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0월 말 모 방송에서 종교개혁주일 특집좌담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다시 불어야 할 종교개혁 바람'이라는 주제로 종교개혁의 역사적 경험을 반추하면서 한국교회의 현실을 진단해보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 때 참석했던 한 목사님께서 '결국 모든 문제의 궁극적 책임은 목사에게 있습니다. 목사가 변화되어야 교회에 희망이 있습니다'는 논지로 말씀을 해 주셨다.

자성하는 마음이 깊이 베어있는 그의 진실이 우리 모두에게 전달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며칠 전에 그 분을 다시 만난 자리에서 그 말 때문에 방송이 나간 다음 날 큰 곤욕을 치렀다는 사정을 듣게 되었다. 하도 많은 목사님들로부터 항의전화를 받느라 교회 전화가 마비될 정도였고 그날 하루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항의전화를 한 목사님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럼에도 참 서글픈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 목사님의 진단은 매우 정확한 것이기 때문이다. 목사는 예수님의 어린양을 맡은 목자이다. 양은 고집이 세서 길도 잘 잃어버리고 적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할 능력이 전혀 없다. 그러므로 양들이 길을 잃고 헤매거나 늑대에 공격을 받아 잡아먹히거나 큰 상처를 입으면 그 책임은 자연히 목자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 한국교회가 길을 잃고 방황하며 여러 질병을 앓으며 신음소리를 내고 있는 현실은 결국 목사가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웅변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 사명이 무겁다고 비껴가려고 하는 것은 올바른 목자의 자세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가 되려는 이들은 이 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한국교회를 다시 건강하게 살려낼 수 있는 목사가 되어야겠다는 각오를 다져야 할 것이다.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에 아름답게 기록된 예수님과 베드로의 만남을 깊이 묵상하노라면 한국교회의 건강을 회복시킬 수 있는 목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진실하게 사랑하는 마음을 언제나 생생하게 간직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실패한 베드로에게 찾아와 그가 주님의 양을 돌보는 목자로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을 가슴속에 불태우는 것임을 분명히 하셨다(요 21:15-17). 베드로가 실패한 까닭은 자기야말로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있다는 자기 착각 속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음을 넌지시 말씀해주신 셈이다(요 13:6-9, 36-37; 마 26:33 참조).

오늘 우리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교회들이 교회를 건축한 다음에는 시험에 들고 문제의 소용돌이에 빠지는 것을 본다. 통상 많은 빚을 지고 교회를 건축하기 때문에 건축한 다음에는 급속한 성장에 대한 부담을 안게 된다. 그런 부담 속에서 진실하고 정직한 목회를 하기가 매우 힘들어지게 된다. 게다가 온갖 수고를 기울이는데도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하지 않으면 자연히 목사와 성도들은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게 된다.

그 와중에 목사 반대파와 지지파가 형성된다. 결국 목사와 성도들 사이에 갈등과 불신의 골은 깊어지고 상처를 주고받으며 교회는 병들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실패하는 이유는 교회건축과 성장을 향한 열정과 노력 속에 주님에 대한 사랑보다는 세속적인 허영이 더 크게 자리잡고 있음을 보지 못하는데 있다.

많은 목사들이 목회를 처음 시작할 때에 가졌던 순수한 사랑을 잃고 암처럼 무서운 '물량적 성장 지상주의'라는 전염병에 걸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곡된 주변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목사의 세계도 사역하는 교회 교인의 숫자와 재력에 의해 지배당한다. 교회 안에서도 '돈이 말한다'. 신학교에서 배운대로 진실하게 목회를 한다 해도 아무개 젊은 목사처럼 외적인 성장을 단숨에 이루지 못하면 이유불문하고 무능한 존재로 취급받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런 현실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예수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을 목숨 걸고 지켜야만 한다. 이 사랑만이 연어처럼 거센 물결을 역류해 갈 수 있는 생명력을 공급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바울처럼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자신에게 최고의 기쁨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날마다 경험하고 고백하며 사는 것을 말한다(빌 1:21-24). 이런 사람만이 세상과 병든 교회의 잘못된 압력을 능히 이겨내고 누가 뭐라고 해도 가야 할 길을 당당하게 그리고 행복에 겨운 넉넉한 마음으로 걸어갈 수 있는 것이다.

