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에 언급된 욥의 친구 중에서 두 번째로 등장하는 빌닷은, 욥이 자기 자신을 저주하는 탄식을 듣고 있다. 그는 엘리바스가 욥에게 말한 엘리바스의 첫 발언도 듣고, 그 발언에 대한 욥의 응답도 듣는다. 빌닷은 이렇게 두 사람이 주고받는 장황한 말을 다 듣고 나서, 일방적으로 욥을 꾸짖기 시작한다. 엘리바스의 발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비판도 없이, 그의 말은 그대로 다 수용하고 있다. 빌닷이 욥에게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이렇다. 욥의 고난이, 자신의 죄이든 자녀의 죄이든, 죄의 결과라는 것이다. 따라서, 욥이 잘못을 회개하고 의롭게 되면 다시 부의 복을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욥의 반박은, 친구라는 자들이 자기 친구가 당하는 고통의 무게를 이해하려 하거나 동정하기는커녕, 오히려, 전통적인 응보(應報) 교리를 가지고서 고난 당하는 친구를 정죄(定罪)하고 있으니, 친구라고 말할 수도 없다는 것이며,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사람은 그러한 하나님께 견줄만하지도 못하므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의로움을 주장할 수도 없지만,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재자(仲裁者)가 있으면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겠다는 것, 그러나 일이 여의치 않으면, 다만, 지금 받고 있는 고난에서나마 벗어나고 싶은데, 그 길은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 가 주시는 것  뿐이라는 것, 목숨을 거두어 가지 않으시겠다면,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관심을 갖지 말아 주셨으면 그 순간만이라도 좀 하나님의 감시에서 벗어나 쉴 수 있겠다고 하는 것이다.


빌닷의 첫 발언

1)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받으면 다시 부자가 된다(8:1-7)

빌닷은, 먼저, 욥의 말이 거센 바람과도 같아서 걷잡을 수 없다는 점을 말한다. 과격하다는 말이다. 이성을 잃은 말이라는 것이다. 무엄하고 신성모독적(神聖冒瀆的)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억울하게 고통을 받고 있다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심판을 잘못하고 계신 증거라고 말을 하다니... 어떻게 그런 말을 감히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불행을 당하는 욥은 하나님의 심판에 이의(異議)를 제기(提起)한다. 자기로서는 자기가 당하는 고난의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 고난이 죄의 결과라면 자기의 잘못이 무엇인지 좀 말해 보라고 친구에게 말한다(6:24). 친구들은 욥에게 죄가 있어서 그 벌로서 고난을 당한다고 하지만, 욥은 오히려 자기와 같은 의인에게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이 어떻게 의로운 분이신 지를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런데, 욥의 불행을 보는 친구들은 하나님의 정의의 심판을 욥의 처지에서 확인하려고 한다. 그러기에 빌닷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욥을 호되게 꾸짖고, 지금 욥이 당하는 고난은 바로 욥의 자녀들의 죄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빌닷은 욥에게 하나님을 향해 자비를 구하면 욥이 복 받은 상태로 회복될 것이라고 권면한다. 그 회복이 처음에는 보잘것 없겠지만 나중에는 크게 될 것이라고 한다. 빌닷은 지금 하나님 경외(敬畏)의 보답(報答)을 부유(富有)한 재산의 축재(蓄財)로 설명하고 있다.

2) 조상들이 대대로 경험으로 터득한 진리를 생각해 보아라(8:8-10)

빌닷은 욥에게 옛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전승, 조상들이 경험으로 배운 진리를 상기시킨다. 한 평생 밖에 살지 못하는 한 개인이란 사는 날이 너무 짧아 진리를 터득하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한데, 그런 개인이 자신의 생각만을 고집한다는 것은 자신의 지식의 한계를 스스로 폭로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다음에 이어지는 빌닷의 말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전승 내용을 말하는 것 같다.

