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홍 목사의 2월 3일자 설교비평이 나가자 찬반논쟁이 봇물처럼 쏟아졌습니다. 왜 설교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않고 비판하는가에서부터, 김진홍 목사가 어찌 그렇게 변절할 수 있는가에 이르기까지 김진홍 목사의 설교는 그의 개혁노선과 궤를 같이해왔다고 믿어온 <뉴스앤조이>의 웹사이트 상에서 난타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김진홍 목사 자신에 대한 논평이 아니라, 그의 설교 속에 들어 있는 대미의식과 이것이 과연 성서적 정신에 맞는 것인가에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결론은 여전히 동일합니다. 우리가 이번 부시 대통령의 '악의 발언'에 전율했던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무서운 의지를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생명의 복음을 선포하는 설교 말씀은 당연히 생명의 승리를 외쳐야 하는데, 그의 설교는 도리어 부시 대통령의 발언을 이해하자는 설득과 함께 미국에 줄서야 우리가 산다는 식의 결론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잘못된 처방과 대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쟁을 주도하는 미국에 줄서라는 것은, 그 전쟁에 우리가 휘말려 들어가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이 되고 맙니다. 이것은 결코 목사가 할 말이 아닙니다.  

그의 <미국, 북한, 남한>이라는 제목의 설교는 따라서 그 어떤 변호와 해명이 있다해도, 오늘날 우리 민족이 처해 있는 생존의 위기에 대응하는 바른 길을 제시하지 못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생명의 안전이며, 전쟁을 획책하려는 대국의 의사에 우리가 좌우되어도 좋다는 것은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  

이번 동계 올림픽의 과정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고 말았지만, 미국은 자신의 국가적 이해와 패권적 야망을 위해서는 약소민족과 약소국가의 위신과 자존, 그리고 이익을 가볍게 짓눌러 버립니다. 그런 미국은 자유민주진영이라고 하면서 그 앞에 줄서는 것이 우리가 살길이라고 설파하는 것은 김동성 선수 오심 이후 더더욱 희극이 되지 않을 수 없는 논리입니다. 사태가 달라졌다고 할지 모르겠으나, 본래 미국의 내심은 이런 것이었는데 김진홍 목사가 이를 꿰뚫어 보지 못했을 뿐이 되는 것입니다.

김진홍 목사는 주한미군이 우리나 미국을 위해서 주둔하고 있는데 문제가 있는 용산 기지만 옮기면 모든 것이 다 제대로 해결될 줄 아는 식의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요? 미군기지 훈련장의 문제를 비롯해서 미군 범죄, 막대한 무기강매요구, 지휘권의 미군 종속, 주둔비용의 엄청난 부담 등등 이루 말할 수 없는 피해를 우리는 받고 있는 것입니다. 현실이 이러한데도 불구하고 그는 주한미군 주둔의 절대적 필요성만 말하고 그 까닭은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그 자신도 그 이유를 설득력 있게 내세울 수 없어서 그러한 것이 아닐까요?

문제는 김진홍 목사의 강대국 앞에서의 <줄 서기론>은 이번 설교에서 최초로 공개된 것이 아님을 그의 2001년 6월 29일자 국민일보 "여의도 포럼" 칼럼 기고문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글 요지는 이렇습니다. "선진국에서는 줄을 잘 서는 질서의식이 제대로 서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그렇지만, 한가지 잘 서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지연, 학맥, 인맥을 따른 줄서기에 능통하다는 것이다. 이건 잘못 된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가 말하려는 새로운 개념의 줄서기는 전혀 다른 논리와 이야기로 전개된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그의 글 자체를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내가 말하고 싶은 '줄서기'는 따로 있습니다. 냉전이 끝나 국제질서가 개편되어 가는 이 때에 우리 겨레가 어느 편에 어떤 모습으로 '줄 서기'를 하느냐는 문제는 민족의 생존과 장래의 번영에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지정학적 위치는 우리로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북으로는 중국과 러시아가 있고, 남으로는 일본과 미국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국력은 어느 편에도 줄을 서지 않고 자주 독립국가를 자력으로 이루어 가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그렇다면 북쪽의 대륙 세력과 남쪽의 해양 세력 사이에 어느 쪽에 줄을 서서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도모하느냐가 실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이만큼이라도 사는 것은 해방이후 해양 세력인 미국과 일본의 편에 줄을 섰기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를 채택하는 미국과 일본 편에 줄 서기를 할 때, 우리의 안정과 번영을 도모해나갈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은 비단 나만의 생각이 아닐 것입니다."