어느 날 새벽 내 마음에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하박국의 기쁨과 찬양(합 3:17-19)이 사라져 있다면 우리는 눈치채야 한다: '아! 내가 암에 걸렸구나!' 그리고 모든 일을 접고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한다. 회개와 감격의 눈물이 내 가슴을 적실 때까지 가슴을 찢고 부르짖어야 한다: '주님, 내 마음에 당신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회복시켜 주소서!'

둘째로 주님의 양들을 여러 가지로 잘 가르치고 돌보는 목자가 되어야 한다(요 21:15-17; 막 6:34 참조). 성경을 정확하게 가르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브루스 윌킨슨의 [야베스의 기도]가 한국에서 출판된 지 1년이 채 안 되어서 113쇄를 발행하였다. 거의 1년 내내 베스트셀러의 위치를 지킨 결과이다. 여기에서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대략 읽을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물론 성도들에게 기도의 중요성을 잘 가르쳐주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윌킨슨은 두 가지 중요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하나는 역대상 4장 10절에서 말하는 '복'과 '지경'의 개념을 이해하는 폭이 너무 좁다는 것이다. 즉 이웃의 복까지 생각하는 마음과 세상 모든 영역에 빛을 깃들이게 하려는 사회참여사역의 소중함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이는 야베스의 기도가 성경에서 말하는 기도의 가장 훌륭한 모범은 아니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두 번째 문제점과 관련이 있다. 예컨대 윌킨슨이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좀 더 깊이 성찰하고 그에 비추어서 야베스의 기도를 볼 수 있었다면 좀 더 균형 잡힌 시각으로 해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성경을 보다 더 깊이 있게 그리고 정확하게 풀어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의 자리가 매우 중요하다. 예수님이 강조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정통실천(orthopraxis)의 자리에 우리의 발을 딛고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정통교리(orthodoxy)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요 7:17). 정통실천이란 약자의 고통을 함께 나누며 그들에게 권리를 찾아주는 정의와 평화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런 삶의 자리에서 성경을 읽으면 사회참여의 사명이 선명하게 살아 움직이며 우리 심령을 파고든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종종 사회참여에 아예 무관심하거나 지배세력의 주장에 대해서는 공적인 지지를 거침없이 보내면서 저항적 민주세력에 대해서는 정·교 분리라는 이름으로 침묵을 강요하는 명백한 모순을 범하곤 했다. 이는 교회와 교회지도자가 중산층과 상층의 시각으로 성경을 왜곡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를 살리는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삶의 자리를 약한 자들 곁으로 최대한 가까이 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성경을 정확히 이해하고 가르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런 가르침에 감동력이 있으려면 예수님의 눈물이 있어야 한다(눅 19:41). 자신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목자의 깊은 사랑이 담겨 있을 때 진정한 의분을 표현할 수 있다(눅 19:45-46). 바울도 예수님의 심장을 소유하였기에(빌 1:8)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이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권면하곤 하였다(빌 3:18; 행 20:31). 목사의 눈은 건조해지면 안 된다. 늘 주님께 간구함으로 목사의 눈물샘이 마르지 않을 때 한국교회의 새벽은 조용히 열리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삶이 있어야 한다(요 21:18-19). 복음을 살짝 변질시켜서 확신 있게 전함으로 많은 추종자를 얻고 있는 사람들을 곁눈으로 바라보지 말자! 그리고 '다른 사람 어찌든지 나 주님의 용사되리'(찬 387)라고 뜨거운 가슴으로 노래부르자!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기꺼이 좁은 십자가의 길을 가노라면 어느새 주님께서 내 곁에 와 계신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길에서 한국교회의 희망은 싹트게 될 것이다.

박득훈 목사(기윤실 건강교회운동본부 운영위원장)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