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이 땅 위에서 하늘나라를 약속 받고 그 약속 받은 것을 부분적이지만 미리 맛보고 사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온전히 소유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 자들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은 그가 속한 사회와 어떤 관계가 있으며, 그가 속한 사회 속에서 그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이 그의 존재의미를 분명히 갖지 못할 때 그 사회로부터 도피하는 현실도피주의자가 되어버리든지 아니면 그 사회에 동화되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본질을 부패 시켜버리든지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 머물러 있어야 할 이유에 대해서 그리스도께서는 무엇을 말씀하고 계십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산상보훈 속에 있는 말씀에서 이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 초두에서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의 성격, 그 본질을 밝혀주는 내용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심성을 들여다보면서 애통해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온유하고 의로움을 사모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남을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고, 마음이 청결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 된 자의 본질적인 특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된 자의 사회적 책임을 교훈 해주십니다. 바로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전제요, 그리스도인의 본질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리스도인은 소금으로서 맛을 내고, 빛으로서 어두움을 밝힌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전제에 대한 설명이요, 그리스도인의 사회적인 역할과 책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소금이 그 맛을 내지 못하고, 빛이 어둠을 밝히지 못하면 그 소금은 소금이 아니요, 그 빛은 빛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존재할 의미도 가치도 없기 때문에 버림받게 된다는 것이 논리적 귀결입니다.  

그러면 이제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교훈의 의미를 먼저 생각해봅시다. 세상은 그리스도인에게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대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세상을 선한 행실로 대하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십니다.

이 점을 교훈해주시면서 예수님은 당시 어느 가정에서나 볼 수 있는 두 가지 즉 소금과 등불을 예로 들어서 교훈 해주신 것입니다.

해가 지면 당장 필요한 것이 등불이요, 음식을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소금입니다. 음식과 생선에 소금이 필요하듯이 “세상에는 그리스도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물에서 떠난 생선은 죽은 생선이요, 죽은 생선은 부패해갑니다. 부패하기 시작한 생선은 스스로 그 부패성을 중단할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소금이 뿌려져야 부패를 막을 수 있습니다.

세상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떠난 세상은 죽은 세상이요, 죽은 세상은 날로 부패되어 가는 것입니다. 세상은 스스로 그 부패성을 막지 못합니다. 세상의 부패성을 막기 위해서는 전혀 질이 다른 소금 같은 그리스도인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사회의 부패성을 막기 위해서 두 기관을 세워주셨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국가라고 하는 기관이요, 다른 하나는 가정이라고 하는 기관입니다. 날로 타락해 가는 세상에서 이 두 기관은 어느 정도 그 타락을 저지하고 견제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국가는 위임된 권위와 합의된 법을 통해서 인간의 이기적인 탐욕을 어느 정도 제어합니다. 가정은 결혼과 가족의 생명을 스스로 보호하려는 기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타락을 상호 견제해 줍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삶의 환경이 이 두 기관으로는 제대로 보존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장 강력하고 가장 영향력이 있는 장치를 설정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죄로 날마다 타락하고 부패되어 가는 사회 속에서 모든 저항세력보다 더 강한 세력,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세워진 교회를 세상에 세워 주신 것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의 부패를 저지하는 방부제로 세상에 있게 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할 때 소금으로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절대 필요한 존재이면서도 세상과는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소금의 특성이 짠맛이라면 그리스도인의 맛은 무엇일까요? 그 맛이 바로 앞서 말씀하신 팔 복에 담겨있는 여덟 가지의 특성입니다. 이 여덟 가지의 특성이 오늘 우리에게 몇%의 강도로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 순도가 몇%짜리 입니까?
마음이 가난하고, 죄를 애통하고, 온유하며, 의를 사모함이 나에게 몇% 쯤 됩니까?
남을 긍휼히 여기고, 마음이 청결하고, 평화를 이루며, 의를 위하여 핍박받은 것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100%의 순도라고 한다면 오늘 나는 몇%의 순도를 가진 그리스도인입니까?


이 부패되어 가는 세상에 정말 필요한 것은 순도 높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에게 이것이 있어야 세상의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본질이 보존되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전혀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이름만의 그리스도인은 밖에 버리어져 사람들의 발에 밟혀야 할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시대 교회를 생각해봅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교회 순도가 얼마나 될까요? 교회가 세상에 선한 영향을 주고 있습니까? 그래서 세상이 교회 때문에 삶의 질이 보존되고 향상되고 있습니까? 소금으로서의 맛을 제대로 내고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교회가 세상에 영향을 끼치기보다는 세상의 풍조에 영향을 받아 세속화 되어버린 슬픈 현실을 보고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교회 되기 위해서 개혁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요8:12, 9:5).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그의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우리가 모시고 사니 우리에게서 빛이 스며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볼 때 우리는 빛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서 비춰지는 빛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그것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 빛은 “너희의 착한 행실”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비추는 빛은 우리의 선한 행실입니다.