자,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그의 글에는 민족의 자주 의지를 어떻게든 불러일으키고 강대국의 횡포를 막아내면서 민족적 자존을 지켜내려는 자세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여전히 우리에게 오만한 일본, 그리고 여러 가지 사태를 통해서 드러난 미국의 패권주의적 태도에 대한 일말의 비판적 사고가 없는 것입니다. 그의 글에는 "우리가 뭐 힘있냐? 괜히 까불다가 다치지 말고 힘센 놈 앞에 줄 잘 서서 목숨부지하고 잘 먹고 잘 살 궁리나 하는 것이 좋지" 하는 식의 민족 허무주의와 기회주의적 처신의 논리가 일관해서 전개되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미약한 이스라엘 민족이 압도하는 국제정세 앞에서 흔들리지 말고, 대국의 줄을 잡지말고 오로지 하나님의 의에 의존하라고 했던 성서의 외침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입니다.

우리의 국력이 약한 것이 사실이며, 대국의 심사를 거스려서 우리가 편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엄청난 오판입니다. 따라서 김진홍 목사의 이야기를 백보 양보해서 자칫 어쩡쩡하게 굴었다가 민족의 재앙을 불러오지 말고 국제현실의 냉엄한 형세를 잘 보고 우리의 생존을 보존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선택을 하라는 전략적 권고라고 칩시다. 거기까지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합시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그런 전제 위에서 그는 목사인 한, 지금이야 힘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강대국 앞에서 눈에 안 나기 위해 줄서기를 할지라도 열심히 민족적 역량을 잘 길러서 더 이상 줄서지 않아도 되는 그런 날을 앞당기도록 노력하자,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우리는 언제까지나 줄서기 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 자신의 민족사에 자부심을 가지고, 민족적 자존을 현실로 만들어 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일은 김진홍 목사의 논리대로라면 줄서기가 아니니 민족의 생존에 위기를 가져올 큰 일 날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애국자는 그래서 김진홍 목사의 말대로라면, "미국과 일본 앞에 줄서자!"라고 목청껏 소리 높이는 자일 터입니다. 우리는 해방이후 친일잔재세력 청산을 미국의 힘 앞에서 좌절당했고, 이후 일본의 오만으로 과거사죄와 보상을 엉터리로 처리하는 바람에 식민지 시대의 빚을 받아내지 못했으며 미국의 위력에 한국 정치와 경제가 좌우되어온 역사를 걸어왔습니다.

그는 우리가 이만큼 살게 된 것도 다 미국과 일본 덕이라고 내세우는데, 이러한 생각은 그 미국과 일본이 우리 민족에게 어떤 피해와 타격을 입혀왔는지 전혀 모르는 무지의 발언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미국, 일본과도 대등한 입장에서 친하게 지내고, 중국과 러시아와도 대등한 위치에서 친선교린(親善交隣)을 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 바람직한 일이지 어찌 그래 열강이 각축하는 동북아시아 중심부에서 어느 한편에 줄서는 것이 권할 일이란 말입니까?

