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조계종의 혜암 종정이 얼마전 타계했다.
불교식 표현을 빌자면 열반에 들어간게 될까.

그런데 언론의 보도에서 눈에 띄는 게 있다. 바로 '일중일식(日中一食)'과 '장좌불와(長坐不臥)'란 말이다. 편히 누워 자지 않고 앉아서 화두를 챙기며 부처님처럼 하루에 한 번만 음식을 먹는다는 것인데 혜암이 그 대표적인 수행자였다고 한다.

지난해 인도의 한 수행자가 20년간 오른팔을 위로 향해 들고 내리지 않는 수행을 해서 팔이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는 모습을 TV를 통해 보면서 혀를 찬 적이 있었는데 몇 십년을 눕지 않고 지냈다니 이 또한 혀를 내두르게 한다.

뭔가해서 자료를 약간 찾아보니 혜암만 그런 수행을 한 것은 아니어서 어지간한 불교 상식만 있으면 알 수 있는 게 바로 '일중일식', '장좌불와'인 것 같았다.

무엇이 졸리면 자야 되고 잠은 누워서 자야 되는 그리고 하루 몇번씩은 배가 고파 배를 채워줘야하는 인간의 모습을 거스르게 하는 것일까.

그 옛날 마틴 루터가 카톨릭식으로 무릎으로 기어 계단을 오르며 회개하다 '이게 아니다'라는 것을 깨닫고 종교개혁을 시작했다는 얘기가 생각난다.

루터가 이러저러한 사유로 홧김에 카톨릭에 반대하는 내용의 격문을 동네 담벽에 붙였다가 궁지에 몰리게 되자 내친김에 종교개혁을 시작했다는 믿거나 말거나식의 얘기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과연 혜암은 편안히 눈을 감았을까. 오랜 수행으로 잠 안자고 덜 먹는 것이 아예 더 편해졌는지는 모르지만 인간의 구원이 자해(自害)를 통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을 깨달으며 저승의 문을 들어섰을까.

아님 참 속좁은 얘긴지 몰라도 '나는 너희들이 꿈도 못 꿀 수행을 하고 있는 대단한 사람이다'라는 뿌듯함을 육신의 괴로움과 바꾸면서 이생을 보냈고 나름대로 불교계의 큰 획을 그으며 눈을 감게되었으니 '여한'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위에서 말한 감정들은 '인간'이 가지는 보편적 감정이다. 역설적으로 아무것도 아닌데 왜 '고행'을 하겠는가. 최소한 그게 괴롭다는 것은 인정하니 그런 방법을 택하는 것이고 아무리 욕심을 버리는게 불교의 기본이라고는 하지만 '열반'에 다다르겠다는 욕심은 버릴 수 없는 노릇아닌가 말이다. '열반'에 다다르겠다는 욕심이 없는 자라면 범인으로 범상하게 살다가면 그만 일테니 말이다.

맞는 지는 몰라도 인간으로 살면서 최고로 선을 행하면 내세에 '개'로 태어난다는 게 윤회설의 한 부분이라는 얘기를 어디서 들은 기억이 있는데 아무리 잘해야 다음 세상에 아무 생각없는 개로(개야 미안하다!) 태어난다면 지금 인간으로 선하게 살아갈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인간은 스스로 무엇을 해서 구원을 얻으려는 본성이 있다. 기독교인들도 '구원'의 문제에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무관한 이러한 본성을 혼동시켜 버리는 경향이 없다고 하긴 어려운 것 같다. 예를 들자면 많지만, 아침 잠을 뿌리치고 '새벽기도'를 나가는 성도들을 그렇지 않은 성도들보다 '대단한'것으로 여기는 태도가 그 대표적인 예라고 생각된다. 새벽기도를 드리는 성도가 '확률적으로' 더 신실하게 하나님을 믿고 있을 수는 있으나 다 싸잡아서 새벽기도를 안나가는 성도가 저녁에 따로 기도시간을 내고 있는지 새벽기도를 나가는 성도가 거의 직분 때문에 아님 자식 대학보내달라고 나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아닌가. 더구나 '몸의 고생에도 불구하고' 라는 수식어가 붙는다면야 '일중일식'이나 '장좌불와'와의 구별점이 모호해 진다.

암튼 육신의 고통이 구원을 주지 않음을 부르짖으신 예수님과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감사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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