3)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없다(8:11-15)

물기가 있는 늪이라야 왕골이 자라는데, 늪에 물이 말라버리면, 왕골은 벨 때가 되기도 전에 말라죽고 마는데, 하나님을 잊고 사는 사람, 믿음을 저버린 사람의 길이 바로 이와 같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믿는 것은 끊어지게 돼 있는 줄에 매어 달리는 것과 같고, 거미줄을 의지하는 것과 같고, 곧 무너질 집에서 안심하고 사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4) 믿음 없는 삶은 뿌리뽑힌 삶이다(8:16-19)

햇빛을 받으며 싱싱하게 자라나는 나무를 보면, 땅 밖으로는 그 가지가 무성하고 땅 속으로는 그 뿌리가 튼튼하게 박혀 있다. 그러나 이런 나무가 어쩌다가 뿌리가 뽑히면, 그 나무가 박혀 서 있던 그 자리마저도 그 나무를 외면하고 말 것이며, 그 자리에서는 다른 나무가 새로 자라게 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우리가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할 토양이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저버린다는 것은 뿌리뽑힌 삶을 사는 것이다.

빌닷이 욥에게 이런 요지의 말을 하는 것을 보면, 지금 욥의 처지가 이 경계선에 와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5) 하나님은 온전(穩全)한 사람을 돌보신다(8:20-22)

하나님은 온전한 사람을 물리치시지 않는다. 욥이 만일 온전한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다시 기쁨을 주시고, 욥을 대적하던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욥의 대답

1)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의로움을 주장할 수 없다(9:1-15)

욥은 빌닷의 말을 긍정한다. 긍정할 뿐 아니라 빌닷의 주장을 더 보충한다. 사람이 무엇이라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의로움을 주장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람이 자기가 옳다는 것을 하나님에게 설득시키려고 하나님과 논쟁을 한다거나 논리를 전개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인만큼 하나님과 사람은 전적으로 다른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거역하고서 온전할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백 보를 양보하여, 어떤 쟁점에 있어서, 비록 사람이 옳다해도 하나님의 준엄한 질문 앞에서는 사람에게는 대답할 말이 있을 수 없으며, 다만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사람을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은총을 비는 것뿐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심을 설명하기 위하여 욥은 자연 현상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묘사하고 있다. 지진(地震)을 일으켜, 땅을 그 밑뿌리에서 흔드시고, 있던 산을 없게도 하시고 없던 산이 솟아나게도 하신다. 지각변동(地殼變動)을 일으켜 육지를 바다가 되게 하고 바다를 육지가 되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능력의 표현이란 말일 것이다. 천지 창조 이후에 해가 떠오르지 않은 적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이이야 말로 해에게 명하시어 뜨지 못하게도 하시며 별들을 가두시어 빛을 내지도 못하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하늘을 펴실 때 누구의 도움도 받은 일이 없으며 홀로 각종 별들을 만드셨으니, 예를 들면, 북두칠성(北斗七星)과 삼성(參星)과 묘성(昴星)과 남방의 밀실(密室)이라는 것이다.

2) 악한 자와 흠 없는 자를 똑같이 파멸시키시는 하나님의 심판은 이해할 수 없다(9:16-24)

욥으로서도 이러한 하나님에게 자신의 의로움을 설득시킬 생각은 없다. 다만 그로서 답답한 것은 자기도 모를 이유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고통스러운 상처(傷處)를 입히시는데, 과연 자기의 호소를 들어주시겠느냐는 것이다. 강한 쪽이 하나님이신데, 힘으로 겨룬다고 한들 어떻게 이길 수 있겠으며, 재판에 붙인다한들 누가 하나님을 피고로 재판정에 세울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비록 욥 자신이 옳다고 해도 하나님은 욥에게 작용하시어 욥의 입이 스스로 욥을 정죄하게 하실 터인데, 욥이 비록 흠이 없다고 해도 욥이 틀렸다고 말씀하실 터인데, 이러한 하나님과는 처음부터 겨룰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욥의 항의는 극단으로 치달린다. 욥이 이해 할 수 없는 것은 욥 자신의 개인적인 고난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에게는 모든 것이 한가지로만 여겨진다. 그러므로 나는 '그분께서는 흠이 없는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다 한 가지로 심판하신다' 하고 말할 수밖에 없다. 갑작스런 재앙으로 다들 죽게 되었을 때에도, 죄 없는 자마저 재앙을 받는 것을 보시고 비웃으실 것이다. 세상이 악한 권세자의 손에 넘어가도, 주께서 재판관의 눈을 가려서 제대로 판결하지 못하게 하신다. 그렇지 않다고 하면, 그렇게 하는 이가 누구란 말이냐?"(9:22-24)

