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 26호 커버
한국사회에서 병역문제는 한마디로 ‘뜨겁다.’ 병역문제는 병역 비리와 함께, 한국사회의 특권층의 공적 의무의 방기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모두에게 민감한 문제가 된다. 뿐만 아니라 한참 젊은 나이에 ‘군대 가서 썩는다’는 표현으로 대변되듯이 청춘의 가치가 사장되는 두려움을 안긴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보다 더 심층적으로는 폭력을 거부한다는 종교적 양심과 이것이 결부될 때, 우리는 만만치 않은 문제제기를 경험하게 된다.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이 양심적 병역거부를 주도해오다 시피 한 한국사회에서 우리는 이 문제가 특정종교집단의 비상식적 행태라고 여겨온 고정관념이 있어왔다. 그래서 좀 격한 표현을 빌리자면 일부 ‘또라이’들의 문제행동쯤으로 인식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양심에 따라 기존의 실정법에 어긋나더라도 자신의 신조를 지키겠다는 사람을 양심수로 부르듯이, 병역거부의 대가로 투옥되는 사람들을 양심수의 커다란 범주에 놓고 인식하는 경향이 최근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는 특히 종교적 관점에서 폭력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와 직결되고 있다.  

군에서 기본적으로 익혀야 하는 것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면, 사람을 죽이기 위해 필요한 기술훈련을 거부하겠다는 것은 인간의 기본양심에 속하는 문제일 수 있는 것이다. 군대라는 틀에서 이루어지는 훈련이라는 점이 이러한 사실을 은폐 내지 정당화하고 있지만, 개인적 차원의 살인이 범죄로 취급되는 반면에 군대집단의 살인훈련은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은 문제라는 논란은 충분히 가능해진다. 물론 여기에는 군의 역할이 국가의 방어라는 차원에서, 군의 훈련은 정당방위의 차원이라는 논리가 존재한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그동안 군이 정치적 폭력의 중심에 있어왔고, 군에서 벌어지는 구타와 의문사 등이 겹치면서 사안은 간단치 않게 되어왔던 것이다.

병역에 대한 의무관념은 기본적으로 한국사회의 평등과 특권철폐라는 차원에서 인식되어 온 경향이 높다. 6.25 전쟁의 과정에서, 전선에서 전사하는 병사가 마지막으로 내지르는 소리가 ‘어머니’가 아니라, ‘빽’이라는 농담은 빽, 즉 정치적 배경이 없는 사람들만 전선에 끌려나가 애꿎은 죽음을 당해야 했다는 사회적 인식을 보여준다. 결국, 일반국민들에게는 병역의 의무를 신성한 것으로 만들어 놓고, 정작 그러한 법을 만든 정치/사회적 주도세력들은 이 법망을 피해 가는 것을 당연지사로 여겨온 한국사회의 고질적 병폐가 이에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힘있는 집안에서 군에 가는 것은 직업 군인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바보’ 같은 일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병역거부 내지는 기피가 단지 특권층의 전유물이 아닌 사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우리가 이른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라고 부르는 매우 적극적인 병역거부 현상이다. 특권층의 병역기피는 병역을 피하고 안락한 자기 일신의 출세를 위한 선택으로 귀결되는 것에 반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는 그 대가를 혹독하게 치를 것을 각오하는 결정이 된다.

