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주의가 과도하게 강조되면 그 이후 선택되는 일체의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는
위험이 생긴다. 국가의 위신과 자존심에 상처를 가했다고 여겨지는 상대에 대한 매우
공격적인 행동이 합리화되는 것이다. ⓒ뉴스앤조이 신철민


'애국'이라는 것은 자신이 속한 국가 공동체에 대한 극진한 사랑을 말한다. 따라서 '애국'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는 최상의 가치를 향유하는 지위에 있다. 애국과 대립하는 말은 매국이요, 이는 일신의 영달을 위해 민족과 국가를 팔아 넘기고 배신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친일 청산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매국 매족의 군상들에 대한 면모를 대면할 수 있었다. 누구도 자신이 애국자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하지 그 반대편에 서 있다는 낙인은 피하고 싶어한다. 친일파 명단에 들어가게 되는 것은 개인과 가문의 수치요, 역사의 죄로 남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당시 친일매국한 자들은 그것을 개인과 가문의 수치가 아니라 영광으로 여기고 주구 노릇을 했으니 오늘날 이런 역사의 반전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난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열렸던 동계올림픽의 판정 과정에서 '빗나간 애국주의'라는 현실과 맞닥뜨려야 했다. 모든 애국이 옳은 것은 아니라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자국의 이익을 옹호하고 자국의 영광을 칭송하고 자국의 위신에 집착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가, 강대국 미국이 그런 애국주의의 열광에 빠져 우리에게 피해 입히는 것을 보면서 과연 애국주의의 기준은 무엇인지, 애국이라는 개념은 어떻게 해야 올바로 성립할 수 있는 것인지 사회적 논란의 대상으로 떠오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상대의 애국주의는 이쪽에게 침략주의로 나타날 수 있고, 이쪽의 애국주의가 상대방에게 위협적일 수 있다는 적대 관계의 성립은 애국주의가 인류적 차원의 이상적 가치로 발전하는데 있어서 자기 모순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엇나간 애국주의를 규탄하면서도 우리에게도 그러한 모습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동시에 인식하지 못하면 우리는 미국의 애국주의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들먹거릴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강대국의 애국주의가 사실은 제국주의적 패권을 미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러나 결국 우리 신앙인들이 인류 전체의 공동 복리와 평화를 지향하는 사람들이라면 애국주의의 규정이 바로 되어야 나라를 사랑하는 일이 인류에게 적대감의 씨앗을 뿌리는 일의 시작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강대국의 애국주의는 패권주의

역사적으로 보자면, 지배자와 강대국들이 강조하는 애국주의는 언제나 애국주의로 포장된 침략정책이나 패권주의를 의미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독일 나치스의 히틀러가 독일 국민들을 열광적으로 동원할 수 있었던 것도 독일 애국주의에 대한 강조의 결과였다. 게르만 민족에 대한 히틀러의 사랑과 자부심 그리고 게르만 민족의 역사적 역할에 대한 그의 웅변적 미화는 제1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침체와 낙담에 빠져 있던 독일인들에게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독재자로 폭력을 사용하여 집권한 인물이 아니라, 독일인들의 열화와 같은 지지와 인기 속에서 독일 경제의 부흥과 전쟁 정책을 집행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애국주의의 야만적 면모를 보게 된다.