도리어 우리는 어느 편에도 기울지 말고, 중심에 서서 우리 자신이 바로 균형자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맡는 그런 방대한 구상과 웅지, 그리고 역량을 갖도록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김진홍 목사의 국제전략은 편협하기 그지없고, 냉전시대의 진영구도에서 머물고 있는 시대착오적이며 낙후한 발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는 그의 글 말미에, "이런 생각은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입니다"라고 했는데 바로 그러한 현실인식이 문제인 것입니다. 시대는 지금 미국의 영향력이 세계적으로 퇴조의 기로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아직도 구시대적 국제정세관에 의존해서 우리민족의 생존을 해결해나가겠다고 하니 솔직히 기가 막힐 일입니다.

한편, "허경"이라는 이름으로 올라온 김진홍 목사의 설교비평에 대한 반박문은 다른 글과는 달리 조목조목 따져 반론을 제기하고 있기에 이에 대하여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1. 김진홍 목사의 설교 어디에도 미국 부시 대통령의 발언과 사고를 정당화하는 대목이 없는데, 그의 줄서기론을 부시 대통령이 테러 사건 이후 전 세계를 향해 미국 앞에 줄 설 것인가 아니면 적이 될 것인가를 윽박질렀던 이야기를 신학화시켰다는 것은 비약이 심한 극단적 해석이라는 것에 대하여  

과연 그런가요? 김진홍 목사는 아주 분명하게 미국을 지목하고 줄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설교는 부시 대통령의 테러 사건 이후 미국 앞에 줄서라, 는 발언과, 악의 축 발언이 전세계적으로 알려진 이후에 나온 것입니다. 허경씨는 이 말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독일 통일 과정에서 배울 수 있듯이 실제적인 강대국과 적절한 관계를 바탕으로 통일 문제를 대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지혜롭다는 논지라는 것입니다. 미국 앞에 줄을 서면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정체성이 확실해지는 것인가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 미국은 미국 내부에서도 기본권 제약과 이민자들의 권리를 압박하는, 그래서 자유민주주의의 원칙을 위배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미국 앞에 줄서는 것은 따라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정체성 확립의 필수 조건이 아닙니다.  

미국이 지난 냉전시기에 제3세계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파괴한 군부정권을 지원해온 일은 천하가 다 아는 일인데 이래도 미국 앞에 줄서야 자유민주주의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하는 일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독일 통일과 자꾸 비교하면서 강대국과의 실제적 관계를 제대로 해야 한다고 하는데, 독일은 2차대전 패전국으로서 승전국가인 미국을 비껴나가면서 통일 문제를 풀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미국은 전범국가로 분단된 독일에 대해서는 승전국가로서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을 지 모르나, 전범국가나 패전국가도 아닌 우리 민족에 대해서 간섭의 권리를 주장한다는 것은 우리로서 용납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허경씨가 말하는 적절한 실제적 관계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 민족의 문제에 대해서 그래도 미국의 비위를 건드리지 말고 그 발언권과 권리를 인정하자는 것인가요? 그렇게 되는 순간, 우리 민족의 주체성은 상실되고 미국은 우리 민족의 운명에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려 든다는 것을 정말 모르고 하는 이야기인가요? 강대국과의 실제적 관계를 제대로 하는 것은, 강대국의 부당한 간섭을 최대한 배제하는 노력에서 출발합니다. 이것을 망각하는 순간, 우리는 강대국이 관리하는 분단체제, 그리고 통일이 되었다해도 강대국이 관할하는 통일국가의 처지가 될 뿐입니다.

2. 후쿠야마에 대한 언급은 김정일을 순진하게 대하는 위험성을 지적하기 위해서였지, "미국의 세계화 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후쿠야마를 언급한 것이 아니라고 한 부분에 대하여