빛으로서 착한 행실이 무엇입니까? 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드러내 보이는 행동입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향해서 충성하는 것이요, 예수님처럼 이웃을 향한 사랑의 봉사가 선행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선한 행동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교훈은 교회와 세상,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빛과 어둠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다르기 때문에 존재이유가 있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빛이다”고 하신 것은 곧 세상은 어둡다는 말입니다. 세상이 어둡기 때문에 빛이 된 우리가 세상에서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부패되어 가고있기 때문에 소금인 된 네가 세상에서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할 이유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없으면 세상이 어둡고, 세상이 썩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요즈음 세상이 점점 부패해가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2, 30년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죄악이 자행됩니다. 그 질에 있어서나 규모에 있어서 부패의 정도가 점점 더 심해갑니다. 이러한 우리의 삶의 환경을 무엇으로 회생시키고 보존할 수 있을까요?
정치체제, 경제적 풍요, 사회제도개선, 교육이 사회에 빛을 줄 수 없습니다. 세상을 밝히는 빛은 그런 체제나 조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빛은 그리스도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교회입니다.

여기에 의문이 생깁니다. 이 나라에는 수많은 교회가 있고, 그리스도인이 있는데 왜 세상은 점점 더 어두워져 갑니까? 그것이 문제입니다. “너희는 빛”이라고 한 예수님의 말씀이 허무한 말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지금 우리의 교회에 빛이신 예수님이 계시지 않든지, 아니면 위로부터 공급되는 기름이 떨어졌든지, 그것도 아니라면 기름을 빨아드리는 심지에 문제가 있든지 일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교회가 소금이 아니든지 소금의 모양은 있는데 잡다한 것이 섞여서 짠맛을 잃어버리고 중화되어 버린 것일 것입니다. 이 시대 교회, 이 시대 그리스도인의 본질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참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고, 우리시대 우리의 교회가 참 교회가 되지 못하면 버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교회개혁의 당위성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개혁의 방법을 생각하기 앞서서 교회역사가 보여주는 교훈으로 우리자신을 비쳐보고 우리의 실상을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성경 역대하에서 아사(대하15), 히스기아(대하29-31), 요시아(대하34-35)의 개혁사건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느헤미아, 다니엘에서도 교회개혁의 원리를 보게 됩니다. 신약 사도행전에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빛나는 요소들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16세기 종교개혁시대, 18세기 미국의 대 각성 시대, 그리고 1900년대 초 웨일즈와 한국에서 일어난 개혁과 부흥기의 모습들을 분석해보면 공통되는 요소를 발견하게 됩니다.

시대와 민족과 지역을 초월해서 하나님이 그의 교회를 방문했을 때 교회는 정상적으로 빛을 발했고,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공통되는 특성이 현저하게 빛났습니다. 이제 개혁되고 부흥된 시대의 교회의 요소로 우리의 현실을 진단해봅시다.

첫째, 성경의 말씀을 절대적인 권위로 받아드린 점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내준 권위의 계시로 받아드린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 사상, 시대 풍조에 오염되고 뒤틀린 삶의 가치와 표준이 다시 성경으로 돌아오는 현상이 두드러졌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말씀을 한없는 경외심으로 대하며 겸손히 배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둘째, 영원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받아드렸습니다. 설교자는 천국과 지옥, 용서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담대하게 선포했으며, 하나님의 백성들은 다가오는 세상의 빛 속에서 지금 그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자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 간수장처럼 “내가 무엇을 하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이 생의 근본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시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은 어디에 집중되어 있습니까? 구원문제와 다가오는 영광의 세계의 빛 속에 서게 될 그것이 중심이 되어 있습니까? 사회, 정치, 문화 예술, 경기, 재산 등에 집착되었던 관심을 철수시켜서 그러한 일이 하나님의 영광에 직결되는지를 정직하게 생각하고, 영원에 대한 가치를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 하다면 개혁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종교개혁은 바로 그러한 인간들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꿔준 것입니다.

셋째, 살아 계신 하나님의 대한 열심이 충만했습니다. 하나님의 방문으로 개혁과 부흥의 계절이 왔을 때는 종교적인 일에 관심을 갖던 자들이 하나님의 ‘임재의식’으로 충만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두려움과 진노의 손아래 있음을 자각하고 그 형벌로부터 면제해주신 하나님에 대한 감격과 열정의 마음이 식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이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감격의 열정이 오늘 우리의 가슴에 있습니까? 그것이 없다면 우리의 시대는 개혁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넷째, 거룩에 대한 동경심이 강렬하게 일어났습니다. 깊은 죄의 의식에서 용서와 해방의 자유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즐기기 때문에 더 깊은 교제에 대한 열망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시기의 성도들은 매일 매일 일기를 기록한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거의 자기성찰, 죄의 고백으로 채워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시대에 이런 하나님과의 보다 깊은 교제를 사모하면서 지극히 작은 죄라도 씻고자 하는 회개의 자세가 충만할까요?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기쁨과 소망이 없다면 그것은 바로 이 거룩에 대한 동경심의 결핍에서 온 문제입니다.

