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믿지 마. 엄마가 구해 줄게."

영화 '마더'는 지능이 떨어져 스스로는 독립해서 살아갈 수 없는 '도준'이와 어떤 상황에서도 도준이를 지켜 내려는 엄마의 이야기이다. 노상 방뇨를 하는 아들에게 다가가 보약을 먹이는 장면, 아들이 유력한 용의자로 낙인 찍힌 상황에서, 살해된 여학생의 장례식에 찾아가 아들을 변호하는 장면, 담당 형사를 끈질기게 괴롭히는 장면 등을 통해 고상하고 수줍음 많은 여자가 자식 때문에 어떻게 돌변할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 준다.

세상에 홀로 설 수 없는 아들에게 엄마는 의사가 되고, 경찰관이 되고, 변호사가 되고, 때로는 살인자가 된다. 도준이가 실제로 살인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유일한 목격자를 살해하기까지 이른 것이다. 결국 다운증후군이 있는 다른 아이(종팔)가 도준이의 죄를 덤터기 쓰게 되고, 그 아이를 붙잡고 울며 뱉은 엄마의 한 마디가 인상적이다.

"너는 엄마 없어?"

삶의 실존을 여과 없이 보여줄 때 느끼는 불편함,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뒤틀린 아름다움,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아니 애써 피해 왔던 진실을 영화는 깊게 파헤쳤다. 감동보다는 씁쓸함이 남는 것은 어쩌면 제작자가 의도한 것인지도 모른다. '마더'라는 이 아름다운 제목 안에 얼마나 추악한 현실이 이중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영화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한국에서 볼 수 있는 어머니의 삶'을 다시 짚어 보고자 한다.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희생, 언제까지 당연하게 여겨야 할까?

최고의 아름다운 사랑을 비유할 때 보통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을 예로 들곤 한다. 자신을 다 줘도 전혀 아깝지 않은 게 부모의 마음이다. 그중 어머니의 사랑은 더욱 각별하다. 산고의 고통으로 난 생명이라 그런가? 자식은 몸의 일부분이다. 자식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조금이라도 불행한 것은 참지 못한다.

'공공의 적'이라는 영화를 보면 자신을 살해하는 아들이 흘린 증거물을 어머니가 죽기 전에 집어삼키는 장면이 있다. 많은 부모들이 이 장면에 공감했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자식을 악인이라고 하여도, 어머니에겐 자기 목숨도 내어 줄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어려운 환경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간증에 '어머니의 역할'은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특히 장애를 가진 사람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한 아름다운 사례를 들어 보면 더욱 그러하다. '어머니'의 사랑에는 다른 어떤 사랑과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아름다움이 있다.

그런데 과연 그 희생을 언제까지 아름답고 당연하게만 여겨야 하는 걸까? 언제까지 경제 규모에 비해 후진적인, 의료, 교육, 주택 복지의 몫을 한국의 어머니가 감당해야만 하는 것일까? 민주주의가 많이 발전하고, 경제가 발전했지만, 복지는 그 발전의 속도에 비해 너무 뒤쳐져 있다. 한국에서 발전과 복지의 긴 간극의 숙제는 언제나 초인적인 힘을 강요당하는 어머니의 몫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어머니처럼 살고 싶지 않은 한국의 딸들은 세계 최저 출산율로 그 마음을 대신하고 있다.

어머니에게 가족은 이타주의와 이기주의의 미묘한 경계선

'어머니'란 존재에게 '자식'의 의미는 이타주의와 이기주의의 미묘한 경계선에 속한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내줄 수 있지만, 더 나아가 자식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이 어찌되던, 사회가 어찌되던 상관이 없는 것이다.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무엇이든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으면서, 가족을 위해 사회가 가질 수 있는 피해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기도 하다. 자식이 자기 입장에서는 절대적인 이타주의적 존재인 동시에, 사회 입장에서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적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사회가 집을 지켜 주지 못하자 주부들이 나서서 땅 투기를 조장하고, 사회가 아이의 교육을 책임지지 못하면 주부들은 사교육 열풍의 중심이 된다. 사회 불안감이 커질수록 어머니들은 악착같이 자기 가족과 자식만은 살아남으려 하고, 그렇게 가족을 위해 보수화, 아니 사익 집단이 되어 간다.

행여 장애를 가진 아이가 태어나기라도 하면, 저주에 가까운 불행이 시작된다. 어딜 가도 외면당하기 쉬운 아이를 끝까지 포기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 역시나 어머니가 등장한다. 가끔 불행한 환경을 극복한 아름다운 감동의 이야기가 뉴스거리가 되지만, 뉴스에서 보이지 않은 대부분의 어머니는 우울증과 비통함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다 영화에서처럼 죽음까지 책임지고 싶은 엇나간 사랑으로 동반 자살을 시도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뉴스를 통해 듣는다.

교회와 사회의 역할

국가가 1차적인 책임을 다하지 못 할 때, 그 빈자리를 감당해야 하는 의무는 교회에 있다. 그런데 대형 교회에서 복지 제도와 정책을 위해 기도회를 갖거나, 사회 불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대적인 힘을 모았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오히려 복지와는 거리가 먼 정부를 지지하거나, '성공'만 주구장창 외치는 교회에서 도움이 절실한 사람이 더욱 소외감을 느끼게 할 뿐이다.

영화 '마더'를 보면 과거에 좋지 않는 기억과 속병을 잊게 하는 엄마만의 침 자리가 나온다. 자식을 위해 살인을 하고, 괴로운 엄마가 침을 맞고 광란의 춤을 추는 모습을 보며, 교회 역시 사회의 불행한 현실을 잊게 하는 침 자리 역할밖에 하지 못하는 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교차되었다.

정치인들에게 우리 시대의 어머니는 가장 큰 유권층 그룹이다. 복지국가를 주장하는 진보 정치인과 사회 운동가들이 우리 시대의 어머니를 설득하지 못하고 사익 집단화한 그룹으로 만든 건 반성하고 고민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사회 운동가들이 우리 시대의 어머니를 설득해 내지 못하면, 개혁의 이론과 실제와의 거리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를 설득할 수 있는 가족 단위의 혜택에 대한 얘기를 좀 더 개발하고, 좀 더 쉬운 언어와 이론을 고민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더 나아가 가족의 여러 문제들이 어머니 한 사람의 책임이 아닌 공동의 책임임을 널리 알려야 할 필요를 느낀다. 어머니 그룹을 개혁의 변방에서, 개혁의 중심으로 옮겨 올 수 있도록 함께 고민했으면 한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