갑작스런 재난이 닥칠 때 죄 없는 자마저 재앙에 희생되는 것을 본 욥은, 하나님이 흠이 없는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다 동일하게 심판하신다는 것을 확인한다. 하나님은, 죄 없는 자마저 재앙을 받는 것을 보시고서 안타까워하시기는커녕, 오히려 죄 없는 자의 멸망을 보시고서, 그 죄 없는 자를 비웃는다고 생각한다. 세상이 악한 권세자의 손에 넘어갈 때라 하더라도 재판관만이라도 올곧게 서 있으면 시시비비를 옳게 가릴 수 있겠지만, 세상이 행악자들에게 넘어가면 재판관들 마저 그 악한 권력에 예속되어 그릇된 재판을 하기 마련이니,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이 시키는 것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일어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재판관을 매수하여 재판을 그릇되게 하는 이가 바로 하나님 자신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모든 음모(陰謀) 뒤에 하나님의 조종(操縱)이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이 "유죄"라는 말과 무엇이 다른가!

3) 깨끗이 닦아도 주께서 나를 다시 시궁창에 넣으시니...(9:25-31)

빌닷을 향한 욥의 말은 하나님을 향한 호소로 잠시 중단된다.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일생을 뒤돌아보니, 세월이 빨리도 지났다는 것이다. 트랙 위를 질풍처럼 달리는 단거리 경주자처럼, 바다 물을 날렵하게 가르고 지나가는 갈대 배처럼, 먹이를 덮치려고 쏜살같이 내려오는 독수리처럼, 세월이 그렇게 빨리 흘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기간 동안 아무런 낙도 못 누렸고, 고통으로 점철된 세월만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욥이 갖는 확신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유죄판결을 내리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모를 일은 어쩌면 자신의 삶이 마치 하나님께서 정죄하신 죄인의 형벌과도 같은 것인지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정직한 삶이 헛수고일 뿐이었다는 낭패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그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다.

"주께서 나를 정죄(定罪)하신다면,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애써서 헛된 수고를 해야합니까? 비록 내가 비누 물로 몸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이 닦아도 주께서 나를 다시 시궁창에 처넣으시니, 내 옷인들 나를 좋아하겠습니까?"(9:30-31)

4)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재자(仲裁者)라도 있으면 좋으련만(9:32-10:1)

꼭 누구 들으라는 것이 아닌, 욥의 독백이 다시 계속된다. 욥기에서 중요한 주제 중에 하나인 하나님과 자기 사이를 중재(仲裁)를 해 줄 중재자, 하나님 앞에서 욥의 의로움을 판단해 줄 재판관이 있어주기를 바라고 있다.

욥에게서 흥미 있는 주제 중에 하나는 그가 하나님과 함께 재판정에 서겠다는 발상이다. 누가 원고가 되고 누가 피고가 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 같지 않다. 욥에게 죄가 있다면, 하나님이 원고가 되고 욥이 피고가 될 수도 있다. 욥 자신은 어떻든 하나님을 법정에 출두시켜 자신이 당하는 형벌의 부당성과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탄식한다.

