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순수하고 정직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쉽지만 않은 것 같습니다.

구약의 역대상 1-9를 보면 아담 이래로 사울 왕 후손까지 약 오백 여명의 이름들이 나타납니다. 재미있게도 그들 이름 중에는 같은 이름이 극히 드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같은 이름의 다른 사람들이 종종 나타나는데 그 중 아나니아(Ananias)라는 이름의 세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 모두 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되 그들의 영성과 삶은 극히 대조적이어서 이들 세 사람이 거의 같은 시기에 성경에 등장한 사건(?)에 대해 나름대로 한번 생각해 봅니다.

첫 번째 아나니아는 초대교회 당시의 성도로 짐작되는데 바나바처럼 성도들이 자기 소유를 팔아 정직하게 사도들의 앞에 둘 때 그는 자신의 집을 판돈 중에 얼마를 감추고 마치 판 돈 전부를 가지고 온 것처럼 베드로 앞에 나왔다가 베드로가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에게로다"며 질책하자 즉시 죽어버린 가련한 자였고(행5:1-10),

두 번째 아니니아는 다마섿 도상에서 영광의 주님을 만난 후 앞을 볼 수 없게 되었던 사울에게 주의 명을 받고 담대히 나아가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고 권하여 사울을 바울이 되게 한 주의 귀한 도구였습니다(행9:17, 22:16).

세 번째 아나니아는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전도여정을 끝내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유대인들에게 잡혀 천부장 앞에서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며 그의 이야기를 시작할 때 바울의 입을 치라고 명한 당시 대제사장인데, 그는 곧 바로 바울로부터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고 질책 받은 자 입니다(행23:1-3).

이들을 생각하면서 이 세 사람의 영성이 오늘날에도 역시 우리 성도 한 사람의 영성이나 한 교회의 영성에서도 함께 혼재될 수가 있다는 사실에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오늘날 기독인들이 가장 하기 쉬운 당당한 말은 서로 사랑하자는 것인데 실상은 가장 실행하기 어렵고 스스로도 부끄러운 것도 바로 이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주님의 이 큰 사랑 안에 용납되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 묘한 의문중의 하나인데 곧 바리새인 제사장들과 장로들로 도무지 말만하고 행치 않는다고 예수님께 질책 받은 자들이지요(마 23).

비록 거짓된 마음이지만 그래도 자신의 재산을 팔아 스스로 가져온 성도인 첫 번째 아나니아를 왜 베드로는 사랑으로 회개를 먼저 권면하지 않았을까요....., 바울은 대제사장 아나니아를 왜 그렇게도 무섭게 질책하였을까요.....

아마도 그들의 죄가 마땅히 사랑으로 덮을만한 인간적인 허물과 과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대적하실만한 거짓과 위선 가득한 영적인 교활함이 그들 안에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저희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만일 저희 마음에 하나님을 속이는 거짓된 아나니아가 있으면 우리로 민첩하게 깨닫게 하시고 영혼 깊숙이 회개하게 만드시어 하나님 앞에 청결한 마음 가지게 하옵소서.

혹 저희 안에 주여, 주여.. 습관처럼 부르되 오히려 영적 장님이 되어 사람을 치며 권세부리는 아나니아가 있으면 먼저 저희를 치소서. 회칠한 담과 같이 믿기보다는 차라리 하나님께 매 맞고 깨우침을 얻어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고 싶습니다.

다만 간절히 바라는 것은 저희도 주님의 선한 도구가 되어 사울을 바울로 살린 것처럼 거짓과 불신으로 죽은 영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살리는 정직한 아나니아가 되는 것이니이다.

부디 저희와 저희 교회로 성령님의 도우심을 얻게 하사 어떤 혼란 속에서도 정직한 믿음 안에 굳게 서며 오히려 주님의 의와 평강과 희락 속에 깊이 젖는 순결한 믿음 갖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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