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아름다움을 끝까지 추구하려는
사람들의 진실을 전쟁의 폐허와 대조하
면서 보여준 '갈라지면 무너진다'
미국은 여전히 전쟁 중이다. 할리우드는 이러한 시기에 거의 언제나 근육질과 총기가 하나의 상징으로 결합된 람보 류의 영화를 통해 보수적 애국주의를 강조한다. 전쟁의 승리를 통해 미국의 영광을 강조하고, 그로써 미국의 전쟁 정책이 정당화되는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할리우드와 펜타곤의 이데올로기적 합작이 그렇게 해서 이루어져간다.

대부분 미국의 전쟁 영화에는 따라서 영웅적 개인의 등장을 통해 무고한 미국인을 구하거나 또는 미국의 위기 자체를 막아내는 과정을 드라마로 만들어 간다. 전쟁 영화는 아니지만 <슈퍼맨>은 그러한 영웅주의의 산물이며 미국의 전쟁 영화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이 주제의식은 변함없이 관철된다. 영웅은 반드시 슈퍼맨이어야 하며, 미국에 맞서는 세력은 악 그 자체로 형상화된다. 적(敵)으로 규정된 존재의 인간적 고뇌는 이러한 틀 속에서 전혀 발언의 기회를 갖지 못한다. 적은 이미 인간의 권리를 존중받을 수 없는 자가 된다. 쿠바의 관타나모 미군 해군기지에 이송된 아프간 포로에 대한 처참한 비인간적 처우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이 일어도 미국이 이들을 포로가 아닌, 인간의 권리를 인정할 수 없는 전범으로 취급하고 동물적 경멸의 대상으로 삼는 까닭은 바로 이러한 의식의 결과이다.    


유럽영화, 전쟁에 숨겨진 인간의 본질적 고뇌 조명

그러나 현실의 전쟁은 그렇게 간단하게 답이 나오지 않는다. 이쪽에서 규정한 적은 상대편에서 볼 때 누군가의 아버지이며, 누군가의 연인이고 누군가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전쟁은 냉혹한 총탄만 오가는 것이 아니라, 뜨거운 사랑과 애절한 이별과 슬픈 상실이 벌어지는 인간 드라마의 현장이기도 하다. 두 차례의 거대한 전쟁을 치른 바 있는 유럽 영화가 미국 영화에 비해 전쟁의 비극 속에 숨겨진 인간의 본질적 고뇌를 충실하게 조명하려는 것은 우리에게 일깨우는 바가 적지 않다. 간혹 미국 영화에서도 이러한 유럽 영화의 영향을 발견하게 되면, 경이롭게 느껴지는 것은 영웅주의에 사로잡혀 전쟁의 승패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 실존의 아픔과 그의 극복을 통해 도달하려는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전쟁 영화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
'출구를 막아선 적'
움베르토 에코가 쓴 원작을 숀 코너리 주연으로 영화화한 <장미의 이름(The Name of the Rose)>은 유럽 중세사의 이해가 깊지 않으면 만들 수 없는 작품이었다. 바로 이 작품으로 명성을 얻는 프랑스 출신의 장 자끄 아노(Jean Jacques Annaud)는 1997년 <티베트에서의 7년(Seven Years in Tibet)>으로 미국 영화에 동양의 정신적 요소를 심화시키는 작업에 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운다. 그가 지난해 감독한 <출구를 막아선 적(Enemy at the Gates)>는 전쟁 영화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는데 성공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의 스탈린그라드를 침략한 독일군과 소련 저격수의 대결을 중심으로 장 자끄 아노 감독은 전쟁의 이면에 있는 승리의 추악함과, 영웅주의의 허구 그리고 전쟁의 와중에 꽃핀 사랑을 펼쳐 보인다. 영화는 실화를 배경으로 했다는 점에서 사실적 충격이 만만치 않다. 주드 로가 소련군 저격수 바실 자이제프로 나오고, 그를 겨냥하는 독일 장교 코니히로 에드 해리스가 열연한다. 단 1명의 저격수가 독일 나치 군대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스탈린그라드 함락의 처절함 속에서 스탈린의 영광을 앞세우는 소련 지휘부의 기만적 선전술에 바실 자이제프는 철저하게 이용당한다.

그런 가운데 바실 자이제프와 코니히 두 사람은 생명을 건 대결을 이어나가는데, 그들의 대결은 전쟁으로부터 인간을 구하는 일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을 장 자끄 아노는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결국 이들은 서로를 적이라고 인식할 이유도 없이, 적이 되어 체제의 승리를 위해 소모품으로 전락하는 위기에 처하는 것이다. 하루아침에 영웅이 된 바실 자이제프의 인간적 본질을 지켜준 것은 결국 사랑이었고, 그 사랑은 전쟁으로도 막을 수 없는 생명의 힘을 영화 속에 메시지로 남긴다.
  
