이 바로 흩어져야 할 때이다.

'제자의 길'은 흩어지는 길이다. 그런데 2,100억 원짜리 호화 예배당은 이를 거역하고, 모두 모이라고 유혹한다. 처음에는 편리함으로 유혹하더니, 이제는 허수로 유혹하고, 허상으로 유혹하고, 그리고 허세로 유혹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완벽하게 세속적인 유혹이다. 감히 콘크리트 덩어리가 우상이 되어 제자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주의 제자들이라는 그대들은 분하지 않은가.

스테반 집사의 순교 이후, 정든 예루살렘을 떠나 산산히 흩어졌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소아시아는 물론 멀리 인도에까지 퍼져 새로운 교회들을 세웠다. 하지만 거대한 헤롯 성전에 떼로 몰려 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불과 수년 후 예루살렘을 포위한 로마군에 의해 모조리 몰살을 당해, 그들이 그토록 자랑하던 성전과 함께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우리는 이런 슬픈 역사의 의미와 교훈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어제나 오늘이나 변치 않으시는 주님께서는, 지금도 사랑하는 제자들이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기를 원하신다.

'모이는 일'보다 더욱 힘든 것이 '흩어지는 일'이다. 하지만 주의 제자라면 흩어져야 한다. 지금 대형 교회에 다니시는 모든 주님의 제자들에게 묻고 싶다. 아니 그보다, 스스로 마음을 열고 자신에게 물어보시라, 흩어지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주님과 함께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야 한다. 선교사만 뼈를 묻는 게 아니다.
 
샬롬!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행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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