우선 병역 거부에 의한 법적 심판을 받아야 하며, 이후에도 병역 기피자라는 딱지가 붙어 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전과자와, 병역 기피자라는 두 가지 멍에를 무릅쓰고 이를 감행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그래서 한국사회에 서서히 충격을 주기 시작한 것이다. 병역에서 빠지고 자신의 생활을 즐겁게 누린다면 모르겠거니와, 병역거부의 대가를 작심하고 하는 선택이라면 그 거부, 내지는 저항의식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특권층의 병역기피는 병역을 피하고 안락한
자기 일신의 출세를 위한 선택으로 귀결되는
것에 반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는 그 대가
를 혹독하게 치를 것을 각오하는 결정이 된다.
ⓒ뉴스앤조이 김승범
한국사회가 헌법적으로도 종교와 양심의 자유를 존중하고 보호한다고 되어 있다면, 사실 종교적 양심의 차원에서 병역거부를 한다는 것은 헌법적으로 보호되어야 할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한국은 종교탄압 국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종교적 양심과 신조에 따른 행동을 처벌한다는 것은 결국 그 종교의 신앙고백과 그에 따른 행동에 대한 국가의 규제와 억압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헌법의 종교의 자유 존중이 병역의무 조항과 정면충돌할 경우, 국가는 후자에 손을 들어주는 것이 현실이라는 점에서 병역에 대한 양심적 거부는 결국 법적 처벌 대상에서 벗어날 길이 없게 된다. 누군가가 종교적 양심을 빙자한 병역거부를 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되겠지만 일체의 폭력을 거부하는 종교적 신조는 다른 누군가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사실상 원론적 차원에서 처벌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아이들을 어린 시절 교육시킬 때 어느 부모가 폭력을 거부하지 말 것을 가르치려 들겠는가? 비폭력적 사회를 위해 비폭력적 인간을 기르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병역 의무라는 문제 앞에서 이러한 비폭력 논리는 무력해지고 만다. 병역은 폭력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방어의 신성한 책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정한 종교적 양심에 의해 폭력으로 국가를 방어할 수 없다고 한다면,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칼을 쓰지 말라고 하신 것을 그렇게 해석하고 따른다면 이는 법적 처벌로 해결될 성질의 사안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대체복무라는 방식의 현실적, 논리적 타협점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국가를 위해 복무하는 방식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그 복무의 의무를 기피하는 것은 아니라는 논리가 이로써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대체복무의 문제는 매우 진지하고 적극적으로 논의되고 정리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물론 한편에서는, 대체복무의 내용이 군복무에 비하면 훨씬 자유롭고 그 부담이 적다고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대체복무의 논리가 일단 법적으로 인정되면 누가 군에 가려하겠는가라고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래서 군에 가기 싫은 사람들은 군입대 연령 이전에 특정 종교에 가입하여 종교적 경력을 쌓은 후 이를 내세워 대체복무를 선택하려 한다면 이 또한 종교적 양심을 이용하는 비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에 대한 논의도 이제는 보다 깊게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순수한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자들의 권리가 이렇게 순수하지 못한 이들에 의해 훼손되는 것을 막아야 하는 것이다.

한편,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와 대체복무를 주제로 한 좌담에서 성공회대학교 박성준 교수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하는 유럽의 예를 들면서 그들의 대체복무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되고 힘들다며 그 실상을 알면 편법으로 대체복무를 하겠다는 사람들은 그렇게 고생할 바에 군대 가는 것이 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아무튼, 대체복무의 내용을 보다 다양하고 명확하게 정리하는 움직임이 있게 되면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가 처벌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위한 복무에는 이견이 없지만 그 방식에 대해서는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감옥행과 병역기피자라는 굴레를 씌우는 일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대체복무 시스템은 앞으로 군축이 실현될 경우, 청년층들의 역량을 매우 새로운 차원에서 활용해나가는 근거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지금부터라도 깊이 주시해볼 필요가 있는 사안이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병역 의무와 관련해서 우리가 놓여 있는 분단형 냉전체제의 현실과 관련한 논의도 필요함을 느낀다. 즉, 우리의 현실에서 병역이란 분단형 냉전체제 유지를 위한 군사력 충원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분단형 냉전체제 거부를 자신의 양심으로 삼는 사람들의 경우에 이 문제는 또 다른 차원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병역 문제가 우리 사회에서 뜨거운 현안이 되는 사태를 더 이상 반복하지 않고, 이것이 특권의 문제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분단체제의 해결을 매우 중대한 과제로 삼아야 한다.  

분단형 냉전체제가 와해되면 병역의무의 문제는 새로운 각도로 사회적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며 그 때에 가서는 현재의 국민 징병제가 모병제로 전환할 수 있는 가능성도 생기고 그에 따른 문제를 해결하는 논의의 수준도 높아질 수 있을 것이다. 그와 함께 청년층의 이 엄청난 역량을 보다 생산적이고 생명지향적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통로가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미래를 기대하면서, 병역의무의 논란에 요구되는 전제와 조건들에 대해서 보다 다양하게 접근할 필요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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