로베르토 베니니(Roberto Benigni)의 감독·주연으로 만들어진 <인생은 아름다워(Life is beautiful)>를 통해서 우리는 이탈리아 영화의 철학적 깊이를 부정할 수 없는 감동으로 목격했다. 쥐세프 토르나토레(Guiseppe Tornatore) 감독이 스스로 극본을 쓴 <말레나(Malena)> 역시, 이탈리아 영화의 전쟁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고혹적 매력을 아낌없이 풍기는 모니카 벨루치(Monica Belluci)는 시실리의 한 마을에 남편을 전선으로 보낸 여인으로 나온다.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세력이 대세를 잡고 있던 때, 그녀 말레나는 이 마을의 모든 남성들의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모든 여성들의 질시의 대상이 된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그러나 그녀의 비극을 잉태하는 씨앗이 되고 만다. 남편이 전선에 나간 사이에 그녀의 삶은 경제적으로 곤경에 처하고, 남편의 전사 통지는 말레나를 탐욕적인 남자들의 공격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 모든 사태는 르나토라는 한 소년의 눈을 통해 증언된다. 사춘기의 소년이 그녀를 애욕의 대상으로 여기고 밤잠을 설치지만 말레나의 진실을 소년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는 인물이다.
  
▲이탈리아 영화의 전쟁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유감없이 보여준 '말레나'
먹을 것을 얻지 못하게 된 말레나는 결국 창녀가 되고, 전쟁이 끝나자 그녀는 마을의 여인들로부터 집단 구타를 당하고 머리를 깎인 채 쫓겨난다. 이후 마을에는 전사한 줄로만 알고 있던 그녀의 남편이 한 팔을 잃은 모습으로 돌아오고 그는 말레나의 행방을 수소문하게 된다. 영화는 남성 위주의 폭력 체제에 유린당하는 여인의 삶을 보여주는 동시에, 전쟁의 희생자들이 집단적 편견과 질시의 굴레에서 어떻게 생존의 처절함을 겪어나가는지를 놀랍도록 솔직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전쟁은 가혹했지만, 그 전쟁의 폭력은 사랑과 생명을 꺾을 수 없음을 쥐세프 토르나토레 감독은 역시 유럽 영화답게 마음에 끈질기게 남는 마지막 장면을 통해 우리들에게 일깨운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모니카 벨루치의 아름다움과 함께 깊은 슬픔과 눈물이 가슴에 고이도록 한 그의 연출이 놀랍다.


헤르베예크 감독, 인간대립 화해와 구원으로 풀어

얀 헤르베예크(Jan Herbejk) 감독의 첫 작품이나, 그 작품의 충격적인 이야기 전개는 깊은 여진을 남긴다. 페테르 야르쵸프스키(Petr Jarchovsky)의 원작 소설을 극화한 <갈라지면 무너진다(Divided, We Fall)>는 독일 나치스가 점령한 체코의 한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을 무대로 삼았다.
  
과거 상사의 아들인 유대인 청년을 숨기면서 나치스의 눈을 피해 나치스의 협력자가 된 인물과 그의 부인을 탐하는 동료 사이의 긴장 그리고 당국에 발각될 위기에 처하자 결국 이들 부부가 선택하게 되는 결정은 전쟁의 와중에서 피할 수 없는 생존 현실이 인간을 어디에까지 몰고 가는지를 보여준다. 전쟁은 기존의 인간 관계를 모조리 파괴해 버리고, 이들 사이의 권력 관계까지 뒤바꾸어 버린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에서 발생한 일체의 인간적 대립과 모순이 보복의 방식이 아닌 화해와 구원 그리고 생명의 방식으로 풀리는 것을 얀 헤르베예크는 매우 진지하게 보여준다. 그 결말의 의미를 우리는 두고두고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폭력과 비극의 현실을 헤치고 인간의 아름다움을 끝까지 추구하려는 사람들의 진실을 이 영화는 전쟁의 폐허와 대조하면서 우리들에게 설득하고 있다.
  
인간의 자유와 사랑과 생명, 이것을 짓밟는 전쟁의 기만적 폭력에 대항하는 인간 드라마를 담아내는 영화가 오늘날 삭막해지는 우리의 정신에 의미 있는 대화의 단서 하나라도 마련했으면 싶다.  

김민웅 / 뉴저지 길벗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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