다섯째, 교회에 대한 관심이 새로워졌습니다. 개혁기의 성도들은 사물에 대한 성경적인 전망을 갖게된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교회에 대한 성경적인 관심입니다. 교회가 바로 인간 구원의 터전이요, 인간을 변화시키는 모체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교회가 바로 하나님의 역사 운영의 핵심이요, 그 초점이 되어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가 교회 되어지도록 하는데 관심을 집중합니다. 교회 속에 침투 되어있는 세상 적인 것, 거짓교리, 형식주의, 무질서, 인위적인 권위주의에 대해서 개혁을 단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시 교회의 최고 권위자로 임하시게 되었고 영광을 받으시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세상에 대해서 담대하게 그들의 구주를 증거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 인간의 모든 삶에 하나님의 빛이 비춰지게 되고 그 모든 자리에서 소명과 헌신이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시대 우리의 교회가 세상에 대해서 이런 권위를 갖고 확신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까? 그러하지 못하다면 개혁이 필요한 때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천대받는 자리에 있어야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섯째, 자발적인 변화의 삶이 가속되어졌습니다. 죄에서 의로, 나약한 삶에서 열심 있는 삶으로, 전통적인 습관에서 새로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로, 수동적인 자리에서 능동적인 헌신으로 급속히 변화를 갖게 됩니다. 성도들은 함께 모여 찬양하며 기도하고 서로 권면하면서 그리스도를 증거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서로 진보해 가는 것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깊은 수면에서 깨어난 것처럼 활기차고 생명력이 넘치게 됨을 경험했습니다. 무감각하고 나약하며 자기 만족의 자리에 빠졌을 때를 부끄럽게 생각하고 그들이 해야 할 일을 새롭게 보기 때문에 시간이 귀한 것입니다.  

일곱째, 영원한 빛 속에서 자기의 현실을 보기 때문에 새로운 소명을 자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자기가 할 일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찾아 기쁜 헌신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시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소명을 알고 그 소명 때문에 살아가는 자들입니까?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잠29:18)

그러면 이제 교회가 개혁되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개혁은 하나님의 방문해주심의 결과입니다. 이것은 스가랴의 메시지에서 밝혀진 개혁에 대한 정의입니다. 스가랴는 소생과 회복에 대한 환상을 보게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찾아와 주실 때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16세기의 요한 칼뱅은 이 스가랴의 계시를 보면서 “이 스가랴의 환상이야말로 우리시대에 적용되어져야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꼭 같이 적용되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긍휼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치어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다시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 여호와가 다시 시온을 안위하여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리라 하셨다 하라”(슥1:16-17).

이것은 개혁의 외면적인 형태입니다. 하나님이 방문하실 때 파괴된 집이 다시 건축되고 황폐된 성 읍들이 다시 풍부해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외적인 회복과 더불어 내적인 기쁨과 평화와 만족도 함께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임하여 네 가운데 거할 것임이니라”(슥2:10).

둘째, 개혁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결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계시록 2, 3장에서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의 교회의 치명적인 병을 진단해주시고 친히 처방해주신 내용입니다.

에베소교회는 첫사랑을 잃어버렸다고 진단하시고 다시 회복하는 길을 알려주십니다. 사데교회는 살았다하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었다고 진단하십니다. 이런 중병을 앓고있으면서도 본인은 모른다는데 더 큰 심각성이 있습니다. 주님이 그것을 일깨워주십니다. 그리고 회복의 길을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교회의 개혁은 전적으로 주님의 사역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개혁이 필요함을 알았으면 주님께서 개입해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 개혁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끊임없는 노력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영적 생명을 회복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찾아오시도록 길을 닦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내 삶에 파헤쳐진 자리를 고르라는 것입니다. 불거진 돌들을 제거하고, 골짜기는 메우라는 것입니다. 불순종으로 파헤쳐 놓은 길을 정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윗처럼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139:23-24).

그래서 우리는 내가 제거해야 할 돌이 무엇인지 보여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 방문해주시는 영광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사40:4-5).

넷째, 개혁은 회개와 함께 시작합니다. 개혁은 잘못된 것을 버리고 새로운 길에서 하나님을 찾음으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구약의 모든 개혁운동의 기사에서 볼 수 있는 원리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계3:18-20에서 이점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 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 말씀을 보면 회개의 원리가 잘 밝혀졌습니다. 먼저 회개는 자기의 현실 인식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영적 결핍을 인식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부유하다고 말하나 실상은 가난하고, 벌거벗고, 눈 먼 가련한 자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 다음 회개는 자기의 결핍을 주님께 알려드리고 그것을 주실 것을 구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는 주님이 다시 찾아와 주시도록 문을 열어드리는 것입니다.

개혁은 하나님의 백성이 끊임없이 감당해야하는 직무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영적인 생명을 소생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를 개혁해주시기 위해서 찾아와 주시도록 준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고, 죄짓던 자리에서 떠날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현장에 곧장 오시도록 대로를 만들 수는 있습니다. 그것은 개혁을 위한 우리의 몫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와 주시도록 준비함으로서 하나님의 개혁에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글 / 장희종 목사(대구 명덕교회, 고신)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