"강한 쪽이 그분이신데, 힘으로 겨룬다고 한들 어떻게 이기겠으며, 재판에 붙인다고 한들 누가 그분을 재판정으로 불러올 수 있겠느냐? 비록 내가 옳다고 하더라도 그분께서 내 입을 시켜서 나를 정죄하실 것이며, 비록 내가 흠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분께서 나를 틀렸다고 하실 것이다"(욥 9:19-20).

중재자가 있어주든 재판관이 있어주든, 하나님과 욥 사이에 어느 누가 있어서 하나님이 왜 욥에게 가혹한 형벌을 주시는지, 욥이 형벌을 받아야 하는 까닭이 무엇인지는 밝혀야 하겠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자기를 변호해 줄 자, 아니 변호까지는 못해주더라도, 시비를 가리는 기초 작업으로서, 양자 사이에 서서, 양자의 의사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구실을 맡아줄 자는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한 쪽은 하나님이고 다른 한 쪽은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법정에 설 수 없다면 중재자라도 있어야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부르짖는다.

"하나님이 나와 같은 사람이기만 하여도 내가 그분께 말을 할 수 있으련만, 함께 법정에 서서 이 논쟁을 끝낼 수 있으련만, 우리 둘 사이를 중재할 사람이 없고, 하나님과 나 사이를 판결해 줄 이가 없구나!"(욥 9:32-33)

5)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로 나 같은 자와 다투십니까?(10:2-17)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원통함을 참다못해, 욥은 자신의 생각을 여과 없이 그대로 하나님께 아뢴다. 무엇보다도 먼저, 욥은 하나님께 자기를 죄인 취급 말아 달라고 호소한다. 욥은 자신이 당하는 온갖 고통을 하나님이 주시는 형벌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기를 향해서 다투시는 것으로 생각한다. 욥에게 있어서 지금은 하나님은 사람에게 싸움을 걸어오시는 분이다!

욥도 하나님을 향하여 도전을 시도한다. 욥은 하나님의 판단과 심판에 이의(異議)를 제기(提起)한다. 지금까지 흠 없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아온 자기 같은 사람은 이렇듯 멸시하고 학대하시면서, 어쩌자고 악한 사람들이 세운 계획은 잘만 되게 하시니, 그것이 도대체 하나님께 무슨 유익이라도 되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 같지 않고, 마치 살과 피를 가진 인간이 하는 일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분명 썩어질 살과 피를 가진 사람과도 같다는 말인가? 짧디 짧은 인생의 햇수를 사는 덧없는 존재라도 되시었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욥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아시는 분이신데(욥 10:7), 욥에게서 죄를 찾아내려고 하신다는 말인가?

욥은 하나님이 자기를 죄인으로 잘못 오해하고 있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욥은 하나님이 자기를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신다고 확신한다. 비록 욥이 하나님께 반항하는 언사를 쓰고, 친구들이 지적했듯이, "거센 바람과도 같아서 걷잡을 수 없는"(욥 8:2) 투로 말은 해도, 하나님이 자기와 가까이 계신다는 것을 끊임없이 확신하고 있다. 하나님은 욥을 창조하신 분이다. 진흙을 빚듯이 욥의 몸을 빚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신데, 한 남자에게 힘을 주시어 욥을 낳게 하시고 한 여자에게 생명줄을 주시어서 욥으로 생명을 빨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욥에게 살과 피부를 입히고 뼈와 근육을 엮어서 몸을 만드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신데, 그에게 생명과 사랑과 숨결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신데, 이렇게 한 생명을 손수 창조해 놓으시고서,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왜 늘 피조물을 해치실 생각을 몰래 품고 계신단 말인가? 어쩌자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피조물이 죄를 짓나 안 짓나 하는 것만을 감시하고 계신단 말인가? 죄라도 짓기만 하면 당장에 벌을 내리실 것 같은 하나님이신데, 그런 하나님이 사람이 올바른 일을 해도 그 사람을 별로 믿어주시는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욥은 자신의 고통을 마치 하나님의 심술인 것처럼 생각한다. 사람이 괴로움을 당하는 것을 보고 즐기시는 분인 것처럼 묘사한다. 욥이 괴로움을 당하는 동안은 그것을 보고 즐기시다가, 욥이 조금이라도 평안해 지는 것 같으면 하나님은 사나운 사자처럼 욥을 덮치고 기적을 일으키면서까지 욥에게 상처를 입히고, 항상 욥에게 불리한 증인만을 불러 세우시는가 하면, 욥을 공격할 계획만 늘 세우고 계신다는 것이다.

