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희송 실장은 "'큰 교회가 큰 교회가 된 것이 잘못이냐'고 말한다면 대형 마트 경영자만큼의 사회적 고민도 안 하는 것"이라고 했다. ⓒ 뉴스앤조이 유연석
개신교는 지금 '총체적 위기' 국면이다. 이 위기는 구조적이고, 역사적이다. 

첫째 국면은 '목회자 세대교체'다. 주요 중대형 교회들이 지난 10년간 보여 준 세대교체 행태는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광림교회, 금란교회, 충현교회 등을 비롯한 크고 작은 많은 교회들이 자식에게 교회를 물려주었고, 이에 대한 비판이 비등해지자 교회 간 묵계하에 교차 세습이 이루어지는 경우들도 나타나고 있다. 신학교에서도 앞으로 목회 현장 진출을 앞두고 성골, 진골, 육두품 따위의 구별 짓기가 등장하고 있다 한다.

둘째 국면은 '교회의 존재 가치' 문제다. '교회는 누굴 위해 존재하는가?'란 물음이 집요하다. '교회는 담임목사를 위해 존재하는가?'란 질문은 교회 분규 현장 어디서나 결국 나오는 이야기이다. "교회는 기독교인들의 이해관계에만 봉사하는가?"란 질문은 사회적 이슈로 충돌이 생길 때마다 터져 나오는 질문이다. 교회는 사회 잉여적 존재 아니면 유해한 존재로 비난당하고 있다.

여느 대형 교회와 달랐던 행보

사랑의교회는 이 두 가지 국면에서 비교적 행복한 위치였다. 세습과는 상관없는 후임자 선택을 함으로써 주류 대형 교회들의 행보와 돋보이는 대비를 보여 주었고, "모여라, 돈 내라, 집 짓자"는 대형 교회들의 전형적 행보와는 달리 내세울 제자 훈련이란 것이 있었다. 매년 '대각성 전도 집회'를 통해 전도에 집중하는 면모를 보여 주었기에, 전도하고 제자 만드는 교회의 본분에 충실한 교회로 뇌리에 인식되었다.

'교회갱신을위한목회자협의회'가 1996년 3월 7일 옥한흠 목사의 주도하에 출범했다. 교갱협을 필두로 각 교단에 갱신 그룹이 만들어지면서 1998년 연합체인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 단체는 비교적 온건한 개혁 노선을 취하면서 교회 내 이슈들을 다루어 왔고, 교단 총회 등의 개혁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NCC나 한기총을 제외하면 교계 단체로서는 가장 탄탄한 위상을 지니고 있는 곳으로 꼽힐 것이다.

이번의 건축 결정은 개신교 권에서 나름 희망과 기대를 받고 있었던 사랑의교회의 위상이나 역할에 어떤 변화를 일으킬 것인가? 

첫째, 사랑의교회 과거를 정리하게 한다. 사랑의교회는 스스로의 과거를 제대로 정리하지 않았다. 사랑의교회를 수십 년 다니며 제자 훈련을 받고, '사랑의교회는 이런 점에서 다르다'는 남다른 자부심을 가졌던 성도들이 내부적으로 겪는 갈등의 수위는 심각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간 배워 온 것들, 이래야 한다고 알아 왔던 것들이 일순간 부정되거나 극복되어야 할 생각이 되고, 혹은 오해이거나 착각이라는 비판을 받으면서, '그동안 내가 다녀 온 사랑의교회는 어디로 갔는가'를 자괴감을 느끼며 묻고 있다. 그런 맥락 속에서 옥한흠 목사의 건축 지지 발언의 진의에 대한 의혹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다. 후임자에 대한 걸림돌이 되어선 안 된다는 목회적 이유 말고, 옥한흠 목사는 과연 이 결정을 흔쾌히 지지하는 것일까? 

전임자의 사역의 핵심이 소중한 자산으로 남겨지도록 배려하는 것과, 그것을 새로운 사역의 필요에 따라 단지 활용만 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오정현 목사 자신이 새로운 목회 비전과 방향을 제시하고 성도들을 설득해야 마땅하다. 10만 성도를 만드는 것이 목회의 비전이고 이상이면, 그걸 걸고 교회당 건축을 하는 것이 맞다. '제자 훈련'을 여기에 얽어맬 필요는 없는 것이다.  

둘째, 사랑의교회 현재를 다시 자리매김하게 한다. 초대형 건축을 정당화하는 논리에는 '강남에서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정신이 응축되어 있다. 이것은 '강남구민 교회'를 짓는 논리는 될 수 있을지 모르나, 사랑의교회가 건축을 하면서 동원할 논리로서는 자질 미달이다. 