충직한 나치스 당원들은 애국심에 불타 있었고, 그로써 독일의 번영을 꿈꾸고 유럽을 석권하면서 새로운 제국을 건설할 열망으로 지칠 줄 몰랐다. 그들을 가리켜 누구도 매국노라고 하지 않았으며 열정적 애국자로 추켜세우는데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전범으로 기소된 나치스 당원들이 당당하게 자신의 행위를 변호하고 게르만 민족의 영광을 내세운 것도 이들의 마음속에 심겨진 애국주의의 산물이라는 측면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미국이 9·11 테러 사건 이후 애국주의의 물결 속에서 단결을 강조하고 국가의 힘을 강화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인 것도 미국인들의 애국주의의 관점에서는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공격당한 미국의 현실을 애국심에 호소해서 타개하겠다는 논리는 미국인들에게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었고 그래서 이들의 애국주의는 영웅을 요구했으며 그 과정에서 동계올림픽과 같은 사태의 발생은 쉽게 예견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할리우드 영화의 작품 <람보>는 이러한 미국식 애국주의를 대변해주고 있으며, 그런 인물에 열광하는 미국인들은 모두 미국의 영광과 번영을 간절히 바라는 애국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일까? 다름 아닌 애국주의가 자기 집단의 이기심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이기심은 당사자가 강하면 힘과 연결되어 타자를 언제나 희생시킬 수 있다는 것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애국주의가 과도하게 강조되면 그 이후 선택되는 일체의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는 위험이 생긴다. 국가의 위신과 자존심에 상처를 가했다고 여겨지는 상대에 대한 매우 공격적인 행동이 합리화되는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을 때, 일본군으로 나선 젊은이들은 뜨거운 애국심으로 무장했었다. 그리고 친일파들은 조선 청년들에게도 이러한 '애국심'을 강조하면서 이른바 성전(聖戰)에 나서라고 촉구하고 다녔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애국심과 애국주의적 행동은 타자에게 잔혹한 침략과 생명의 유린으로 나타났으니, 이를 인류 보편의 가치로 승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약자에게 애국주의는 매우 귀중하다. 약자들을 지켜내는 국가의 틀이 무너지면 약자들의 인권은 모두 짓밟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의 애국주의는 정의롭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애국주의가 공격적이기는 어렵고 거의 언제나 방어적이며, 강자들의 욕심과 야망을 반대하는 것으로 구체화되기 때문이다. 친일 세력들과 투쟁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애국주의는 따라서 인류 보편의 원칙으로 승인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애국주의도 만일 타자의 정당한 존엄성을 능멸하는 것으로 변하게 되면 그것은 이미 애국주의가 아니라 집단적 이기심의 발로로 전락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성서는 애국주의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가? 사도 바울은 동족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표현하면서 그 사랑이 넘쳐서 하나님의 사랑에서 그가 끊어지는 한이 있다고 해도 상관없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때 그가 고백한 사랑은, 구원의 길에서 멀어져 헤매고 있는 동족의 현실을 위해서라면 자신은 어찌되어도 좋다는 식의 자기 희생의 변이라고 할 수 있다. 무작정인 애국주의가 아니라, 인간 구원의 차원과 연결되어 있는 성서의 애국관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시대의 무수한 예언자들도 역시 인간과 민족의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자신의 애국심을 고백한다.

하나님의 의 실현할 수 있어야

예수께서 당시 애국운동의 주체 세력이었던 열혈 당원의 노선을 따르지 않은 것은 이들의 폭력 투쟁을 반대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열혈 당원의 애국주의가 이스라엘 민족의 영광을 복원한다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마제국의 지배에 항거하는 것은 받아들이지만, 그래서 결국 이들 열혈 당원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선민적(選民的) 영광을 내세우는데 관심이 몰려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중심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새로워지는 것이 정작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것이지, 이들의 그런 의의 개념이 중심에 있지 못한 채 이스라엘 민족의 영광 자체를 겨냥하는 것은 나치스 독일이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과 영광을 강조하는 일과 다를 바 없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성서의 애국주의란 하나님의 의를 실현할 수 있는 민족으로 자라나도록 애쓰는 마음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바로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평화'를 목적으로 하여 인류 모두가 공평한 존엄성을 존중받도록 하는 열망이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을 때 애국주의는 침략주의로 변질하지 않을 수 있으며, 약자들을 지켜내는 힘이 되고, 민족과 국가의 방향을 인류애를 향한 것으로 만드는 저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애국주의 또한 이러한 성품을 지닌 것으로 성장하고 성숙해질 때, 민족 지상주의나 다른 민족을 깔보는 식의 것이 되지 않는 아름다운 사랑의 결정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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