6) 나를 혼자 있게 내버려두십시오(10:18-22)

그래서 욥은 하나님께, 자기를 모태에서 살아 나오게 하신 것을 항의한다. 이러한 항의는, 친구들이 욥을 찾아 왔을 때, 욥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출생을 저주하는 말(욥 3:1-16)에서 이미 들은 바가 있다. 여기에 더 첨가하여, 자기에게 간섭 말아 주시라고, 자기를 좀 못 본 채 하시라고, 자기를 좀 혼자 있게 내버려두시라고 간구한다. 이제 곧 죽어 어둡고 캄캄한 땅으로 내려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니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잠시 하나님의 관심을 벗어나 편히 있고 싶다는 것이다.


신앙의 역설적 표현

우리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빌닷의 설교는 온건하고, 욥의 설교는 과격하다. 빌닷은 믿음이 있는 것 같은데, 욥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확신이 없는 것 같다. 빌닷은 하나님께 복종할 자세가 되어 있는데, 욥은 하나님과 대결하는 자세로 서 있다. 신앙인들이 그들의 신앙을 하나님과의 대결 구도 속에서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은 시편의 시인이나 예언자 예레미야에게서도 볼 수 있다.

시편의 한 시인은 "하나님은, 마음이 정직한 사람과 마음이 정결한 사람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이라고(시 73:1) 배웠는데, 현실은 오히려 정반대인 것을 경험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옳다고 배워온 가치가 무너지는 현실을 보면서 시인은 그만 지금까지 지니고 온 확신이 흔들리는 위기를 겪고 있다(시 73:2). 정직하지 않은 사람, 마음이 정결하지 않은 사람들이 건강하게 살며, 사람들이 흔히 당하는 재앙도 당하는 일이 없으며, 죽을 때에도 고통을 겪지 않고 편안한 가운데서 죽는 것을 관찰하고 있다(시 73:1-9).

그리하여, 그 시인은 평생 정직하게 깨끗하게 살아온 그 시인은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온 것과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온 것이 허사라는 말인가?"(시 73: 13) 하고 탄식한다. 이러한 것은 "주께서 나를 정죄하신다면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애써서 헛된 수고를 해야 합니까?"(욥 9:29) 라고 탄식하는 욥의 경험과 유사한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흠 없이 살려고 애쓰는 시편의 시인은 오히려 견디기 어려운 형벌을 받는데(시 73:14), 악인은 만사가 형통하는 복을 받는다. 시편 시인은 이러한 것을 보고서 하나님의 정의를 이해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끝내 그는 "이 얽힌 문제를 풀어 보려고 깊이 생각해 보았으나 그것은 내가 풀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문제였다"고 하나님께 아뢴다(시 73:16).    

