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말한 삶, 불가능한 현실 

집값이 갑자기 천정부지로 뛰어오르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이상한 것은 '내 집'에 대한 욕망이 없는 사람일수록 혼란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집을 사는 데 모든 인생을 낭비하는 것보다 내 꿈과, 사람에게 투자하는 것을 원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비극적인 결말을 낳았습니다. 서울에 집을 한 채 이상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위치적인 혜택과 투기 바람으로 인해 불로소득과 좋은 환경을 누리는 반면, 전월세를 사는 사람들은 자꾸 변두리로 내몰리게 됩니다.

이제는 예전에 가지고 있던 돈으로는 도시의 삶이 불가능해 졌습니다. 욕심 없이 나에게 주어진 일과 사람들을 사랑하며 사는 게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보 같은 짓이라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나 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과 재산을 훨씬 뛰어넘어, 집을 사야 한다. 어차피 대출이자보다 불로소득이 훨씬 크기 때문에 과감히 대출을 받아서 크고 좋은 집을 산다.’ 영악한 사람들이 날로 늘어갔고, 결국 미국을 중심으로 치유 불가능한 부동산 사태를 맞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과연 집값이 오르는 가운데 이러한 사회적 풍토에 휩쓸리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었을까요?

남들이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 자식도 선행학습을 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학교에서도 선행학습을 한 아이들의 비중이 많아질수록 수업의 중심이 사교육을 받은 아이들 위주로 움직이게 됩니다. 사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더욱 소외되고, 결국엔 어쩔 수 없이 그동안 사교육을 멀리했던 부모는 다른 어떤 비용을 줄이더라도, 효과도 의미도 없는 사교육에 엄청난 비용을 낭비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와 아이 모두 망가뜨리는 이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 살 수는 없을까요? 

우리는 매주 예수의 삶을 나누고, 노래하고, 하나님과의 깊은 친밀감을 위해 대화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자신의 욕심을 양보 내지 포기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로 매주 결심하지만, 그 다짐은 세상을 만나는 즉시 혼란을 겪습니다. 세상의 유익이 되기 위해 나에게 주어진 것을 양보해 봤자, 선한 양심이 이용당할 뿐, 세상은 전혀 변하지 않습니다.

결국 예수가 말한 삶은 지금 현실에서는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 없습니다. 어느덧 남들 보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쉽게 가지려는 모습으로 변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신앙은 현실과 관계가 없는 ‘영적 포기’, ‘영적 회개’라는 말로 포장되어 유지됩니다. 그리고 현실의 부는 ‘축복’이라는 말로 포장되어, 그럴듯한 기독교 샤머니즘이 완성됩니다. 

왜 공동체인가?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자 하는 다짐이 서도, 현실의 두꺼운 벽은 의로운 결심을 조롱합니다. 사회 구조로 인한 기아는, 기부나 구호기구를 통해서는 해결이 불가능합니다. 어떤 아름다운 정신으로도, 감동받은 사람들의 도움으로도 한계가 분명합니다. 기아는 사회 구조로 인한 문제로, 사회구조를 바꾸는 것 밖에는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제도변화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인식의 변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도개혁에 힘쓰는 가운데 바로 앞에 주어진 현실의 암담함을 극복할 길이 있습니다. 한국 정부 안에 또 다른 작은 정부, 도시 안에 작은 도시, 바로 ‘공동체’입니다. 

먼저 변화의 필요성을 인식한 사람들이 모이면 됩니다. 공동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들이 늘어가면서, 비용을 절감할 수 있습니다. 자녀가 하나, 혹은 둘만 있는 가정의 아이들이 자기만 아는 아이로 자랄까 걱정이 되지만, 함께 모이면 공동체성이 자연스럽게 학습될 수 있습니다. 갑자기 오르는 집값 상승분을 공유해 공공의 재산을 마련하는 계기를 볼 수도 있습니다. 혼자 힘으론 어쩔 수 없어 타협을 정당화 했던 것들이 이제, 함께함으로 가능한 기적을 볼 수도 있습니다. 이제 내 주변의 사람들이 ‘이웃’에서 ‘가족’으로 격상되며 함께 기뻐하고, 아파할 수 있는 친밀감이 가능합니다. 

물론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결혼 후 자연스럽게 생기는 과정처럼 세계관의 충돌도 있고, 개인만의 특별한 장점을 어떻게 살려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 공공의 질서와 용납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하는 등 하루하루가 긴장감의 연속입니다. 어디까지 공공의 것으로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도 충돌의 주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공동체는 마냥 아름답게 포장되어서도 안 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됨이 도저히 불가능하게 보였던 우리의 차이를, 하나 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신비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공동체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렵지도 않습니다. 의무적으로 사랑하는 것만큼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고자 하면 미처 의식하기도 전에 서로 깊이 사랑함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회를 개혁하는 운동에 있어서 많은 지식과 지식을 잘 담을 수 있는 언변이 필요합니다.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고 헌신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준비는 없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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