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6일자 성지교회 사태와 관련한 기사를 읽고, 하나님의 공의가 결의된 시각에서 한 쪽의 주장만을 일방적으로 다루어, 이미 객관성을 상실한 편파적인 지난 기사에 대해 성지교회를 섬기며 그 동안 교회의 사태 속에서 교회의 화합과 상처받은 영혼을 위해, 그리고 예배의 회복을 위해 눈물로 기도했던 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몇 가지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고자 한다.

지난 기사에서 「성지교회는 주일마다 일부 당회원들과 교인총회측 교인들 간에 교회당 진입을 둘러싸고 치열한 몸싸움의 반복과... ...성지교회 사태가 이렇게 파행으로 몸살을 앓게 된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 보면, 한국교회의 구조적인 문제점의 하나로 지적되고 있는 소위 교인들의 민주적인 의사 결정권이 철저히 무시되어진 것을 발견하게 된다... ...현행 예장총회(합동) 헌법으로 볼 때 교인들은 공동의회 소집을 청원할 수 있으나 당회의 결의가 아니면 공동의회는 열릴 수 없는 법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래서 목회 현장에서는 '교인 1백명보다도 장로 1명이 더 중요한 것이 장로교'라는 비민주적인 말이 나돌 정도이다.」

위 기사를 보면, 교회 안에서 몸싸움과 파행이 자행되고 있는 사태는 한국교회의 구조적인 문제점의 하나로 교인의 민주적인 의사 결정권이 무시되는 현행 법적 한계로 인해 교인들의 청원에도 불구하고 공동의회를 열 수 없었기에 발생했다는 것이 요지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구조적 문제 속에 있는 현행법에 의해 장로로 선출된 장로들이 현행법대로, 반대 의사를 표한 그들(11분의 장로)이 문제란 말인가? 아니면 잘못된 악법이 문제란 말인가? 이 문제부터 바로 잡고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

실정법만이 법이라고 주장하는 법실증주의(法實證主義)의 입장에서 보면, 악법도 또한 법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인간이 정하는 실정법보다 한층 고차(高次)의 평가규범인 자연법의 존재를 주장하는 자연법론의 입장에서는, 악법(자연법에 반하는 실정법)은 법이 아니라고 보고 있는 것으로 안다.

실정법보다 한층 고차의 법이라고 하니 자연법론의 입장에서 보아, 당회의 결의가 있어야 한다는 조항은 교인들의 민주적 의사권이 철저히 무시된 악법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자연법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최상위의 법이라 할 수 있는가? 묻고 싶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아니 부정해서는 안될 하나님의 법이 그 어떤 법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것을 알리라.

교권주의에 대항해 개혁의 역사를 열어가고 있다고 주장하는 교인총회측이 하나님께만 집중되어야 할 예배를 집중할 수 없도록 방해하고, 교인(11분의 장로 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순수한 예배조차 드릴 수 없도록 막는 이 행포들은 과연 하나님의 법에 합당한가?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상황에서 성지교회를 떠난 영혼과 상처받은 영혼들에게 "11분의 장로가 악법을 준수하며 공동의회 소집을 막았기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의 법을 어겨도 된다"라고 변명할 것인가? 그리고 하나님의 법과 온전한 예배는 개혁을 이룬 뒤에, 하나님보다는 개혁이 먼저라고 주장할 것인가? 방법적인 면에서는 그들도 잘못을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잘못임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불법을 행하는 것은 그들의 개혁이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상위에 있는 하나님의 법을 범하고 있는 더 큰 불법자임을 깨닫기 바란다.

이어 이어진 기사에 의하면, 「이런 사태의 근본적인 발단은 오히려 전임목사(지금의 원로목사)가 제공한 측면이 없지 않다... ... 이러한 지적이 제기되는 이유로는 처음 박 목사를 외국에서 청빙하면서 당회에서 임시목사로 청빙하느냐 아니면 위임목사로 청빙하느냐를 두고 당회원(장로)들 간에 의견이 9대9로 팽팽히 맞섰을 때 당시 임시 당회장이었던 황해영 원로목사가 임시목사로 청빙하자는 측에 1표를 던지면서 불씨를 잉태하게 된 것이었다」라고 사태의 근본적 발단에 대해 단정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지난 기사가 그토록 민주적 의사권을 옹호하고 있으니, 하나 더 짚고 넘어가자. 원로 목사가 9대9로 팽팽히 맞섰을 때 본인의 소신대로 민주적 의사권을 행사해 임시목사 청빙에 1표 던진 것이 마치 작금의 교회 사태의 근본적 발단이라는 단정적 논리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어불성설이다.

원로목사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누구도 간섭하고 침범할 수 없는 참정권을 행사한 것이며, 이에 대해 가타부타를 논하며 간섭하는 것이 더 비민주적이라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아울러, 교인들의 의사가 민주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교권주의의 횡포이고, 원로목사나 장로들의 의사는 잘못된 한국교회의 구조적 개혁을 위해서는 철저히 무시해도 된다는 다분히 이중적 잣대로 일관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문제다.
  
이런 비민주적이고 편파적인 논리는 성지교회의 정상화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음은 물론, 하나님의 교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들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는 교인총회측의 행동들을 마치 정당한 것인 양 그릇된 진리로 세상에 아첨하는 곡학아세(曲學阿世)의 꼴이다.

또한 이런 논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에 죄의식 없이 행하고 있는 교인총회에 대한 우려나 반성의 촉구는 없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존재의 이유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임을 잊도록 우매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는 처음부터 반대편 입장의 주장은 단 한 줄도 언급하지 않은 채, 독자에게 양쪽의 주장을 모두 살펴보고 신앙의 양심에 따라 판단할 기회를 차단하고 있다는 것에서 그 문제점을 더욱 확실히 드러내고 있다.

또한 교인총회의 엄청난 만행들은 미온적으로 덮어둔 채 사태의 일부만을 다루어 맹인이 코끼리 다리만을 만져 보고 기둥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과 같으니 꼴이니 더욱 우습다.

필자 또한 한국교회의 문제점에 대해, 그리고 교인 다수가 공동의회 소집을 원하다면 소집해야 한다는데 대해서는 동의한다. 하지만 그 어떠한 이유나 명분이 있더라도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이 계신 성전에서 지금까지 행한 교인총회의 만행은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계급 없는 국가, 공산주의 평등사회를 좇아 동포에게 총을 겨누었지만 결국 "인간 세상에서 완전한 평등이란 허구"이며 "공산주의 사회는 또 다른 계급사회"임을 우린 분단의 아픈 역사 속에서 이미 배워 알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폭력과 인신공격으로 이룬 개혁은 교인총회측이 그토록 저항하는 또 다른 교권주의를 낳을 수 있음을 명심하기 바란다.

이 문제가 비단, 성지교회만의 문제이겠는가? 우리 기독교는 기다림의 종교라 알고 있다. 기도하며 메시아를 기다렸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폭력으로 이룬 개혁보다는 기도하며 한국교회의 잘못된 구조적 문제점을 정당한 절차를 거쳐 교권에 의해 교인들의 기본권이 무시되지 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더 중요하며, 우리 한국교회가 함께 고민하며 풀어가야 할 숙제 아닌가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읽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우리 성지교회의 회복을 간절히 기도해 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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