예레미야에게서도 우리는 이것과 유사한 경험의 묘사를 본다. 다음의 인용문을 읽다가 보면, 욥기를 읽고 있다는 착각을 느낄 정도로, 의인이 하나님에게 당하는 고난의 극치를 묘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나는 하나님의 진노의 몽둥이에 얻어맞고 고난 당하는 자다. 주께서 나를 이끄시어 빛도 없는 캄캄한 곳에서 헤매게 하시고, 온종일 손을 들어서 치고 또 치시는구나. 주께서 내 살갗을 약하게 하시며, 내 뼈를 꺾으시며, 가난과 고생으로 나를 에우시며, 죽은 지 오래 된 사람처럼 흑암 속에서 살게 하신다. 내가 도망갈 수 없도록 담을 쌓아 가두시고, 무거운 족쇄를 채우시며, 살려달라는 소리를 높여 부르짖어도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시며, 다듬은 돌로 담을 쌓아서 내 앞길을 가로막아 길을 가는 나를 괴롭히신다. 주께서는, 엎드려서 나를 노리는 곰과 같고, 몰래 숨어서 나를 노리는 사자와 같으시다. 길을 잘못 들게 하시며, 내 몸을 찢으시며, 나를 외롭게 하신다. 주께서 나를 과녁으로 삼아서, 활을 당기신다. 주께서 화살통에서 뽑은 화살로 내 심장을 뚫으시니 내 백성이 모두 나를 조롱하고, 온 종일 놀려댄다. 쓸개즙으로 나를 배불리시고 쓴 쑥으로 내 배를 채우신다. 돌로 내 이를 바수시고, 나의 얼굴을 땅에 비비신다"(애 3:1-16).

"내가 도망갈 수 없도록 담을 쌓아 가두시고, 무거운 족쇄를 채우시며, 살려달라는 소리를 높여 부르짖어도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시며, 다듬은 돌로 담을 쌓아서 내 앞길을 가로막아 길을 가는 나를 괴롭히신다"(애 3:7-9)는 표현은, 하나님이 길 잃은 사람을 붙잡아 놓으시고 사방으로 그 길을 막으신다는 욥의 탄식(욥 3:23)을 연상시킨다.

하나님이 사람을 과녁으로 삼아 활을 쏘아대신다는 주제는 우리가 이미 욥기에서 확인한 바이다. 욥이 엘리바스에게 한 말 중에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과녁으로 삼고 활을 쏘시니, 내 영혼이 그 독을 빤다"(욥 6:4)는 말이 있고, 하나님을 향한 호소에서도 "사람을 살피시는 주님, 내가 죄를 지었다고 하여 주께서 무슨 해라도 입으십니까? 어찌하여 나를 주의 과녁으로 삼으십니까?"(욥 7:20) 라는 말이 있다.


욥기 본문 인용의 문제점

빌닷이 욥에게 한 말 가운데는 우리나라 교인들이 즐겨 인용하고 애용하는 구절이 들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개역> 욥기 8:7)고 말하는 구절이다. 자영업을 하고 있는 교인들의 가게에 가 보면 이 구절이 걸려 있는 흔히 볼 수 있다. 개업 인사를 가는 이들이 가져다주었을 법한 선물이다. 기독교 교회 용품을 취급하는 곳에 가 보면 이 구절을 목판에 새기거나 붓글씨로 써서 상품으로 진열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거두절미하고 이 구절만 똑 따서 본다면, 불안한 마음으로 사업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에게나 그런 사업을 축하해 주러 가는 사람에게나 이 구절은 장차 사업이 잘될 것을 약속해 주는 구절이므로 주목을 받는 것 같다.

이미 보았고. 앞으로도 계속 더 관찰하겠지만, 욥의 친구들인 엘리바스, 빌닷, 소발, 엘리후 등이 욥에게 한 말 치고 우리 보기에 그릇된 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그러나 욥기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길은, 욥의 친구들이 한 말을 확인하는데 있지 않고, 친구들의 말을 반박하는 욥의 말, 욥의 하나님 경험, 욥의 신앙을 확인하는 데 있다. {욥기}의 문맥 안에서, 욥의 친구들은 오히려 자기들이 한 말 때문에 정죄를 받게 된다.

빌닷이 욥에게 한 이 말은, 욥이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면, 하나님이 욥의 재산을 회복시켜 주실 터인데, 처음에는 보잘것없겠지만, 나중에는 욥의 재산이 크게 불어나리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사용된 말을 전혀 다른 맥락에서 인용한다는 것은 별로 합당하지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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