그러나 바로 그 후쿠야마의 미국적 오만이 북한에 대한 인식을 그토록 극단적으로 부정적이게 만들고 있는 근거라는 점을 주시해야 합니다. 도대체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을 순진하게 대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길이 후쿠야마의 철저하게 서구 편향적으로 왜곡된 견해를 통해서라는 것이 온당한 논증절차가 되는 것인가요? 그리고 인용을 해도 그 인용자의 전체적인 사고와 단절된 인용이란 부당한 해석을 낳게 됩니다. 그것은 허경씨가 반박문 서두에서 밝히고 있듯이 전체적인 문맥과 연관되지 않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후쿠야마는 일본계 미국인으로서 미국이 일본과 미국의 사상적 연결점을 강화하기 위해서 스타로 만든 지식인이며,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화 논리를 퍼뜨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내세우는 고급 홍보요원의 역할을 하는 자입니다. 그는 우리 민족의 역사적 고통에 일본제국주의가 가한 압박에 일체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으며, 미국을 잘 따르면 모든 것이 잘 되어나갈 것이라는 주장을 앵무새처럼 도처에서 반복할 뿐인 자입니다. 그리고 미국의 대외정책에 반기를 드는 세력은 모두 <깡패국가>로 몰면서 이들은 미국적 세계화라는 시대의 조류에 저항하는 구시대적 존재라고 질타하고 있습니다. 그의 북한 인식과 김정일 인식은 이러한 근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후쿠야마의 논리가 날이 갈수록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이제 그는 세계 지식 판도에서 수세에 몰린 인물이라는 점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김정일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바이며, 김대중 대통령 역시 단순한 인물이 아니라는 점도 모두가 알고 있는 바입니다. 문제는 그런 비단순성을 뛰어넘어 어떻게든 전쟁을 막고 평화를 보장하는 노력을 일관해서 하는 일의 중요성에 대한 확신을 갖는 일입니다. 클린턴 정부 시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기 전에 회의적이고 부정적인 언급을 했다가 그를 만나고 나서 긍정적 태도로 전환한 것은 대화와 타협의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올브라이트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순진하게 속고 이용당했다고 한다면 할 말이 없으나, 그런 식의 비난은 비난을 위한 비난에 그칠 뿐입니다.

3. 방독면 준비는 철저한 대비를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하는 부분에 대하여

전쟁이 터지면 방독면이고 뭐고 사실 없는 것입니다. 전쟁을 막는 최선의 길은 전쟁을 하지 못하도록 정치적, 외교적 총력을 기울여 관계개선을 하는 것 외에 없습니다. 관계가 나쁘면 손에 들고 있는 몽당연필도 무기가 되고, 관계가 좋으면 손에 총을 들고 있다 해도 무서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작업에는 열정을 쏟지 않으면서 방독면 운운하는 것은 좀 우습지 않은가요?

4. 필자는 허경씨가 주장하듯 무조건적인 반미를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허경씨 역시 강대국의 논리에 끌려 다니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았듯이, 강대국의 논리에 대한 최선의 방어는 우선 강대국의 논리에 강하게 반대하는 일입니다. 이번 부시 대통령의 방한과정에서 한국사회의 반감은 결국 부시 대통령을 다소나마 고개 숙인 남자로 만드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강대국의 논리에 반대하지도 않고 어떻게 그 논리에 끌려 들어가는 길을 확보할 수 있을까?  대중들이 이건 아니다, 라고 외치고 그 논리에 속지 않고 그래서 대안을 마련하는 분위기를 성장시키면 우리는 책임 있게 우리 민족과 국가의 운명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힘이 약해도 하나님의 의를 믿고 용기를 내면 성령의 깨우침이 우리에게 형통한 길을 열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적어도 이를 믿고 시작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대안은 그런 자세를 가진 자에게만 열리는 새 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강자의 줄에 목을 매고 사는 노예로 만족해야 할 것입니다.  

김진홍 목사의 설교는 "우리가 뭐 힘있냐 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강한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갈렙과 여호수와의 편에 서기보다는, "아, 우리가 보기에도 우리는 메뚜기와 다를 바 없다!"고  패배주의적 자세를 설파했던 열 지파의 수장을 닮아 있는 것이 그토록 슬픈 것입니다. 결국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던 사람들은 누구였는지 부디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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