교회 내부적으로는 적절한 절차와 정보의 공개를 통해 성도들에게 적절한 판단 근거를 제공하고 이를 통해 고려해야 할 여러 요소를 잘 해소해 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대외적으로는 초대형 교회 건축이 몰고 올 수 있는 여러 부정적 영향에 대해 적절히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일반 대형 건축에도 환경 영향 평가, 교통 영향 평가 등을 거친다.

인근 지역의 여론도 중요하다. 자기 돈 들여 높이 짓겠다고 해도 고도 제한이 걸린다. 일조권 침해도 고려해야 하고, 주변 경관과 어울리는 것도 문제다. 건축을 둘러싼 이런 모든 사회적 여건과 제약을 단순히 돌파할 장애물로, 극복할 사탄의 시험으로 치부하는 것은 심각한 잘못이다. 더구나 한국 사회 전체가 이견이 있더라도 무조건 밀어붙이고, 나중에 가면 다들 좋아한다는 식의 토건 마인드로 가득한 이 시점에 사랑의교회가 토건 정신의 기독교 버전으로 나서는 것은 좋게 평가받을 수 없다. 

셋째, 사랑의교회가 펼쳐 갈 미래를 전망하는 것이다. 시대정신에 비추어 문제가 예견되는 일을 벌일 때 사람들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이 일을 하는지 궁금해 한다. 큰 교회가 옮겨 오면 인근의 작은 교회들에서 주차와 공간과 교육 환경의 불편을 참던 '강남 구민'들이 많이 옮겨 올 것이란 예상을 하면서도 이를 강행한다면, 대체 어떤 생각과 대안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설마, '뺏기는 놈이 바보다'는 식의 생각을 하는 건 아닐 것 아닌가? 대형 마트(SSM)들의 무한 확장에 최근 지역 슈퍼들이 더 이상 못 참겠다며 전국적으로 들고 일어난 것은 잘 알려진 사건이다. 교회도 장사하는 사람들이 상권을 갖고 논란하듯 이래야 하는가? '큰 교회가 큰 교회가 된 것이 잘못이냐'고 생각한다면, 대형 마트 경영자만큼의 사회적 고민도 안 한다는 말이다. 

▲ 사랑의교회 건축 조감도. 양희송 청어람아카데미 실장은 '사랑의교회가 초대형 건축을 정당화하는 논리에는 "강남에서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정신이 응축되어 있다"고 했다. (자료 출처 사랑의교회)
초대형 건축 정당화 논리, 저급한 시장경제 원리

기업도 요즘은 '기업의 존재 목적은 이윤 창출이다' 따위의 이야기는 낯 뜨거워서 안 한다. 기업도 사회적 책임을 말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운운하는 시대에 교회의 '하나님나라 확장' 논리는 아직도 저급한 시장경제의 가장 하위 버전에 예속되어 있다. 사랑의교회가 이 문제에 대해 갖고 있는 논리는 무엇인가? 

사랑의교회는 여론을 너무 가볍게 본 듯하다. 각 지자체마다 경쟁적으로 대형 청사 짓는 것이 전국 민선 자치단체장들의 최우선 사업이다. 가장 최근 물의를 빚은 성남시는 5,000억 원이 넘는 돈을 들여 청사를 짓고, 수억 원을 들여 행사를 치렀다가 여론의 몰매를 맞았고, 시 재정은 파산 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호화 청사들을 보면서 많은 이들이 '세금으로 처바른 건물'이란 악담을 아끼지 않는다. 교회 건물에 대한 평가는 다를까? 경제 위기 국면이 다 넘어가지도 못한 상황에서 2,100억 원을 예상하는, 그리고 아마도 공사를 진행하면서 더 큰 액수가 들 수도 있는 이런 건축을 시도함으로써 두고두고 이 시기 교회의 행적을 기억할 때 회자될 사례를 하나 제공한 것이다.

최근 여기저기서 나오는 여론조사들이 이구동성으로 개신교에 요구하는 것은 무시 못 할 규모의 예배당이 아니라, 봉사하고 구제하고, 윤리 도덕을 실천하며 살고, 환경이나 인권 등 시민운동을 지원하고, 교육에도 일정한 역할을 하라는 것이다. 사랑의교회 건축은 이런 여망과 부합하는 방향인가, 거스르는 방향인가 물어본다면 대답이 자명하다. 사랑의교회는 이런 부분에 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
 
양희송 / 청어람아카데미 실장

- 이 글은 12월 22일에 열린 '사랑의교회 건축, 어떻게 볼 것인가?' 포럼 발제문을 요약한 것으로, <뉴스앤조이> 제106호 종이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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